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4
늑대와 개는 DNA 염기서열이 약 0.04%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계통분류학 상에서 동일 종(Canis lupus.)으로 취급받고, 종의 하위분류인 아종까지 내려가서야 구분이 돼서 개는 Canis lupus familiaris, 한반도에 서식했던 늑대는 Canis lupus chanco가 된다. 덕분에 함께 여행했던 개를 무서워하는 친구는 길거리에서 산책하고 있는 개를 보면 늘 인상을 찌푸리며 문명사회의 길거리에 자꾸 회색늑대가 배회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고는 했다. 물론 나는 개와 늑대가 어마어마하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DNA 염기서열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모든 사람(Homo sapiens sapiens)의 유전적 차이가 0.1% 이내라고 하니 아마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적 차이는 늑대와 개의 그것과 비슷하리라 추측해도 무방하겠다. 말인즉슨, 한국인과 일본인은 개와 늑대만큼의 차이가 날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개와 늑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개랑 늑대가 제일 잘 알지 않을까? 내가 미얀마인과 태국인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가까운 동남아 사람이라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가까운 거리와는 다르게 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이번 여행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본 사회 군상의 차이가 개별 개체의 유전적인 차이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역사가 어쨌고 사회가 어쨌든 간에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격 자체가 개와 늑대의 타고난 성격 차이처럼 중요한 차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정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상 일본이라는 나라는 한국/중국/러시아/베트남 등이 가지고 있는 '기후와 위치와 역사 등에 따른 생활양식의 차이'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기이한, 독자적으로 뻗어나가는 뭔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뭐 가까운 나라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어디 있겠냐마는, 작금의 한일관계는 선진국 한정으로는 그 어느 인접국가들보다 관계가 안 좋다고 볼 수가 있겠다. 한일 각국의 정부가 부딪히는 거야 잃을 것이 많은 주체들의 싸움이므로 목도리도마뱀의 기세 싸움과 별 다를 바가 없어 정부 성향에 따라 총선 및 대선을 위한 내부 결집 등으로 사용될 수 있겠다만, 일본을 배제하려는 한국인의 정서는 친정부 혹은 반정부 성향과는 관계없이 해소되지 않은 일제 침략의 앙금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정서일 것이다.
이 한국인의 반일정서는 6.3 항쟁을 계엄군의 탱크로 막아서고 2000만 명의 36년을 3억 달러(단순 계산으로 1인당 월급 3센트 정도가 나온다.)로 억지로 퉁쳐버린 64년도 한일수교 이후 해소가 되지 않고 있으니 필히 해결책이 필요하겠다. 국민 정서의 앙금 해소는 국민이 직접 해결을 해야 하는데, 어째 위정자들은 이 앙금 해소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군부독재가 끝난 때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을 때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들고일어나 전두환을 끌어내렸을 때라는 것을 위정자들이 조금 신경 써서 그에 상응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 아니 뭐, 기껏해야 백만 원 하는 아이폰과 갤럭시도 유저들끼리 서로 벌레니 뭐니 욕하며 싸우는데 한일 국민들이 서로 좋아할 날이 오긴 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물론 지배적이긴 하다.
도쿄에 가보기로 했다. 일본은 인생 처음으로 두 번 이상 방문한 국가로, 과거에 오사카를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실 일본어도 거의 아는 바 없고 일본 문화도 만화 서너 개를 본 정도에 지나지 않아 일본 문화에 대해 거진 문외한이라고 볼 수가 있고, 오사카를 방문했을 당시는 진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시기라 오사카와 도쿄를 비교할 정도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번이 첫 방문이라 생각하고 글을 쓰겠다.
애석하게도 여행기간 내내 우중충하고 때로는 비가 오는 날씨가 지속됐다. 일본과 한국은 서로 지진과 미세먼지를 막아주는 상호 필터 작용을 하고 있기에 맑고 청명한 푸른 하늘을 기대했건만, 아쉽게 됐다.
