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못난 어미를 용서해다오....
아들래미가 4학년쯤 되었을 때, 나는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살집이 좋은 중년의 러시아계 여선생님은 꽤나 격앙된 톤으로 아이에 대한 컴플레인을 해댔다.
참고로 우리는 아이가 3학년 때 캐나다 이민을 왔다.
캐나다에서 학교 생활을 한지 1년도 채 안되었을 때이니,영어가 안되어 아직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한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가 당시 나의 태평한 항변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단지 내 아이의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한마디로 정상적인 아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눈치'라는게 없다는 것이라면서 조심스럽게 전문가에게 보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한다.
가슴을 졸여가며 가정의를 만났을 때 나는 무식하게도 아들에게 '자폐증'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주제를 한정시켜버리는 우를 범했다. 가정의는 아이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더니 이 아이는 지극히 정상이라면서 되려 어미인 나를 책망했다. 당시에는 그 중동계 의사샘의 질책이 눈물날 정도로 고마웠는데, 지금에 와서는 왜 그때 조용한 ADHD 일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지 못했었는지가 무척 아쉽다.
조용한 ADHD... 즉 주의력 결핍만 있고 과잉행동(Hyperactivity)은 없는, 이른바 ADD는 얼핏 보기에는 얌전해서 문제성을 알아채기가 더더욱 힘들다고 한다. 그로부터 십년이 지나 여기저기서 ADHD 뿐만 아니라 ADD 또한 훨씬 대중화?된 지금, 만약 같은 이유로 그 선생님을 만난다면 여전히 아무 문제 없다고 하실지가 궁금하다.
ADHD 또는 ADD는 앞으로 수십번은 부를 명칭이니 이하 A라고 칭하겠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은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유튜브 등을 이용해 독학을 한다고 한다.
교수님이 입만 열었다하면 나도 모르게 진행되는 유체 이탈.
백서른일곱가지 정도 되는 A의 증상을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A는 57가지, 어떤 A는 21가지 등등 모두가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일테지만 단언컨데 모든 A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 중 하나는 '청각 주의력 결핍'일 것이다.
청력에는 이상이 없는데, 상대방이 하는 말이 머리 속에 안들어오는 증상이다.
난독증 환자들이 책을 읽기 힘들어하듯이 타인의 말을 듣기가 힘든,일종의 청각적 난독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왜 아들의 고충을 알겠냐면 말은 빨리 시작한 내가 바로 국민학교 3학년쯤 되서야 귀가 조금씩 트였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사람이 분명히 나한테 한국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그냥 왱알왱알 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현상.
이를 테면 갑돌이가 지금 나한테 뭐라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내 옆에서 갑순이가 동시에 말을 거는 바람에 갑돌이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제는 듣기활동을 방해하는 그 갑순이는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40대 중반이 되도록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들이 그냥 소리가 되어 내 한쪽 귓구녕으로 들어왔다가 한쪽 귓구녕으로 스쳐 지나가버렸을까....
그래서일까? 영어 또한 다른 영역에 비해 리스닝이 제일 처지는 편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을 그렇게 '못'듣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는데에 있다.
나는 유치원생일 때 부터 어른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기 좋아했던 응큼한 아이였다.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이나, 좋아하는 과목의 수업은 열심히 들었지만 대부분의 수업시간에는 그저 빨강머리 앤 처럼 온갖 공상에 시달렸다.
고3때는 수능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학교를 안가기도 했을 정도로 나는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공부가 빡세기로 유명한 대학교에서 사악한 공부량을 자랑하는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있다.
스스로도 강의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 뿐만 아니라,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겨우 들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ADHD는 유전성이 크다고.
그리고 엄마도 정식으로 A라고 진단 받은 적은 없지만서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는게 쉽지 않다고 말이다.
아이는 엄마인 나도 자신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리고 나또한 이 달갑지 않은 유산이 나의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음을 알고 있다.
아들이 어릴적에 스케치북에 외할머니랍시고 여자 하나를 그리면서 하던 말이 참으로 오싹했다.
여하튼 아들은 지금이라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다행인건지 성적 욕심이 많은지라, 한때 강남엄마들 사이에 정신과 가서 공부잘하는 약 처방받는 것이 붐이었다던데, 뭐 그런 맥락으로 아이도 '약'을 처방받고 싶어했다.
일단은 가정의를 만나서 문진과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다.
가정의는 A의 진단을 내릴 수는 없고 스페셜 닥터를 만나서 정식으로 검사를 받아야하는데 6개월 정도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 비관적인 분들은 복장이 터질 것이다.
허나 나는 A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도 아니고, 스무살이 되어가도록 이렇게 살아왔는데 그까짓 6개월이 무슨 대수냐 싶다. 더군다나 가정의도 진료 후 A가 의심되었는지 약을 처방해주었으니 약 먹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일이다.
Adderall 이라고 하는 이 약은 일종의 각성제라 했다. 효과는 약 12시간 정도 지속되며, 다행히 부작용이나 내성은 별로 없다고 한다.
처음으로 약을 복용한 아들의 소감은 "비로소 내 뇌의 주인이 된 것 같다" 였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전에는 머릿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어서 자신한테 계속 말을 거는 기분이었는데 약을 먹으니 그 빌어먹을 '누군가'의 존재감이 조금 약해졌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전에는 30~40%정도 들리던 강의가 70~80% 정도 들리는 것 같고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지금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조건 미루기부터 했던 전보다 더 강하게 든다고 했다.
참으로 바람직하다.
ADHD가 진짜 질환이냐, 아니면 그저 공포 마케팅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A의 특징인 덤벙댄다, 게으르다, 산만하다 등은 그냥 '성격'으로도 치부될 수 있기에 그게 정말 병증인가? 현대사회에서 '정상'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성격'의 원인이 그저 타고난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시원찮은 전두엽 또는 호르몬 부족이라는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약이라는 인위적인 도움을 받아서라도 개선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노릇인가.
그런 의미에서 아들은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일찍 발견에서 도움을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다가도 하자있는 전두엽을 가지고 마흔을 훌쩍 넘는 인생을 살아온 나를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의 ADHD약을 몰래 뺏어먹은 나의 경험담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번에 다루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