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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May 06. 2024

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멈출 시간은 농부에게 없는 것

5월 농장 일지 

1 해가 쨍쨍 나는 오후에 기차를 타고 농장에 출근하는 기분을 좋아한다. 점심밥을 든든히 먹어서 힘도 좋다. 당연하지. 누가 아침 출근을 좋아하는가. 오후가 좋다. 당연한 것이다. 노동은 그런 것이다. 



2 일요일에는 우리 동네와 농장 사이를 오가는 기차 수가 적다. 오후에 기차가 많지 않아 고민하다가, 그냥 오전에 출발해서 농장에 내내 있기로 했다. 이게 옳은 결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결정이 없을 때는 가장 가능한 걸 선택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뭔가 득 될 것을 궁리한다. 일요일에는 농장 사무실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으니, 직원 책상에서 글을 쓸 수 있다. 선생님 눈 피해 읽는 만화책이 더 재밌는 것처럼, 농장에서 한국어로 된 일(쓰기나 읽기)을 하면 두세 배 더 달콤하다. 


오늘의 목표 근무는 4시간. 아침에 90분간 모종을 화분에 옮겨 심은 뒤, 랩탑을 켰다. 


3 오늘은 해가 나서 다행이다. 1주일 내내 흐렸다. 비오는 날, 추운 창고 안에서 돕바를 입고 일하는 것은 즐겁지 않았다. 전생에 북유럽에서 우울증으로 건오징어가 된 사람이었는지, 유럽에 살기 시작한 후로 흐린 날엔 무척 힘이 든다. 지난주 축축하고 흐린 날 일할 때는 힘이 들었다. 계속 반복하면 괜찮아지리라 희망한다. 


기분이 고스란히 표정이 되는 나에게 농부 위고가 틈틈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답하기가 곤란해 위고에게 질문을 던졌다. 비를 맞으며 일하는 게 힘들지 않냐고. 

“비가 적당히 오면 그냥 해. 물론 좋지는 않아. 아주 많이 오면 다음으로 미뤄. 그래서 비 오는 주간에는 스케줄이 계속 뒤로 밀리는 거야. 그런데 오늘 비가 아주 많이 내리지만 내일 마켓에 가지고 갈 채소를 수확해야 한다면? 그러면, 일을 해야 해.” 


해야 하는 건, 해야 하는 것. 위고는 영어를 잘하고 설명도 잘했다. 머리가 개운해졌다. 


4 라텍스 장갑을 끼고 일한다. 프랑소와 씨는 ‘감각이 둔해서 별로다’라며 맨손으로 일한다. 그래서 늘 자기 손가락을 유심히 보며 고민한다. “왜 안 되지?”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왜 안 빠지냐는 것이다. 나는 장갑을 권해본다. “그러면 안 느껴져서 별로야.” 하루종일 흙과 식물을 느껴야 하는지? 쌀알에 글을 새기는 공예가도 아닌데. “굳은살이 여러 번 생기고 나면 레더가 될 거야.” 그게 멋질 거라는 표정이다. 


왜 손을 가죽으로 만들고 싶은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생각을 접는다. 아픈 손보다는 레더 손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게 더 멋져서일까? 나는 검정 라텍스 장갑 100개 들이, 하얀 라텍스 장갑 100개 들이를 사 두었다. 


5 장갑 이야기. 라텍스 장갑을 끼면 살림 속도가 몇 배 빨라진다. 설거지, 음식물 처리, 고양이 화장실 처리, 세탁물 꺼내어 널기. 이걸 안지는 이년 정도 됐다. 집안일은 비위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어릴 때 나는 비위가 몹시 약했다. 초등학교 때는 공용화장실에 가는 게 고역이었다. 어른이 되어 일할 때는 비위 따위 무시하게 됐다. 노동의 기억. 나는 여행잡지 취재를 오래 했다. 어촌에서 생선 촬영을 할 때 아무렇지 않았다. 비린내나 생선의 얼굴(으악) 같은 게 아무렇지 않았다. 집중해서 그렇다. 프랑스에 와서 집안일과 농장일 둘 다 비위가 고역이었다. 우리 집은 17세기인가 하여튼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집이라 뭐랄까, 중세적이다. 


