종교는 신비를 설명하기 이전에,
슬픔을 받아들이기 위한 언어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질 때,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사람은 신을 찾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종교는 사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사랑과 자비보다 먼저
교리와 율법, 계율이 앞서기 시작했다.
예수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의 편에 섰다.
그가 꾸짖은 것은 죄인이 아니라,
죄인을 판단하던 율법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는,
이웃을 판단하고 배제하며
신앙의 이름으로 혐오를 허용하고 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많은 절대적 교리를 가진 종교다.
이 두 성격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은 쉽게 배타성으로 바뀐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동성애는 죄다.”
“타종교는 미혹이다.”
이 문장들은 사랑이 없는 교리가 낳은 결과다.
기독교는 원래 죄 있는 자를 품으려는 종교였다.
하지만 죄인을 선별하고 배척하려는 종교로 기능할 때,
그 위대한 메시지는 추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 신앙은 사랑을 독점한 증오의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의식 없는 자들에겐 위험한 무기가 된다.
사랑 없는 자가 성경을 인용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혐오를 포장한다.
불교는 자비와 공감을 중심에 둔다.
모든 생명은 윤회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이며,
그래서 서로의 고통을 감싸야 한다.
그러나 불교조차도 교학적 체계가 강해질수록,
자비의 실천보다는 형식과 수행 경쟁이 앞서고,
출가와 계율을 이유로
세속의 고통과 단절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슬람은 샬롬(평화)과 나눔을 강조한다.
무슬림은 신앙을 통해 타인의 삶에 책임을 지는 자이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고,
자비를 실천할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
율법(샤리아)의 엄격함이 앞서며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억압이 발생할 때,
이슬람의 자비는 가려진다.
힌두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 연결성을 말한다.
카르마와 윤회는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그 어떤 생명도 하찮지 않으며,
고통은 곧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고통이다.
그러나 카스트 제도, 여성 차별 등
사회적 구조가 종교를 이용하게 되면서
힌두는 포용의 철학이 아닌 분리의 이념으로 오해되었다.
모든 종교는 ‘길’을 말한다.
교리와 계율은 그 길을 걷기 위한 이정표다.
그러나 그 이정표를 신격화하거나,
그 이정표에 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할 때,
종교는 사랑의 언어를 잃는다.
교리는 삶을 돕기 위한 도구이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다.
교리는 다리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바보란, 사랑 없이 믿는 자들이다.
깊은 질문 없이 문자만 따르고,
의심 없이 교리를 신격화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믿을 때,
신의 언어는 혐오의 말로 바뀐다.
지옥은 현실이 되고,
신앙은 폭력의 형식이 된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종교가 교리로 타인을 규정할 때,
그 ‘지옥’은 더 명확해진다.
종교는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교리는 종종 지옥을 만든다.
그럴 때 우리는,
카뮈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유일한 진리는 사랑이다.”
종교는
위로였고,
동행이었고,
인간의 고통을 덜기 위한 고대의 지혜였다.
그러나 사랑 없는 종교는
모든 종교를 망친다.
종교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교리 이전에 사람을 보고,
율법 이전에 자비를 느끼며,
신 이전에 고통을 감싸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신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