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폭격에 쓰러질 때 유럽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 타격했을 때, 유럽은 조용했다.
인도주의와 국제법, 유럽이 그토록 외쳐온 가치들은 누구에게 적용되고, 누구에게는 침묵되는가?
도덕은 보편적이어야 하지만, 국제 정치에서는 도덕조차 선택적이다.
이번 이스라엘-이란 충돌에서 유럽이 보여준 태도는 그 사실을 냉정하게 증명했다.
팔레스타인은 강대국에 저항할 수 없는, 분열된 영토다.
그들은 국가조차 아닌 채, 영속적인 난민 상태에 놓여 있다.
죽어가는 아이들과 폐허가 된 거리들은 너무도 명확한 ‘불의’이기에,
유럽은 여기서 자신의 도덕성을 투사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도와줘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을 위해 이스라엘과 단절하는 유럽 국가는 없었다.
반면, 이란은 다르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고 있고, 군사적 역량이 있으며, 핵개발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서구 자유주의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
유럽은 이란을 두려워한다.
핵 확산, 이슬람 정권의 급진화, 내부 이슬람계의 불안정성 등
이란은 유럽이 감정적으로 연민할 수 없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대상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했을 때 유럽이 은근한 지지를 한 것은,
도덕의 부재가 아니라, 전략의 우위였다.
유럽은 항상 도덕을 말한다.
국제법, 인권, 자결권, 평화…
그러나 이 도덕은 힘 없는 자에게만 적용된다.
힘 있는 자에겐, 전략이 먼저고 도덕은 침묵한다.
팔레스타인에겐 “불쌍하다”고 말하지만,
이란에겐 “핵은 안 된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엔 “자위권”을 말한다.
이것은 우연한 정치적 처신이 아니다.
유럽 자유주의의 구조 자체가 ‘선택적 보편주의’로 설계되어 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돌과 피의 저항이다.
이란의 저항은 체제와 핵의 저항이다.
누구의 저항은 낭만적이고,
누구의 저항은 위험하다.
결국 문제는 저항의 정당성에 있지 않다.
문제는 그 저항이 유럽에게 위협이 되느냐 아니냐이다.
도덕은 가장 강한 무기다.
그러나 그것이 힘 앞에서 선택적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 감정의 정치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해도 정당화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누구의 고통은 보여지고, 누구의 고통은 가려지는가?”
“도덕은 힘의 하녀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