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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gevora Jun 24. 2022

인간관계는 강대리처럼

나의 관계 해방 일지.

 웹툰 원작의 오피스 드라마 미생의 강대리를 아는가?

처음엔 가벼운 비중의 조연이었지만 뛰어난 업무 능력,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 페이스가 주는 츤데레적 매력에 원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감을 자랑한 캐릭터였다.


드라마를 보신 분이라면, 직장생활은 강대리처럼 하는게 잘하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공감하겠지만 인간관계는 좀 뜬금없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다. 나는 강대리가 일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도 능하다고 생각한다.


 얼핏 관계에 능하다고 하면 시쳇말로 '핵인싸'를 떠올린다.

처음 본 이와도 금방 친해지고, 어디가나 환영받고, 리액션이 좋아서 누구나 그와의 대화를 즐기며, 입담도 좋아서 어디서든지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선넘는 언행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후배직원으로 인해 '묘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여기서 나를 더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묘하게' 라는 형용사에 있었다.


 어떤 비호감형 인간이 있다고 하자.

"아유...난 저 작자가 너무 싫어"

이러한 말과 감정에는 불쾌함이 있을 망정 갈등이나 스트레스는 없다.

내가 그에 대해 갖는 적개심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 감정에 순수하게 반응한 것이니깐.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자꾸만 열받게 하는데, 그 사람이 병주고 약주는 행위를 반복하니, 이거 내가 미워해도 되는 인간인가 아리까리한데, 거기다가 이 사람이 하필 만인이 좋아하는 '핵인싸'라고 한다면 나만 옹졸한 인간이 되는 것 같은 그런 묘하고 찝찝한 감정이 든다.


그 인싸직원은 나로 하여금 소위 높은 자존감이 꼭 좋은 것인가? 라는 의구심을 들게 한 장본인이다.

자존감이 건강하다 못해 비만이 되어버린 그는 '저는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닙니다' 하는 마인드가 디폴트로 깔려 있다. 그래서 티나고 폼나는 일만 하려고 하고 귀챦기만 하고 영양가 없는 업무는 남들에게, 하다못해 선배나 상사에게까지 떠넘기기 일쑤이다. 남들은 언제 해치웠는지 모르게 하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도 본인은 확성기로 동네방네 떠들면서 본인의 성과를 과시하는 시끄러운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명랑함과 어장관리 능력으로 주변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인싸'랑 친하다고 스스로 만족감을 갖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나도 한 때는 무척 '괜챦은 후배 직원'과 친하게(아마도 나만의 착각이었을게다) 지내는 나 자신이 살짝 자랑스럽기까지 한 때가 있었다.

문제는 이 '괜챦은 후배'가 어느 순간부터 나한테 가벼운 잽을 날리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처맞으면서도 이것이 맞은건가 부딪힌건가 아리까리한 상태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특화된 립서비스와 친화력으로 나의 욱했던 감정을 금방 잊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찌질해서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어느날, 인싸녀로부터 어퍼컷을 제대로 한 방 맞았다.

별 불만없이 다니던 직장에 대해 이직을 고민할 만큼 그 맞은 부위가 얼얼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실수로 부딪힌 게 아니라 맞은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태도로 여전히 내게 상냥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했다.


 고민스러웠다.

갈등의 대상이 다른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기녀라는 사실 이전에, 내가 나이도 훨씬 많고 직급도 높기 때문에 후배에게 아량을 발휘해야지,하는 스스로 정한 당위성 때문에 그녀에 대한 미움이라는 감정을 내 스스로 비웃고 있는 이 어정쩡한 상황이 참 별로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 동료 직원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았다.

편의상 그녀를 강대리라고 부르겠다.

그녀는 정말로 뛰어난 업무능력과 높은 책임감, 적은 말수, 딱 필요한 만큼의 친절 등에서 미생의 강대리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조직에서도 윗선에서도 평판이 좋은 강대리에게 인맥관리에 능한 인싸녀가 들이대지 않았을 리 없다. 둘은 언제부터인지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러던 중, 강대리와 인싸가 한 팀이 되어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반 년도 안된 그 기간 동안 아니나 다를까, 둘은 철천지 웬수가 되었다. 자, 나는 이제 흥미진진한 관전을 위해 팝콘을 튀기면 되는 것이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팝콘각'은 나오지 않았다.