일본 국민들은 우리나라 국민들에 비해 정치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하는데, 나와 내 친구는 그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을 철도 시스템에 전가하기로 했다. 서울 같은 경우 어디는 서울메트로가, 어디는 서울 도시철도가, 어디는 또 코레일이 관리하는 식으로 되어있긴 하지만, 이용자는 그런 것쯤 알 필요 없고 탈 때 카드 한 번, 환승할 때 한 번, 내릴 때 한 번 찍으면 알아서 다 처리가 되기에 편하기가 이를 데가 없으나 도쿄는 그렇지가 않다. 카드 띡 찍고 목적지까지 편히 앉아 정치권을 생각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 비해, 도쿄에서는 전철을 탈 때부터 환승하고 내릴 때까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오롯이 집중하고 있어야 길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종로 3가 5호선과 1호선처럼 도무지 같은 역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진 플랫폼마저 하나의 역 이름으로 퉁쳐버리는 심술보를 온갖 역에다가 심어놔서 안 그래도 일본어에 무지한 나 같은 초심자들을 골머리 썩게 만든다.
각종 덕후(이 단어가 신조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체할 만한 적당한 단어가 보이지 않기에 계속 사용해야겠다.)가 판치는 일본이지만 그중에서도 철도 덕후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이 나라에서는 철도 덕후가 되지 않으면 철도를 제대로 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리타에 처음 내려 도쿄 도심으로 들어가는 전철을 타려는 데서부터 고생을 좀 했다. 같은 철로 하나를 다른 목적지와 다른 하차역을 가진 여러 종류의 기차들이 공유했고, 이름도 서로 비슷한 라인들이 지나갔는데, 뭐가 더 빠르고 어디를 경유하는지 이름으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에어포트 쾌특, 쾌특, 특급, 에어포트 급행, 스카이라이너, 스카이액세스 등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탄 전철이 중간에 무슨 등급이 바뀌었다는 안내방송(친구는 일본어를 잘 구사하여 곧잘 해석해주곤 했다.)이 나오더니 갑자기 우리가 내려야 할 역들이 건너뛰는 역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상에 안겨준 충격이 이와 비슷했으리라. 아사쿠사바시 역에 간다고 했으면(나리타 공항의 역무원은 철도 덕후가 아니었나 보다.) 실제로도 가야지, 왜 갑자기 등급이 바뀌더니 안 가는지... 난 사실 아직까지도 내가 겪은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정도로 복잡하게 해 놔야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나 보다.
친구는 전철에서 사용 가능한 교통카드가 있었으나 나는 없었으므로, 매 번 지하철을 탈 때마다 마그네틱 티켓을 뽑아서 가야 했다. 기본요금은 각 노선 전철의 운영 주체에 따라 상이했고 거리에 따라 대충 170~220엔 정도면 근처의 역들을 지나다닐 수 있었다. 가격 자체야 글쎄, 우리나라도 지하철이 현금가 1350원에 자주 타는 경기 시내버스는 1500원까지 올라갔으니, 이전만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의 급격한 물가상승 덕이겠지만. 전철 내부의 품질 자체는 서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도쿄의 거리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었는데, 우리는 그 위화감이 모든 건물의 건폐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에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건물이 벽과 입구가 인도 혹은 차도에 딱 붙어있었고, 건물끼리의 사이 거리도 극도로 가까웠다. 서울의 건폐율 상한이 용도에 따라 50~70 퍼센트가 일반적이고 중심 상업지구에서만 예외적으로 90%를 허용해 주는 것에 반해, 도쿄에서 본 건물들은 주거지역이든 상업지구든 간에 건폐율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해 보였다. 이는 거리에 대해 깔끔하고 딱 들어찬 느낌도 들지만 동시에 답답함도 느끼게 돼서 기묘한 위화감을 안겨주었다.
