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옛날 옛날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자식이 생기지 않아 애가 타던 부부에게 아들이 생겼다. 너무나 소중한 자식이었던 터라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던 부부는 작명소에서 무병장수하게 해준다는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라는 긴 이름을 받았다.
그 아들은 부모의 염원대로 무럭무럭 자라는데 어느날 친구랑 물놀이를 갔다가 하필 깊은 물에 빠진 것이다. 그것을 본 친구는 황급히 달려가 그 부모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다.
" 아줌마...아줌마..(헉헉) 글쎄 엉기조차 (헉헉) 벙기조...(헉헉)"
" 아니 이눔아.. 언능 말혀!! 우리 금쪽같은 아들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가 뭐 어쨌다고?"
" 그러니깐요...엉기조차 벙기조차(하악하악) 엉기벙기버벙기가 저랑 냇가에 멱을 감으러 갔다가 물에 빠졌다구요"
" 뭐여!!! 우리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가 물에 빠졌다고!!!!"
"여보!!!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가 글쎄 물에 빠졌대요!!"
"임자모해!! 서두르지않고!! 얼른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 구하러 가야지!!!"
결국 귀한 아들에게 오래살라고 지어준 긴 이름이 오히려 시간을 끄는 바람에 골든타임을 놓쳐 요절하고 말았다는 이 슬픈 전래동화가 주는 교훈은 지나치면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것이다.
차라리 개똥이나 말똥이처럼 천한 이름을 지어주었다면 적어도 물에 빠져 죽진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노자는 '무위자연'을 주장했고 조상님들은 '과유불급' 이라했으며 현대인들은 '오바하지마'라고 이야기하며 요즘 것들은 "아..에바야" 라고 한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한 남자 신입사원 생각이 난다.
그는 사무실 직원들에게 너무나도 잘 보이고 싶은 나머지,틈만 나면 믹스커피를 타서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했다. 처음에는 이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는데, 청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한강물같은 밍밍한 믹스 커피를 두번 세번... 강제로(?) 마시다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성격이 지랄같아서 그런갑다 하는데 다른 누군가의 앙칼진 일침이 들린다. "김철수씨... 커피 탈 시간에 밀린 파일 정리나 하시죠?"
사람 마음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결국 김철수씨의 인싸가 되고픈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년 전 나는 직장에서 부서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몹쓸 인정욕구라는 것이 폭발하게 되었다.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있던 나는 능력있는 직원으로 어필하고자 꽤나 노력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절로 이불킥이 나오는 것들 뿐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례로 상사로부터 고객과 금융상담을 하는 트레이닝을 받던 중 실제로 상담 고객이 방문을 했다. 상사는 마침 좋은 기회라면서 옆에서 자기가 하는 것을 잘 보라고 나를 동석시켰다.
나는 그때를 마치 일생일대의 기회라도 되는 양 받아들였던 것 같다. 사실 손님 상담은 앞으로 허구헌날 하게 될 경험이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방청객 알바도 울고 갈 열렬한 추임새를 넣고 상담내용 중 내가 알 것 같은 대목에서는 끼어들기까지 하면서 상사에게 "이 정도면... 나 제법이죠?" 이라는 식으로 뻐꾸기를 날렸다. 손님이 간 후 상사는 열이 받아 벌개진 얼굴로 나를 야단쳤는데, 조근조근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나대지마라'였다. 정말 굴욕적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중국인 친구 가족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한식의 위대함을 알리고 더 나아가 그녀의 한국인 친구가 얼마나 대단한 호스트인지 보여주기위해 소,돼지,닭고기를 모두 준비했다.
발코니의 그릴에서 불맛나게 구워서 서빙한다는 계획으로 돼지목살은 단짠 양념을 하고 닭허벅지살은 매콤하게 닭갈비 양념을 하고 소고기는 심플하게 소금 후추만 뿌려놓았다.
결국 너무 다양한 종류의 고기와 과한 양념의 결과물은 검게 그을리고 식어버려 젓가락도 안가지는 고기접시가 놓인 그런 민망한 테이블이었다. 차라리 신문지 깔고 부르스타에다 삼겹살이나 구워먹느니만 못하게 된 것이다.
