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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Jan 25. 2021

'그냥 하는 것'의 위대함.

열정이라는 사이비 종교. 

  ENTP와 INTP를 오가는 나 같은 NTP형 인간들에게 신천지급으로 위험한 사탕발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열정'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 열정이라는 놈은 여러 가면을 쓰고 있는데 이를 테면 영감, 동기부여, 섬광, 스파크 따위의 단어와도 일맥상통하다.

 

 브런치에 한달 여만에 글을 쓰는 나는 그 동안 그 '섬광'이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떠오른 영감을 주체할 길 없어 앉은 채로 이박삼일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꼬박 글을 썼다는 어느 시인이나 작곡가의 그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앞으로도 그 '영감'의 은총은 끝내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김연아선수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그녀가 연습 전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보고 제작진이 묻는다. 

" (연습할 때) 무슨 생각 하면서 해요?"


그 위대한 선수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으로 제작진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해....그냥 하는 거지


 만약 연느님의 대답이 아래와 같이 멋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 훈련이 지금은 고되고 힘들지만 지금 고생한 만큼의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겨내고 있습니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빙상인으로서 이 정도의 희생은 각오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만약 '보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만약 '사랑'이 식으면 어떡하지?


뼈를 깎는 강도 높은 훈련 중에 그 아름다운 보람과 사랑의 존재가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체육인의 꿈과 열정이 범벅된 아름다운 말보다 " 아무 생각없이 그냥 한다"는 이 무미건조한 대답이 매사에 생각이 많은 나를 더 쭈구리로 만드는 것 같았다. 


수년간 '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것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브런치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것.

식습관을 개선하는 것.

운동을 하는 것. 

계획하고 있는 공부를 하는 것. 


 모두가 '그냥 하면 되는 것'들인데 나는 오만 오천가지의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재고 미루고 있다. 

조만간 천지가 개벽하는 동기부여로 인해 힘 하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그 때가 오기를, 영영 오지 않을 그 때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저서에 인상깊은 대목이 있었다.


한 사진학과에서 두 그룹으로 나누어 과제물을 채점하기로 했는데 한 그룹은 무조건 사진 100장 찍어서 내면 A, 90장은 B, 80장은 C 식으로 '양으로 승부하는 그룹', 다른 한 그룹은 무조건 한 작품만 제출하면 되는데 작품성으로 채점하는 '질로 승부하는 그룹'이었다. 


 마구잡이로 장수만 채워서 내면 되는 '양 그룹'보다 한 작품에 최선의 공을 들인 '질 그룹'에서 우수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뛰어난 작품들은 의외로 100장을 찍어서 낸 것들 중에 있었다고 한다. 

 100장을 찍으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촬영실력이 좋아진 것이었다. 반면에 고심 끝에 한 작품만 제출한 학생들은 그 '장수 채우기'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등재하시는 다른 작가님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면서도 나는 그동안 '괜챦은 글감이 없어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은 우리집 강아지에 대한 글을 써볼까 했었는데 '많은 생각'들이 쓰는 것을 가로 막았다. 

'이딴 걸 누가 읽는다고....'

'사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반려견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이 아닌데, 독자들이 나를 얼마나 또라이로 볼까?' 

등등의 생각들이 나에게 더 '멋진 글감과 주제와 영감'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감히 NTP를 싸잡아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종족(?)이 가진 사고 회로의 어떠한 두드러진 특징 때문이다.


최소 노력 대비 최대 효과를 추구한다는 자기 합리화에 능한 효율충.

내 인생 또는 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꿀 만한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이상주의.

우직함과 꾸준함에 대한 무의식적 비하. 


 물론 게중에 어떤 뛰어난 NTP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하겠지만 NTP의 자랑 에디슨도 똑같은 실험을 몇 천번도 더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를 당황시켰던 '5초의 법칙'이란 책이 있다. 

마음속으로 5 부터 1까지 거꾸로 센 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침에 벌떡 일어나라는 것이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알람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궤변이었다.

나는 어제 늦게까지 영상편집 작업 때문에 몹시 피곤한데...

코로나때문에 출근시간이 30분 늦춰져서 좀 더 자도 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그리고 더군다나 나는 그렇게 아침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집구석이 어지러져 있으면 그냥 치우면 되는데 나는 미니멀리즘 유튜브 영상만 주구장창 본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청소와 정리정돈에 대해 이른바 '꿀팁과 열정'을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엉망진창이 된 냉장고 안을 정리하기 전에 '똑똑한 살림법'류의 책을 사들이는 나를 보고 SJ 시어머니께서는 "살림하는데 꼭 살림법 책이 필요하니?" 하고 어이없어 하시곤 했다. 


 모든 것이 NP와 거의 반대성향인 SJ 들에게서 그동안 나는 '위대한 고지식함'을 보았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한.다.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열정 따위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 먹을 수록 점점 몸은 무거워지는데 나는 언젠가 꼭두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지게 할 '삶에 대한 열정'이 생길 때를 기다리고 있다. 행동의 저변에는 '열정'이 수반되어야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었는데 언제가는 꼭 식게 마련인 그 '열'이라는 교주에게 나는 지금껏 시간이라는 헌금을 갖다 받치는 사이비 신도가 아니었나 싶다. 


P.S:  꾸준한 실행력이 있는 NTP 분들은 그냥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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