도로가 매우 깨끗했다. 일본 여행을 가는 한국인들이 으레 도로가 정말 깨끗하다는 말을 했었지만 실제로 도로가 깨끗했을 경우에 어떤 이미지 일지는 잘 상상이 안 갔었는데, 거리가 깨끗하면 정말 좋다. 일반적으로 버려져 있는 담배꽁초, 캔 등도 매우 드물었을뿐더러 우리나라에 으레 있는 길거리 중간의 쓰레기 수거장소도 없고 불법주차 차량도 단 한대도 보지 못했다. 도로는 깨끗한 편이 좋은 것 같다.
도로 및 교통과는 별론으로, 지하철 내부에서 한국의 경제사학자 이영훈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 라는 책이 일본 아마존에서 40만 권 완판에 추가 물량을 찍어내고 있다는 홍보 문구를 발견했다. 이 책의 광고를 일본 지하철에서 보다니! 가끔은 한국, 일본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보다 민족주의냐 아니냐로 갈려서 싸우는 게 더 결집력 및 상대방에 대한 공격능력이 강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내 좌우합작의 결속력보다는 한일양국통합민족주의신당(가칭)이 결속력이 더 높지 않을까? 한국인 민족주의자와 일본인 민족주의자가 힘을 합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행 기간 내 숙소는 아키하바라와 오카치마치 사이에 있는 작은 에어비앤비 숙소였다. 도쿄는 숙소 값이 정말 비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인실 하나에 욕실 및 화장실은 공유하는 작은 숙소로 예약을 했는데, 중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는 정말 숙소를 정하는 능력이 기묘하게 모자라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평균보다 조금 큰 체형이면 입장조차 하기 힘든 좁고 높은 계단으로 시작되는 숙소는 내 방 침대 옆 미등보다도 못한 조도의 조명만을 가지고 있었고, 복도에서는 며칠은 청소하지 않은 화장실에서 나는 강한 암모니아 향이 진동을 했다. 암모니아는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으니 도쿄 여행 시 알찬 계획을 짤 때 도움을 주라는 숙소 측의 배려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둡기만 한 방은 내 친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녀석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줄도 모른 채 필리핀의 섬에 숨어 살던 오노다 소위의 예시를 들면서, 이 숙소의 주인도 마찬가지로 아직도 등화관제를 시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투덜댔다.
도쿄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으로는 도쿄 하면 아키하바라가 제일 먼저 떠올랐으므로, 첫 관광지는 아키하바라로 정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이 선택은 굉장히 후회되는 선택 중 하나가 됐다. 아키하바라처럼 자극적인 공간에 가게 되면 그다음 관광지는 뭐가 됐든 밋밋하고 평범해 보이게 되기 때문에, 혹여나 이 글을 보고 도쿄 여행을 결심한 사람이 있다면 아키하바라는 최후에 방문하길 바란다.
좋게 말하면 무슨 분야가 됐던 정말 그 분야의 가장 깊은 심연까지 가는 장인정신, 일본의 문화는 그것으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일본의 자부심 있는 장점이자 가치 있는 보물, 장인정신은 긍정적인 분야에서 나타날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일본의 수많은 노포(老舗)들과 미쉐린의 평가조차 거절하는 전통 음식점들, 공방에서 수십수백 년 동안의 전통을 고수하며 실력을 발휘하는 장인들, 꿋꿋이 연구하여 수많은 노벨상을 배출하고 있는 동경대의 교수들 등이 그에 해당하겠다. 물론 그렇게 깊이 파내려 가는 것들 중엔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꽤 있겠다. 대표적으로 대일본제국에 극한의 충성을 바친 나머지 죽음마저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카미카제 형님들이 계시겠고, 또 하나, 바로 아키하바라가 되시겠다.