불혹이 훌쩍 넘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힘을 주면' 오히려 뜻대로 안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이것은 여타 성공학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그들은 '집착을 버리라'는 말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한다.
배고픈 사자의 눈에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고라니가 들어온다. 사자는 반드시 저 고라니를 잡아 먹겠다고 조심조심 먹잇감이 도망칠세라 다가간다. 야속하게도 고라니는 금새 눈치채고는 후닥닥 도망가버린다. 맹수는 분기탱천한 자신의 콧구멍이 쒸익쒸익하면서 내뿜는 콧바람이 얼마나 시끄럽고 뜨거운지 몰랐던 것이다.
너무 힘을 주면, 그러니깐 너무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못하게 된다.
너무나 잘하고 싶은 마음은 긴장과 초조함을 불러일으켜 두뇌가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여 그릇된 판단과 선택을 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무리수를 둔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믹스커피 자원봉사를 자처했던 청년은 그저 인사나 밝게 하고 시키는 일이나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낙타등처럼 상체를 잔뜩 굽히고 커피잔이 담긴 쟁반을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나 좀 예뻐해주세요' 라는 바램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참 불편했다.
손님과 상사에게 '이때다. 뭔가 보여줘야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나의 욕망이 나를 인정은 커녕 얼마나 꼴사나운 사람으로 만들었던가. 적극성과 노골적임을 구분하지 못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중국인 친구 가족에게 제일 인기좋은 한국 가정식단이라면서 차라리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를 대접했다면 최소한 발암돋는 비비큐의 민망함은 피할 수 있었으리라. 그때의 나는 손님에 대한 배려와 나에 대한 과시를 혼동했었던 듯 하다.
우리의 바램이나 목표라는 것은 어쩌면 저 멀리 있는 고라니와도 같다.
고라니에 집착하면 할수록, 고라니 잡아먹기에 열과 성을 다할 수록 고라니는 더 쉽게 도망간다.
사자가 내뿜는 집착어린 눈빛과 입김과 콧김이 '나 너 잡아먹으러 가는 중'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 고라니는 그 근처에서 무심하게 파리나 쫓으며 어슬렁 거리던 다른 사자의 먹잇감이 되고야 만다.
'힘을 조금 뺀다'는 것은 단순히 괄약근에 힘을 줬다 플었다 하는 것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힘을 너무 빼면 부풀지 않고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해서 불면 빵하고 터져버리는 풍선같이 발란스 맞추기가 미묘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철없던 20~30대에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나는
"아...그러니깐 모든지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거네"라고 곡해했을 것이다.
힘을 뺀다는 것의 추상성을 내 식대로 조금 구체화하자면 '결과가 안 좋아도 괜챦다고 생각하기'이고,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하지 않기'이며 '부담 갖지 않고 그저 과정을 즐기기'이다.
그것은 아사다 마오보다 김연아가 더 능했던 것이고,
엉기조차 벙기조차 엉기벙기버벙기의 부모보다 김개똥이의 부모가 더 나았으며,
(매우 주관적인 견해지만) 월드스타 싸이보다 신인가수 싸이가 더 잘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싸이의 '새','챔피언' 등의 초반 노래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계적인 메가 히트곡 '강남 스타일' 이후 나온 어딘지 어색한 힘이 잔뜩 들어간 양산형 후크송 같은 그의 신곡에서 서포모어 징크스에 빠진 그의 부담감이 느껴져 안타까울 따름이다.
힘이 너무 들어갔다 싶으면 살짝 빼 보시라.
소개팅에 너무 멋을 부리고 나간 것 같다면 악세사리 하나는 빼보자.
직장 동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반으로 줄여보자.
손님 초대상에 차릴 메뉴 중 한 개 정도는 과감하게 줄여보자. 아마 티도 안날 것이다.
이번 시험은 반드시 잘 봐야된다는 생각은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과가 안 좋아도 괜챦고 상대방의 기대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며 과정을 최대한 즐기고자 한다면 뭐든 시작하기가 훨씬 쉬워지고, 뜻밖의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현재 나는 직장에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지중 '과정을 즐기는 것'만 빼고 두 가지를 실천하고 있는데 이전에 의욕이 넘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때보다 훨씬 결과와 평판이 좋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편하고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