아니다. 이건 핑계다. 집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 


한국에서는 파트너가 집안일을 리드했고 많이 했고 우리는 외식, 매식을 종종 했다. 김밥과 순대와 만두를 사 와서 한 끼 먹고 비닐쓰레기는 우루루 뭉쳐 버리면 됐다. 치우는데 3분. 


프랑스에서 김밥을 말면 음식물 쓰레기와 설거지 거리가 이따만큼 나온다. 농장에서 가져온 채소에는 흙이 많이 붙어있고 아주 자주 달팽이가 숨어 있다. 시든 부분도 그대로 달려 있다. 그래서 다듬느라 시간이 걸리고 다듬어낸 부분이 작은 산으로 쌓인다. 


나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나서, 이것도 직업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25분 동안 주방 알바’, 타이머 on! 

영어나 프랑스어로 들은 것을 한국어로 다시 메모하는 습관. 

6 지렁이, 개미, 개미 알(으아아아아악). 나는 곤충과 친하지 않다. 프랑소와 씨는 종종 레이디버그(빨강 무당벌레?)의 사진을 찍으며 ‘너무 예쁘다’며 감탄한다. 그러다가 “이래서 일정이 밀려.” 하며 반성을 한다. 나는 곤충의 아름다움의 매료되어 멈추어있지는 않는다. 엊그제 샐러리 밭의 잡초를 뽑았다. 그러다 개미군단과 에그(프랑스와 씨는 ‘알’이라는 한국어를 몰라 ‘개미 에그’가 많이 무섭냐고 나에게 물었다)군단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눈앞의 일이 무섭고 징그러울 때, 해치우는 방법이 뭘까. 그걸 보다가 지렁이를 보니 지렁이는 양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렁이가 편해진다고?


7 개미에그군단을 보고 비명을 지른 게 좀 민망했다. 그래서 샐러리 밭 잡초를 완벽하게 처리했다. 만회의 기회. 시간이 화살이었다. 땀이 뻘뻘 났다. “퍼펙트.” 등뒤에 프랑소와 씨가 온 줄도 몰랐다. 밭을 둘러본 프랑소와 씨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한 놈이 뿌리가 질기고 깊어서 절대 안 잘라지는데, 호미로 해도 안되고 손으로 잡아 뜯어도 안된다, 혹시 여기 낫 같은 게 있냐고 물었는데 프랑소와 씨는 “그냥 이렇게 두면 되지.” 라며 잘린 뿌리에 흙을 대충 뿌렸다. 저 놈이 다시 자라 샐러리를 뒤덮으면 어쩌지, 아주 그냥 뿌리를 조사버려야 하는데…하는 한국인적 발화가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나도 이제 그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 오이인지 호박인지 뭔가가 타고 올라갈 지지대 끈을 설치했다. 두 명이 해야 수월한 작업이었다. 한 명은 천정의 줄에 고리를 걸고 다른 한 명이 그것을 작물과 연결한다. 

9 마켓 준비. 붉은 양파, 대파, 쪽파, 근대 같은 채소를 손질해 묶는다. 채소에 붙은 흙을 떨어낸다. 뿌리를 짤막하게 자른다. 시든 부분을 가위로 싹독 자른다. "농약을 뿌린 것이면, 내 손에도 농약이 스미겠지? 그러면 농업 노동자의 신체에 농약이 서서히 쌓이겠지?" 라는 생각. 


이 농장에는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만 참여할 수 있다. 자주 검사관이 와서 철저히 검사한다. 유기농이 아닌 씨앗을 심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한국 채소를 잔뜩 심고 싶어서 한국의 유기농 씨앗을 알아보았으나, 구하기가 그다지 수월치 않았다. 미국의 한 유기농 농장에서 한국 유기농 채소를 키운다는 기사를 보고, 배송을 받고 싶어서 알아보았으나 프랑스로 씨앗을 가져오는 게 금지였다. 이래저래 노력해 보았으나 일단 포기. 


생각을 지속하면서 손을 계속 움직인다. 꺾여진 것, 시들어 끝이 노랗게 된 것들을 잘라 한데 모은다. 집에 가져가 파김치, 파전, 양파장아찌, 근대 볶음 등으로 활용한다. 그럴 때마다 밀레의 <이삭 줍기>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를 떠올린다. 이삭을 주워 집에 가져가 요리해 가족을 먹인다. 이런 잡념 때문일까. 지난번엔 남은 채소 뭉치를 농장에 두고 퇴근했다. 