아키하바라에 방문하기 전에 나는 비교적 온화한 문화 상대주의자로, 타 문화에 대하여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비하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키하바라, 특히 성적인 측면에서의 그 거대 역세권은 특별히 유별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나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관대한 문화 상대주의자라도 본인의 신념을 포기하도록 유혹할 정도였다. 그곳에서 나는 '마니아라면 알 수 있다! 진짜의 향기! 착용 완료 로리 팬티 1000엔'이라고 적혀있는 자판기와 '뇌즙이 마구 나와... 녹는 듯한 촉감'이라고 적혀있는 전두엽 모양의 자위기구를 보고 이 놈들은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장인의 나라라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실 방문 전에는 이미 많이 성적으로 개방이 된 우리나라의 성인용품샵과 그다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역시 진짜는 진짜였다.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진 베개들에는 특정 위치에 그 용도를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는 것을 보고선 특정 문화는 어쩌면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도대체가 사진을 올릴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길거리든 어디든 애니메이션, 특히 모에화라고 불리는 모든 대상을 애니메이션 미소녀로 만들어버리는 그 일본의 문화는 유독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것 같다. 저런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거부감은 때때로 감출 수가 없어서, 거미나 원숭이 뇌를 먹는 사람을 볼 때 지어지는 표정이 얼굴에 즉각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거부감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므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지만, 아키하바라 방문 후에는 그 부정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게 됐다. 방문했던 라디오회관에 있던 가장 은밀하지만 가장 사람이 붐볐던 공간에서는 각종 모에화된 모든 것들의 의상을 벗기는 행동들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옷을 벗기기(물리적으로)' 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 모에화를 하냐? 옷을 벗기기 위해서. 커티스 르메이의 옷을 벗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만 명찰에 커티스 르메이라고 적힌 미소녀를 벗기는 것은 용납이 가능한가 보다. 이 역시 사진을 올릴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충격받은 마음과 흔들리는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내 신념을 치료하기 위해 메이지 신궁을 방문했다. 메이지 신궁은 히로히토 덴노가 인간선언을 하기 전의 신격화된 황제 메이지 덴노가 죽고 나서 그를 기리기 위해 건설한 신궁이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부 파손되었으나 전후 복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람하고 굵은 나무들이 온전하게 쭉쭉 뻗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커티스 르메이의 도쿄 대공습은 상대적으로 꼼꼼하지 못하고 미진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일본인들이 그를 모에화하여 옷을 벗기는 데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 이유가 바로 르메이의 자비심 때문임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 공간은 도쿄 도심 내부에서 가장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으로, 대도시 생활권에서 반드시 필요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이런 공간이 참 좋다.
남들은 대체 왜 가냐고 궁금해했지만, 나는 꼭 동경대에 한 번 방문해보고 싶었기에 잠깐 짬을 내서 들러 구경을 했다. 입구를 지나 들어가니 너무 만학도가 많아 일본은 초고령화에도 불구하고 그 학구열이 대단해 수많은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잠깐 생각하였으나, 그쪽은 동경대 의대 병원 쪽이었고 그들은 학생이 아니었음이 이내 밝혀졌다. 동경대는, 뭐랄까, 음... 고요한 학교였다. 일본의 대학은 3학기 제로 우리가 방문하였을 당시도 학기 중이었던 터라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냥 빠져나와야 했다. 아무래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많이 꺾여가는 와중에 옛 마음을 되찾고자 하여, 고등학교 때 중간고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유수의 명문대들을 탐방하며 꿈을 키웠던 그때 그 마음가짐으로 동경대를 가게 된 것 같지만 아쉽게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배움에도 때가 있다는 옛 말이 떠오르는 방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롯폰기, 도쿄역(고쿄), 긴자, 신주쿠, 하라주쿠, 이케부쿠로 등을 방문하였으나, 솔직히 아키하바라를 경험한 직후에 방문했던 곳들이라 마약에 절여진 뇌마냥 다른 일반적인 자극에는 뇌가 반응을 하지 않는 수준이 되어버려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서울과 비교해 다른 게 진짜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롯폰기 힐즈는 신도림 디큐브시티나 여의도 IFC몰 정도였고 긴자는 글쎄, 무역센터와 코엑스가 있는 영동대로 정도가 비슷했다. 하라주쿠는 사람이 바글바글 대는 게 사람 많은 명동에 온 기분이 났으며 신주쿠는 강남의 cgv 뒷골목 같았다. 그냥 다시 아키하바라로 갈까... 하다가, 아니야! 하고는 아! 사람이 마약에 절으면 이렇게 된다. 한 번 방문한 외국인인 나도 이 정돈데 현지인들은 어떤 느낌일까?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은 역시 대대로 식도락 여행지로 유명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미식가적인 면모는 내가 드물게 가지고 있는 미달점 중 하나라서 맛집 추천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음식이 있어 사진을 첨부하겠다.
