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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May 16. 2021

'챙.기.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세 글자.

NTP로 태어난 한 인간의 광시곡: SJ 는 열람금지.

 내가 MBTI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한가지는 '위로'(라고 쓰고 자기합리화라고 읽는다)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소싯적부터 특정 인간군상으로부터 또라이취급을 좀 당했었다.

단언컨데 그 '천적'같은 종자는 MBTI로 치면 SJ 부류들이다. SJ 중에서도 기질이 강한편인 ESTJ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나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렇다. 

책가방 속에 교과서보다 간식이 더 많이 들어있다고 혼냈던 고등학교 때 선생. (교과서는 사물함에 있는데 왜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겠는가)

내 책상의 전화기 선이 항상 꼬여있다고 분통터져했던 상사 (그래도 잘 들리는데요)

내가 맡은 준비물을 여행지에서 현지 조달하겠다며 거의 안 챙겨갔을 때 노발대발하던 고교 동창생. (가서 사면 되지가 그렇게나 열 받는 말이니?) 

어찌하여 울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트집 잡으려고 혈안이시냐는 말에 내 눈까리가 뭐가 어쩌구 저째? 하고 방방 뛰시던,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친할머니. ('혈안'이 포인트가 아닌데 왜 논점을 흐리세요? )

연말에 직원들 선물 포장(이것도 당시 업무의 일환이었음)을 거지 발싸개처럼 했다고 어이없어하던 나의 사회초년생 시절 직속 사수. (원래가 막손인걸 우짭니까)

업무 단톡방에서 고객에게 성의없는 대답을 했다고 카톡 캡쳐까지 해서 길길이 날뛰는 직장 상사 (지금은 퇴근 했으니깐 내일 출근해서 확인해보겠습니다가 그렇게 못할 말인가요?) 


 대충 내 기억을 스쳐지나가는 이들의 분노 포인트는 대동소이하다. 

나는 아주 몰상식하고 무성의하며 개념이 없고 게을러 터진 자기중심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전문 강사를 초빙한 MBTI 워크샵에서 ENTP 그룹에 나와 한 '기인'만이 당그마니 앉아있는 책상을 바라보며 조롱하듯 비웃던 수두룩 빽빽한 ESTJ 및 ISTJ 그룹의 직장동료 및 상사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나는 MBTI로 인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내가 속한 성격군은 숫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남과 조금 다른 부분'이 유독 미운오리새끼처럼 보이리라고 정신승리했다. 하여 단점은 적당히 보완하고 강점을 발휘하는 삶을 산다는 마치 국영수를 중심으로 암기과목을 조화롭게 공부하여 서울대를 가자는 식의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결론이 지어지게 되었다.  


 나도 인간인지라, 많은 고민을 하며 그동안 나름의 '사회화'가 되었고 4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은 그래도 어디가서 욕 안먹을 정도로 내 자신을 단련시켰다고 자부한다. (그래봤자 사회화된 INTP 정도로 조금 차분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흑화된 것일까)  

 그런데 정말로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시하면 그만인 남이 아닌 의외로 나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SJ 들이다. 


 최근 ISTJ 남편과 ISFJ 시어머니의 합동 공격에 시달렸다.


 물론 모든 ISFJ들이 나의 시어머니처럼 강박증에 가까운 준비성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계획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긴 하지만 모두가 코로나때문에 일 년 넘도록 식량부족을 걱정하며 두식구 살림에 냉장고 네 대에 식량을 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며느리에게 세상의 진리인양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기숙사로 들어가는 내 아들(당신 손주)의 살림살이를 덤벙대는 내가 잘 못 챙길까봐 밤낮으로 불안해하며 두어달 전부터 전화로 이런저런 조언을 하셨다. 양치컵까지 준비물 리스트에 넣으라는 그녀의 디테일에는 소름이 돋았고 구입예정인 물건들은 무엇이며 언제 살 건지까지 취조하듯 물어보는 그녀의 마이크로 매니징에 폭발해버렸다.   