10 프랑소와 씨는 아주 가끔 진지하게 고민을 토로한다. 아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었을 때 ‘시간’이라고 답했던 대화였던 것 같다. 

“시간이 늘 부족해. 좀 더 효율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자꾸 상상에 빠져. 채소와 곤충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간이 가거든.” 

취미 원예가와 달리 직업 농부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 꽃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멈추어 있을 시간은 없는 것이다. 오후에 마켓에 나가려면 오전에 기계처럼 움직여야 한다. 워치를 끼고 알람을 맞추는 건 어때요,라고 조언하려다 만다. 식물을 감각하려고 장갑도 안 끼는 사람이 워치를 찰 것 같지 않아서다. 현대인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과한 의존에 대한 설명이 나올까 봐 듣기 싫어서 말하지 않은 게 아니다. 절대로. 


11 연녹색 샐러드 채소의 계절이다. 커다란 샐러드 잎을 한식에는 쌈으로 이용한다. 바타비아라는 이름의 샐러드 채소에 중독되었다. 쓴 맛이 없고 여리지도 않아서 좋다. 아작아작하다. 꾸겨넣을 수 있을 만큼 넣어서 샌드위치를 만들면 뿌듯하다. 쌀밥을 잎에 얹고 고추장이나 쌈장을 얹어 싸서 한입에 먹는다. 


커다란 한 통을 이틀에 다 먹고 아주 뿌듯했다. 건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프랑소와 씨가 바타비아를 대형상자에 담아 시골집에 가져갔다.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냐고 물으니 “아니. 닭.” 아직도 싱싱한데 이 귀한 것을 닭에게 주다니! 한국에서 이게 얼만데! 


닭에게 가끔 신선한 잎채소를 주면 훨씬 맛있는 계란을 낳는다고 했다. 네 마리의 암탉이 일주일에 각각 5개씩의 알을 낳는다. 겨울엔 그보다 줄고, 여름에도 종종 건너뛰는 날이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일주일에 스무 개의 달걀을 먹을 수 있다. 

노란 꽃은 국화...가 아니라 쑥갓이다. 걔네, 형제자매인가 봐. 

11 지난주에 어려웠던 작업. 줄 맞추기. 바질, 고수 등의 허브를 줄 맞춰 8개씩 심었다. 줄이 비뚤어지거나 7개나 9개를 심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줄은 계속 비뚤어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했다. 어떻게 그걸 반듯하게 하는 거지? 땅에 붙어서 심다 보면 전체의 모양이 보이지 않는다. 프랑소와 씨는 땅에 붙어서 해도 직선 감각을 유지한다. 나는 안된다. 하지만 내가 한 게 좀 비뚤어져 있어도, 내가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제때 고수를 심는 게 중요하니까. 


12 오늘의 점심. 일을 멈추고 공동주방에서 25분 정도 조리해 식사를 한다.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오는 농부도 있다. 어제 먹고 남은 커리나 파스타를 한 통 싸오는 정도?


오늘은 우리 농장에서 거둔 샐러리, 양파, 당근 등을 잘게 썰어 올리브 기름에 슬슬 볶다가 토마토 농축엑기스를 넣고 끓인 뒤 코코넛크림을 더한 소스를 먹었다. 두가지 모두 유기농 Bio 제품이었다. 서랍 속 파스타, 쌀 등도 모두 유기농 제품이었다. 돈이 많지 않은 농부들이, 아무래도 더 비싼 유기농 식재료, 제품을 사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슬몃 든다. 한국의 편집자, 작가들이 돈이 많지 않지만 항상 책에 돈을 쓰는 것을 떠올린다. 돌고 도는 소비 시스템. 


곡물빵이나 자스민 라이스 밥. 오늘 거둔 고수를 올린다. 샐러드 믹스에 프렌치 드레싱을 뿌려 곁들였다. 한식만 먹을 수 있던 첫주와 달리 프랑스 음식을 먹고도 노동이 가능해졌다. 봄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겨울엔 몸이 시려서 맵고 뜨거운 걸 좀 먹어야 에너지가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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