신주쿠의 자우오(ざうお) 라는 식당에서는 직접 낚시질을 해서 생선을 낚아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다. 미운 우리 새끼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나왔다고 하니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 음식점에서는 사냥 및 수렵채집이 가능한 알파메일과 그렇지 않은 베타메일의 차이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베타메일은 자비로운 알파메일이 없으면 온전히 저녁을 굶을 수밖에 없고 가족들에게도 구박받을 수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가 있다. 나는 다행히 다수의 낚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리의 큰 줄무니전갱이를 낚아 풍요로운 저녁식사에 보탬이 될 수 있었지만 같이 간 친구는 오랜 사냥 실패로 의욕을 잃고 있었기에 나는 알파메일의 또 하나의 덕목인 관대함으로 그에게 식사를 나누어주었다. 그는 나에게 부족한 지구력을 나의 약점으로 잡지 않고 보행 템포를 나에게 맞춰주는 자비로움으로 나에게 화답했다.
쓰키지 시장에 방문했을 때, 사람이 바글바글했던 메인 거리에서 벗어나니 금방 작고 오래된 초밥집이 보여 방문했다. 일반 초밥집 중 일부는 한국인에게 와사비를 많이 넣어주는 등의 혜자스러움을 보여준다던데, 다행히 구글 후기에 따르면 그런 행태는 보여주지 않는 음식점으로 판단되어 방문했으며 결과적으로 수준 높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물론 이 정도 스시야는 한국에도 차고 넘치므로 그다지 특이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비가 와서 급하게 찾아 들어간 긴자의 모 음식점에서는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릿세도 받았으면서 1인당 1 주문을 하기를 강요했으며 주기적으로 새로 음식을 시키길 요구했고, 폐점시간이 되기 2시간 전에 우리를 쫓아냈으며 이중결제를 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도쿄가 8번째 방문이었던 내 친구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극도로 분노했고, 같이 동행했던 지인들과 합세하여 구글 음식점 평점을 0.1점 낮추는 데 성공했다. 친구는 3개 국어를 이용해 그 음식점의 만행을 공표했고, 나는 그 음식점의 후기에 재방문 시 식탁에 대변을 보겠다는 엄포를 놓아 지금까지 좋아요 7개를 받는 데 성공했다.
아, 잘 모르겠다. 구글이 추천한 멋진 맛집들이었지만 그냥저냥 음식점들이었고, 특출 나게 맛이 있는 음식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쿄에 가면 찾아 먹겠지만, 이걸 먹으러 도쿄에 가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의 그런 맛. 칭다오에서 경험한 음식은 굉장했었기 때문에 음식만으로도 그 부담스러운 입국비와 불쾌했던 입국 경험을 다시 감내할 각오도 어느 정도 되어있지만, 도쿄는 잘 모르겠다. 가격대가 너무 높아서 가성비를 찾을 수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도쿄 여행은 아키하바라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여행을 갔다 온 지가 꽤 시일이 지나 자극적이었던 아키하바라가 기억에 많이 남아서 그렇지, 도쿄 여행은 참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은 여행지이다. 일본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서울과 그다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나, 식도락과 관광, 휴식 목적의 여행이 아니라 일본인과 한국인의 문화 차이를 만끽하며 그들의 특이성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