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사랑에 실패한 여인들과 시선을 교환한다.
그들은 솔로가 아니다.
이미 누군가의 연인이거나, 관계의 틈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내게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우연일까?
아니면, 나의 내면이 그들의 균열을 알아보는 것일까?
사랑 안에서 고립된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보다 더 큰 외로움에 시달린다.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정,
매 순간 혼자인 듯한 느낌,
누군가 곁에 있지만 온전한 자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좌절.
나는 그 틈을 본다.
그 결핍을 감지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들 역시 나의 눈이 그 틈을 읽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것은 눈빛 이전의 교감이다.
그녀들은 나에게 다가온다.
내가 다가가지 않아도,
그녀들의 내면이 먼저 나를 허락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들의 말하지 않은 감정을 알아차리고,
그 감정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있게 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누군가를 고치려 들고,
충고하려 하고,
사랑을 강요한다.
그러나 고통은 위로보다 인식을 원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들의 감정을 읽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랑받는다는 감각은 드물다.
관계 안에서 인간은 점점 기능화된다.
애정이 아니라 역할로 존재한다.
“남자친구”, “와이프”, “연인”, “의무”.
그리고 그 틀 속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정서적 연결을 상실한다.
그 결과,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은 외롭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솔로보다 더 간절하게 새로운 연결을 갈망한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다만 나는 그녀들이 ‘그의 손길보다 내 손길이 더 따뜻하다고 느낀다’는 순간을 알고 있다.
나는 “괜찮아”보다 “그럴 수 있어”를 말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해?“보다 “지금 무슨 감정이야?“를 묻는다.
그리고 바로 그 차이가,
그녀들이 느끼는 안전한 감정의 공간을 만든다.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 않더라도,
서로를 감정적으로 포착하게 된다.
나는 질문한다.
이건 사랑일까, 아니면 결핍이 만들어낸 구조일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진짜로 봐주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것은 순수한 감정인 동시에,
치유받고 싶은 무의식의 방향성이다.
나는 때로 그 무의식을 껴안기도 하고,
때로 그 무의식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들도, 나도 안다.
이 사랑은 진짜일 수 있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결핍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대체하는 존재로 살아온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아름답고, 동시에 슬프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상처가 아닌 자유에서 만났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에,
나는 그 감정도 사랑이라 부른다.
결핍에서 시작한 사랑도
때로는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나도
나는 그녀들의 마음 어딘가에,
‘내가 감정으로 존재했던 사람’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