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나의 사랑이 사라지다
내가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 나이가 지긋하신 데도 늘 '사랑'에 대해 너무 아름답고 순수하게 표현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리라. 나 또한 그의 시를 읽으면 늘 '첫사랑'을 떠올리거나 대학시절 나 혼자 풋풋하게 '짝사랑'하던 그를 떠올리곤 했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고 눈을 감으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사랑하는 상대를 그리워하는 풋풋하고 아린 내 마음을 다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온몸의 세포가 다시 하나하나 살아가는 그 젊디 젊은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그 생명감. 사랑으로 설레는 그때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눈가와 입가의 주름이 펴지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생일에 맞추어 내가 쓴 시를 시집으로 엮어 선물할 만큼 시를 사랑하던 나도 아이를 낳고 나서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 좀처럼 시를 읽지 않고 있었는데 정말 우연히 며칠 전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손에 넣게 되었다. 시집을 들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 묘한 설렘. 시집 껍데기만 바라보아도 볼이 발그레해지는 느낌. 다시금 찬찬히 시를 읽는데 너무 좋아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가시지 않아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보다 내가 더 애정 하는 시 [너도 그러냐]를 프린트를 해서 내 방 벽에 붙여놓았다.
그런데 이 시를 몇 년 만에 다시 읽는 내 마음의 변화가 너무 기괴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 한 번 적어보려 한다.
나태주
그때 그 시절,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학원에 조금이라도 먼저 가고 싶었고, 교회에 빨리 가고 싶었고, 대학교에 빨리 가고 싶었고, 빨리 잠자고 일어나서 다시 그를 만나기를 기대했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시계가 춤을 추듯 지나갔고, 그와 헤어지면 혹은 그의 모습이 안 보이면 세상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아줌마가 되고 나서 이 시를 다시금 읽으니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대상=아이들' 이 내 마음속에 커다랗게 자리 잡았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사랑둥이인 너희가
코로나로 유치원에 가지 않게 되자 애틋한 마음이 사라졌다.
사랑하는 애인 사이라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연애전문가 심리학자가 늘 말했는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밥을 먹어도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앉고 거기 있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헤어질 약속이 없으니 애틋하지가 않다. 자고 일어나서 널 다시 볼 생각에 설레던 나의 밤 시간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하원 시간이 되어서 너를 만나러 유치원에 가는 길이 그렇게 행복했는데 코로나 새끼 때문에 그걸 못하니 미치겠다. 예쁜 내 새끼 보고 싶어 버선발로 뛰어가 맞이해야 하는데 너는 하루 종일 나랑 집에 있다. 네가 유치원에 있는 고작 몇 시간 동안 못 보는 것인데 그런 너를 다시 만날 때 몇 년 헤어졌다 만난 것처럼 와락 껴안는 그 기쁨이 사라졌다. 옆을 보아도 네가 있고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온통 사방천지에 너 그리고 내가 치워야만 하는 너의 흔적이 함께 있다.
아침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달래며 꽃보다 예쁜 너를 유치원에 아침마다 주었다. 잠시 맡겼다고 표현을 바꿔야겠다. 이상한 어미라고 잡혀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인하고 감동하는 그 아름다운 순간이 빌어먹을 코로나 때문에 사라졌다. 이쁘디 이쁜 너를 맡길 일이 없어졌으니 사랑하는 너와 사라지는 생이별을 겪지 않는다. 나름 그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에서 사랑의 감정 이 솟아나는 걸 느꼈던 감성적인 나인데. 그 감성이 솟아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