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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10. 2024

샤이닝-욘 포세

기 참을 수 없는 지루함 때문에 무작정 차를 몰고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여정에는 뚜렷한 계획도 목적도 없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내키는 대로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했다. 그 결과 그는 이제 막다른 길 끝자락에 섰다. 흙에 차바퀴가 끼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지루함은 공허로, 공허는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는 숲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내렸다. 차 안에서 조용히 아침을 기다리거나,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대신 깊은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길이 사람들이 있는 장소, 곧 문명으로 데려다 주리라는 헛된 믿음을 안고.


 


소설 ‘샤이닝’ 표지와 저자 ‘욘 포세’


소설 ‘샤이닝’은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욘 포세의 최신작이다. 욘 포세는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에 관해 나직하고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은 명상이자 묵상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낯설고 막막한 무엇이다. 우리는 늘어난 노년기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누리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최후의 순간 생을 정리할 시간을 가진 뒤,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승을 떠나리라 믿는다. 그러나 죽음은 사방에 존재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순간에도 질병, 전쟁,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사람들은 죽어간다. 그들에게 생의 의미를 곱씹을 여유란 없다.


‘나’에게도 죽음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였다.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죽음이란 다른 차원에 속한 일로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행선지와 같다. 여러 선택과 우연의 결합으로 ‘나’는 사지에 내몰린다. ‘나’의 턱밑까지 죽음이 찰랑거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숲길로 차를 몰고 들어왔나. 아마도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연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한데, 우연이란 무엇일까. 아니, 이 상황에서 이처럼 멍청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본문 11쪽

 

이처럼 한 인간의 행운 혹은 불행을 결정하는 선택은 우연한 경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그저 나쁜 패를 들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두운 숲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차를 벗어나 숲 속 오솔길을 택한 일을 ‘일시적 충동’이라 여기며 자책한다. ‘나’는 여태껏 합리적 결정만 하며 살아온 이성적 존재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죄 많은 나의 한평생에 걸쳐 단 한 번도, 이 같은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과연 그럴까. 지금껏 운 좋게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겪지 않았을 뿐, ‘나’의 인생은 늘 우연과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추위와 졸음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 헤맨다. 사람이란 ‘내’가 속한 관계망에 속해있으며, 서로를 위기에서 구해줄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나 사람을 찾아 헤맬수록 ‘나’는 고립되어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고립에 이르러서야 ‘나’는 생의 비밀에 눈뜬다. ‘나’는 여태껏 죽음뿐 아니라 삶에 관해서도 성찰해 본 일이 없다. 그는 숲길을 ‘운전’하면서도 도로 주변에 있는 집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이는 ‘나’였지만, 삶은 정작 마음 먹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나’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는다. ‘평소 나는 이렇게 무의미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생각은 평소 바르고 명확하다. 나는 철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삶은 원래 불가해하고 무엇 하나 확실치 않다. 드디어 ‘나’는 사람과 사물이 숨긴 매혹적인 속삭임에 귀 기울인다. 그들이 속삭이는 비밀을 듣는 방법은 ‘아무것도 아닌 소리’를 경청하기다. 침묵이란 무(無)가 아니다. 침묵은 사소한 존재의 표현 양식이자 존재 양식이기도 하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언어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세상에는 존재들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와 침묵으로 가득하다. 관습적이고 일상적인 말로는 결코 그들이 지닌 신비에 도달할 수 없다. 지금껏 ‘공허한 말’에 불과하던 침묵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수많은 움직임, 헝클어진 움직임, 거칠고 불규칙하지 않은 움직임’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무의미하다. 그러나 의미 없는 움직임의 연결이야말로 삶과 세계를 관통하는 법칙이 아니던가. 침묵이란 고적함 속에서 은둔하는 수도사에게만 필요한 무엇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마나한 말을 주고받는 동안, 세상을 가득 채운 언어는 침묵이다. 침묵을 통해 비로소 세상은 작은 존재가 지닌 내밀한 비밀을 드러낸다.