 인싸녀가 강대리에게 겉으로는 여전히 상냥하게 대하면서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맨투맨 강대리 뒷담화에 돌입한 것은 너무나 예상대로였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나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강대리의 반응이었다.

그 무렵 강대리가 인싸녀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든지 아는 사실이었지만 정작 강대리는 인싸녀의 뒷담화를 전혀 하지 않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강대리는 인싸녀가 마치 자신과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인냥 대했다.

우리가 그동안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시전해야 할 바람직한 멘트라고 배워 온 "주말 잘 쉬었어요?" "식사했어요?" "오늘 블라우스 너무 이쁘다" 와 같은 '굳이 안해도 될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회식자리에서도 강대리는 인싸녀가 어딘지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같은 테이블에서도 그녀를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도 무척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마치 '내 세상에 너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

라는 메시지가 강대리의 애티튜드에서 충분히 읽혀졌다.

   

어쩌다가 상사가 인싸녀에 대한 업무적 피드백을 요청하면 강대리는 동료로서 느끼고 겪었던 불편함을 여과없이 사실 위주로 나열했다. 그리고 그것은 모함이 아닌 보고의 형태가 되었다.

이 좁은 커뮤니티에서 말이 돌고 돌아 인싸녀의 귀에 들어갈까봐 몸을 사리는 것 따위는 전혀 없는 자비없는 보고였다.  


 판도는 직원 A와 B가 성격차이로 인해 불화가 있다가 아닌,

A가 B의 불량한 업무태도를 못마땅해한다는

A<->B가 아닌 A>B의 판세가 되었다.

이러한 형국에서는 B가 A에 대해 뒷담화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본인만 불리해진다.


 강대리의 처사가 옳다,옳지 않다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인싸녀를 미워하는 이 감정이 옳은 것인가?

내가 그래도 선배인데, 참아야지.

이런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하며 가면을 쓰고 인싸녀를 대했던 나보다는 겉과 속이 같은 강대리가 훨씬 우아하고 깔끔했다.


 이것은 비단 직장생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반적인 인간관계에 해당될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원만한 관계를 위한 아량과 공감, 친절함 등은 인격이 어느정도 성숙한 사람과의 관계 형성에는 도움이 되나, 어떤 이들에게는 만만함의 지표가 된다.즉, 내가 어떤 이에게 '괜챦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은 욕구 자체가 인간 하이에나에게는 좋은 '먹이'가 된다.


 인싸녀는 내가 그녀에게 나름 쿨하고 멋있는 선배로 보여지고픈 인정 욕구를 읽었고 이를 맘껏 이용했다.

 하지만 강대리는 인싸녀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 지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았고,

인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욕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인싸녀가 구축하고자 하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라는 세계관에서 벗어났다.




 유치한 예로, 여자를 한낱 노리개로 아는 매력적이지만 나쁜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쉬운 타겟이 될 수 있을까?

한껏 멋을 부리고 페로몬 향수까지 뿌린 채 상냥함과 미소와 애교로 자신을 대하는 여자.

vs

무릎팍 튀어나온 츄리닝 바지에 떡진 머리를 하고 묻는 말에 간신히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여자.


 이 사람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쥐똥 만큼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사람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나는 이제 인싸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끄기로 했다.

그래서 커피 마시러 가자고 꼬드길 때에도 괜챦다고 사양하고, 점심시간 중에 어색한 침묵이 싫어 억지로 할말을 쥐어짜는 대신 차라리 콩나물 대가리를 귓구녕에 때려박고 유튜브를 본다. 화장실 가는 길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예의상 반가운 척하는 미소는 더이상 짓지 않는다.

무례한 짓은 1도 하지 않았어도, 내가 그녀와의 관계를 더이상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은 눈치빠른 그녀도 느꼈을 것이고, 실수인냥 내게 잽을 날리는 짓은 이제 사정거리 바깥에서는 불가능하다.


  드라마에서 까칠했던 강대리가 알고 보면 장백기에게 좋은 선배였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강대리의 츤데레적 매력은 장백기가 꽤나 될성 부른 자이기에 알아본 것일 뿐, 어떤 이들에게 강대리는 여전히 까칠하고 재수없고 밥맛없고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지도 모른다.

포인트는 강대리는 신입사원에게 좋은 선배로 보여지고자 하는 마음이 1도 없이 대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만의 인간 관계 메타버스에서 자동 로그 아웃이 된 그녀가 밉지 않다.

그녀는 내게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 인물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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