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기린 아니고 기린
Aug 17. 2019
영화, 문라이트(2016)
짙은 파랑의 어딘가를 향해
“너와 닿았다 느꼈어. 그리고 나는 지금도 느껴. 어떤 자부심, 프라이드.”
연극 <프라이드>의 대사다. 몇 번이고 이 작품을 봤지만, 여전히 그 의미에 대해 매번 곱씹으며 생각해보게 되는 대사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닿았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넘어선 프라이드.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무언가가 아닌, 그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나라는 사람 자체의 온전한 정체성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것. 작품 속 필립과 올리버는 서로를 만나 그 정체성에 대해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나와 만나지 못했고 온전함을 찾기 위해 나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다.
영화 <문라이트> 또한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거대한 질문과 그 여정을 다룬다.
샤이론이라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자라고, 어떻게 샤이론이라는 사람과 마주하게 되는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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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는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세 단락으로 나뉜 시처럼 이야기의 운율을 지닌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인생이라는 시 한 편을 읽는 것 같은 느낌. 영화는 과한 설정이나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샤이론의 이야기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천천히 느리게 그를 바라볼 뿐이다. 리틀이 후안을 만나 처음 수영을 배우던 장면처럼, 세 단락은 각각의 모습으로 바다 위에 떠 있다.
리틀은 조금씩 일렁인다. 어린 샤이론은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도망치던 중 우연히 후안을 만난다. 자신을 놀리는 친구들, 후안과 테레사, 그리고 엄마까지.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조금씩 변화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청소년기를 향해 가는 과정, 부모와의 관계성은 작은 아이를 점점 요동치도록 하는 시작점이 되는 셈이다.
이어 샤이론은 요동친다. 리틀에서 샤이론으로 단락이 바뀐 뒤 첫 번째 변화는 후안의 부재다. 후안 없이 테레사와 엄마 사이에 놓인 샤이론은 보다 혼란스러워진다. 정의 내릴 수 없는 불안정함을 그저 묵묵히 받아주는 테레사와 달리, 엄마는 자신의 그런 상태를 받아줄 수 없을 정도로 더 불안정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후안이 그에게 말했듯, 그런 엄마의 존재 또한 자신에게 하나뿐인 가족이자 늘 그리운 사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케빈의 존재다. 어릴 적 후안에게 물었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케빈과의 접촉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이 된다. 샤이론은 자신의 안에서 일어난 더 큰 파도를 타며 요동치고, 더 짙고 푸른 바닷속으로 빠져든다.
마지막 단락은 고요를 향해 간다. 샤이론은 약하고 어리숙했던 자신의 모습을 버린다. 하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위태롭던 시간 속에서 걸려 온 케빈의 전화는 그의 파동이 잠잠해질 것을 암시한다. 곧이어 길게 이어지는 식당 장면은 완전히 낯선 진짜 세계를 향해 가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앵글 안에 담긴다. 결국 어린 시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샤이론은 겉보기엔 완연한 성인이 된 것 같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일렁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긴 시간을 돌아 케빈을 다시 만나고, 그의 곁으로 가면서 샤이론은 어린 시절의 첫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일렁이는 파동도, 요동치던 파도도 잦아든 고요한 밤바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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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라이트>라는 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단락이 결국 샤이론이라는 같은 사람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를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리틀이라 불리던 어린아이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전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 청년도, 케빈에게 블랙이라 불리며 그의 눈에 담긴 한 남자도 모두 그저 샤이론일 뿐이다. 두 번째 단락까지는 자칫 퀴어라는 정체성에 한정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결국 이야기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그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그리게 된다.
감독은 이 과정에서 이야기 내내 샤이론의 표정이나 눈에 담긴 감정들을 안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뒷모습, 혹은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앵글 안에 담아낸다. 이를 통해 각 단락의 이야기는 개인의 정체성이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그려진다. 영화 같은 극적인 사건이 펼쳐지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결국 앵글 밖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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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론이 비로소 자신과 마주했을 때, 케빈의 눈에 비친 자신을 향해했던 말은 특별히 아름답거나 비일상적인 언어의 조합이 아니었다. 그저 진솔하고 작은 고백일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은 어쩌면 보다 더 일상적인 순간으로부터 전환점을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하고 환상적인 사건이나, 꿈처럼 느껴지는 반짝이는 순간을 마주할 때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한낮의 바다보다, 달빛을 받아 조용히 일렁이는 바다가 더 울고 싶은 공기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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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온전히 나라는 사람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운율을 찾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