침묵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기존의 언어는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저자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문학의 형태)이 항상 상상의 세계 속 일부로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닌 뭔가의 일부로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침묵과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은 경청과 직관이다. 갑자기 ‘나’의 눈앞에 순백색의 알 수 없는 형체가 나타난다. 나는 황홀경 속에서 순백색 형체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빛나던 그 형체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형체는 더는 빛나지 않지만 ’나‘의 질문에 답한다. 형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우리가 떠난 미래에도 그 자리에 계속 머물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 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여기 있고 여기에는 항상 내가 있습니다.’-본문 38쪽


하얀 형체는 신, 혹은 절대자일까? '나‘는 그 형체가 순수 악도 선도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나 ‘온화함과 깊은 충만함’이 깃든 목소리는 사랑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에 있는 이성이 그 목소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세상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이 사랑이라는 단어’라며 자신이 한 말을 허튼소리로 치부한다. 사랑 역시 침묵처럼 만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두운 숲 속에서 한 쌍의 노부부와 마주친다. 놀랍게도 그들은 ‘나’의 부모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숲을 나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나’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 다만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을 인도하며 서로를 의지해 살아왔다. 그들 가족은 예전처럼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숲길에 서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에게 무관심하며 어머니는 이미 했던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들 가족의 언어로는 소통과 친교가 불가능하다. 부모가 말을 멈췄을 때, ‘나’는 ‘고요함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드디어 ‘나’는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어느샌가 사라진 부모, 하얗게 빛나던 존재, 갑자기 검은색 양복을 입고 나타난 남자……. 비현실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마침내 ‘나’는 결코 이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존의 언어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지금 상황을 이성적으로 말하려는 것이 이 상황에서는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것 같다.’-본문 70쪽


마침내 ‘나’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민 손을 잡는다. 반짝이는 하얀빛이 ‘나’를 감싼다. 이제 반짝임과 순백색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조차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의미와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무의 세계에 들어선다. 마지막 순간 그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따르는 많은 존재를 본다. 각각의 순백색 속에서 반짝이는 그들은 나약하고 사소한 동시에 위대한 존재다. 그들은 각자 단 하나뿐인 의미 그 자체이다. 그렇게 ‘나’는 그들처럼 세상에 편재하는 신성(神性)의 한 조각이 된.


이 소설은 숲 속에서 조난당해 죽어가는 남자가 겪는 환영에 관한 이야기다. 혹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한 인간이 쓴 성장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자리에 다른 인물을 넣을 수도 있다. 코마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가 겪는 섬망일 수도, 언어와 논리의 세계에 지친 구도자의 비망록일 수도 있다. 저자 욘 포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침묵의 발화에 말글을 내주고 싶습니다. 좋은 문학작품을 쓰려면 이 침묵의 발화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설 ‘샤이닝’을 통해 저자는 침묵과 틈새 사이에 있는 말할 수 없는 존재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독자는 주인공의 경험을 통해 죽음의 문턱에서 겪는 경이를 대리 체험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빛을 알아볼 수 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숲을 산책하기. 그것이 바로 삶이다.


저자 욘 포세는 1959년 노르웨이의 해안도시 헤우게 순에서 태어났다. 베르겐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을 발표했다. 1994년 첫 희곡 ‘그리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를 발표했다. 욘 포세가 희곡을 쓴 이유는 노르웨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욘 포세가 쓴 희곡은 전 세계에 번역되어 인기를 얻었다. 소설 ‘보트하우스’,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Ι-Ⅱ’, ‘3부작’, ‘7부작’ 등을 발표했다. 희곡 ‘누군가 올 거야’, ‘어느 여름날’, ‘죽음의 변주곡’, ‘나는 바람이다’ 등을 썼다. 2023년 노르웨이 작가로는 네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해 나온 소설 ‘샤이닝’은 '뉴요커'지와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202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손화수 옮김, 문학동네, 2024, 원제: Kvile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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