 왠만하면 시엄니에게 (귀챦아서) 토달지 않는 나는 참다 못해 아들놈이 미국이나 다른 주(province) 로 가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번씩 볼 수 있으니 하다못해 빠진 것이 있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ISTJ 남편이 내게 가진 많은 불만 중 하나는 내가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애할 때도 생일은 물론, 100일 기념, 화이트 데이니 발렌타인 데이, 크리스마스 등등에 나는 대체로 무감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일이 만난 날로부터 1000일을 세는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종가집 며느리 주제에 시댁 조상님의 제사는 물론 양가 어르신 생일 등등을 20년 동안 한결같이 남편이 알려줘야 겨우 챙기는 시늉을 하며 살고 있다. 남편은 내가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렇다는 말을 아주 완곡하게 돌려 말하면서 나를 비난하다가 얼마전부터는 그냥 포기한 듯 해 보인다.


 '챙긴다'

나는 이 말에 대략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여행가방 챙기기가 싫어서 여행을 즐기지 않는 정도이니 상태가 꽤 심각한 편이다. 

 

기념일을 챙긴다

짐을 챙긴다

숙제를 챙긴다

건강을 챙긴다

등등


이 놈의 '챙긴다'라는 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하기 싫고 따분한 숙제가 포함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와 가정은 소위 '잘 챙기는 녀성' 을 원한다. 


가정에서는

가족의 건강을 영양가 가득한 식사로 챙기고

아이들의 숙제와 공부를 챙기고

남편의 옷 매무새를 챙기고

어르신들의 안부를 챙기고

집안 살림을 챙기고


직장에서는

만기일을 챙기고

납기를 챙기고

인사고가를 챙기고

재고 및 비품을 챙기고

나의 대내외 평판을 챙기고 


나는 이 '챙기는' 것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처자를 알고 있다. 

그들은 의무감이 아닌 즐거움이 가득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ISFJ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아내와 엄마로서의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떨어져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밤잠 설칠 때가 많이 있다.

애초에 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책임질 것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았어야 한다며 말이다. 

 겁대가리도 없이 SJ의 세계로 일찌감찌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랬으리라. 그런데 이미 챙길 것 투성이인 삶을 뭣 모르고 선택했으니 이제와서 물를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수많은 '챙길 것' 중 정말로 중요한 것들만 선택하여 집중하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요즘 들어 좀 지나치다 싶었던 시어머님의 전화도 이제는 기피하는 티가 날 정도로 피하고 있고 (카톡전화 읽씹 & 안읽씹 적극 활용)

직장에서는 안 챙기면 욕 먹겠다 싶은 것만 독사같이 챙기고 그 외에는 철저히 무신경해지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는 물론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잠깐 언급했던 그 ISFJ 처자들이 부럽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챙기는' 것이 즐겁고 재밌는 사람들이다.


이런 나에게 마크 트웨인 소설의 주인공인 톰소여가 힌트를 주었다. 

장난꾸러기인 그는 이모네 울타리 전체를 페인트칠하는 벌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의기소침했지만 톰소여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제스쳐를 취하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처럼 페인트칠을 한다. 그러한 톰 소여에게 선동당한 친구들은 뇌물까지 받쳐가면서 서로 하겠다고 아우성을 피우고 결국 울타리의 페인트 칠은 일이 아닌 놀이가 되어 쉽게 완성된다.


밀당과 선동의 달인 톰 소여. 


 그러니깐 나는 지금 다른 누구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선동시켜야한다. 

지금 내가 해야하는 지루하고 힘든 페인트칠을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놀이처럼 하듯이 말이다.

나도 좀 재미있게 챙겨보고 싶다. 


P.S :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가장 소중한 이들 몇 명은 성격적으로는 나와 상극인 ISFJ 인 것이 참 의외이다.

내가 아는 착한 ISFJ들은 ENTP의 엉뚱함과 무례함을 조금 안쓰러워하면서도 감내할 줄도 알고 때로는 귀여워하기도 하는 대인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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