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와 안경잡이

by 신성규

세상은 점점 ‘이성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대체로 ‘안경잡이’들에게 있다.


안경은 상징이다.

그것은 정보를 많이 알고, 실수를 덜 하고, 위험을 피하려는 존재의 메타포다.


사람들은 흔히 양아치를 무서워한다.

그의 언행은 직설적이고, 때론 물리적 위협을 가한다.

그러나 양아치가 위험하다는 건 대개 그가 법이나 윤리를 무시할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또 다른 양아치가 있다.

안경잡이.

그는 조용히, 혹은 점잖게 앉아 있다.

책을 읽고, 논리를 구성하며, 말끝마다 인용을 붙인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떤 태도는

양아치보다 더 교묘하고, 더 위험하다.


이들은 지식의 갑옷을 입고 산다.

문장 하나하나에 논문을 바르고,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논리적 정당성이라는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화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지배를 위한 논리일 뿐이다.


그들은 우위를 증명하려 한다.

그리고 그 칼끝은, 진실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찌른다.


양아치는 공격할 땐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안경잡이는, 공격하면서도 자신은 공격하지 않는 척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저는 그냥 논리적으로 말한 겁니다.”

“팩트만 이야기한 거예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를 조롱하거나, 말문을 막기 위해 준비된 말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적 권력의 행사이며,

일종의 학문적 갑질이다.


양아치는 거리에서 폭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안경잡이는 언어와 권력 속에서 폭력을 휘두른다.


안경잡이는 양아치만큼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폭력을 ‘지적 정당성’으로 포장하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세상을 잘 이끌고 있는가?

안전하지만 기이하게 공허한 이 세계는 누구의 작품인가?


이 세상에서 ‘멍청한 행동’은 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서사는 멍청한 선택에서 출발한다.

돈키호테는 멍청하게 풍차와 싸웠고,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멸망했고,

의리는 종종 이성보다 깊은 윤리였다.


그런데 안경잡이의 서사엔 ‘의리로 인해 파멸한 비극’이 거의 없다.

그들은 대개, 의리보다 생존을 택한다.

정확성, 안정성, 유리한 조건,

그들은 인간의 불합리를 배제하려 한다.


그러나 그 배제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 자체를 잃는다.


지배는 안경잡이의 손에 있을 때 무엇이 사라지는가?


첫번째는 충동이다.

충동은 어리석음일 수 있지만,

종종 가장 인간적인 사랑과 용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안경잡이는 계산한다. 충동을 설계하지 않는다.


두번째는 실수의 존엄이다.

인간은 실수하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안경잡이는 실수를 두려워하고 숨긴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의 미학을 모른다.


세번째는 감정의 도약이다.

사랑, 희생, 공동체에 대한 불가해한 믿음.

이것은 논리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안경잡이들은 감정을 비합리성으로 간주하고 정리하려 든다.


그래서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현명하지만 무미건조하고,

정확하지만 도무지 설렐 줄 모른다.


그렇다면 적당히 논 사람이 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는가?


‘적당히 논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그리고 틀려도 괜찮다는 걸.


그는 실수한다.

그러나 웃을 수 있다.

그는 충동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때로는 정답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적당히 논 사람은 이성보다 관계를 중시하고,

정답보다 진심을 더 오래 붙잡는다.


그들은 세상을 정확히 해석하진 못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법은 더 잘 안다.


세상은 너무 많은 논리와 정답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맞는 말’에 중독되었고,

‘살아있는 말’을 잃었다.


안경잡이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세상에 온기가 스며들기 위해선,

적당히 논 사람들의 시대가

한 번쯤은 필요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팔로워 143
이전 21화놈팽이 회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