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 위로 공이 날아다닐 때마다 관객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흐릅니다. 여느 테니스 경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이 같은 남성 혹은 여성끼리가 아닌, 남녀의 대결이라는 것 외에는.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2017)’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Battle of sexes'라는 영화의 원제가 말해주듯, 영화는 1973년 세계 최초로 벌어졌던 남성과 여성의 테니스 대결을 소재로 합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이 경기는 달 착륙 보도 이후 미국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젠더(gender)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남녀의 정체성, 즉 사회적,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성(性)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주어진 성별에 따라 사회문화적으로 다른 역할이 요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역할과 성정체성 역시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산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섹스는 젠더와 달리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을 말합니다.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젠더 이분법에서 생물학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큰 범주 사이에 수많은 간극을 지닌 다양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통용되는 남녀 구분법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현실태(現實態)로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체격이 작고 근력이 약합니다. 피지컬의 차이는 각각의 선수에게서 기회의 평등을 박탈합니다. 각종 스포츠에서 성별을 구별해 경기를 운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같은 성(性)끼리 대결하는 스포츠에서 때로 체급에 따라 달리 경기를 진행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적용됩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다름’일 뿐 차별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다름’은 차별로 이어지곤 합니다. 70년대 테니스 대회 ‘퍼스픽 사우스 웨스트’에서 남녀 우승자의 상금은 무려 여덟 배나 차이가 났습니다. 여자 테니스 랭킹 1위 빌리 진 킹(엠마 스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회의 주최자인 회장 잭 크레이머(빌 풀먼)는 남자 선수가 더 빠르고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건 생물학적 차이잖아요. 저는 티켓 값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빌리가 대답합니다. 남녀의 신체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항변입니다. 빌이 빌리에게 늘어놓는 변명은 옹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남자 선수가 더 많은 관중을 끌어들이는 데다가, 남자는 여자와 달리 가정을 부양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리가 가정을 부양하는 사실은 무시해도 좋을 ‘특수한’ 사례가 됩니다. 빌리의 경기에 남자 테니스 경기 못지않게 많은 관중이 들었다는 사실 역시 고려되지 않습니다. 엠마 스톤과 여성 테니스 선수들은 직접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합니다. 터무니없이 적은 상금에 대한 보이콧으로 전미 테니스협회를 탈퇴합니다. 세계 여자 테니스협회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협찬사를 모으고 대회를 개최합니다.
실존 인물인 빌리 진 킹(1943- )은 미국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입니다. 총 39개의 그랜드 슬램 우승을 거두었으며 테니스 대회의 남녀 상금 규모가 동등해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테니스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여성 선수에 대한 처우가 가장 좋은 종목으로 평가됩니다. 세레나 윌리엄스, 마리아 샤라포바 같은 테니스 스타는 빌리 진 킹의 노력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녀는 성소수자의 인권 신장에 애쓰는 레즈비언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사상 초유의 성(性) 대결과 더불어 빌리 진 킹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에 눈뜨며 겪는 갈등을 다룹니다. 대회 일정 중 미용실을 찾은 빌리는 미용사 마릴린에게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빌리가 이미 남편 래리 킹과 결혼한 유부녀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여러 정황상 그동안 그녀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깨닫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마릴린에 대한 빌리의 감정은 커져만 가고, 두 사람은 투어에 동행합니다.
왕년의 테니스 스타 보비 리그스(스티븐 카렐)는 장인의 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도박과 내기 테니스를 즐기는 타고난 갬블러인 그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기란 힘듭니다. 그는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방식을 고안해 냅니다. 여성 테니스 스타인 빌리 진 킹에게 테니스 대결을 제안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리는 그가 벌이는 쇼에 동참할 생각이 없습니다. 빌리의 제안은 정당한 시합이라기보다는 서커스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녀의 피지컬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경기는 빌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합니다.
그러자 보비는 빌리의 경쟁자인 마거릿 코트와 경기를 치릅니다. 결과는 마거릿의 참패였습니다. 보비는 테니스장에서 ‘여성이 할 일은 공을 줍는 일이라는 말’로 여성들을 분노하게 합니다. 1970년대 미국은 눈부시게 여권이 신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에 대한 남성계의 역풍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제 빌리는 이 게임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깨닫습니다. 빌리의 우승은 여성이 본래 지녔다고 생각되는 ‘육체적 불리함’과 ‘심리적 취약성’마저 극복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빌리는 당당하게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한편 보비는 진정한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저 당대의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쇼맨십을 갖춘 사람입니다. 보비는 여러 면에서 복잡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보다 돈이 많은 부인에게 잡혀 사는 남성입니다. 도파민에 취약한 보비의 두뇌는 그를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물간 스타라는 열등감,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 때문에 그는 불안과 고립감을 느낍니다.
1973년 9월 20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빌리와 보비가 맞붙습니다. 두 선수는 각각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성기를 구가하는 29세의 빌리는 남성보다 근력이 약한 여성입니다. 보비 역시 55세의 적지 않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됩니다. 제작진은 1970년대의 경기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클로즈업과 빠른 장면 전환은 없습니다. 원거리에서 잡은 동작이 비교적 정적으로 펼쳐집니다.
‘빌리 진 킹:세기의 대결’은 남녀의 갈등을 다루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선수들의 남편은 아내를 응원하고 도와줍니다. 빌리의 남편 래리 킹은 그녀의 외도를 눈치채지만, 넓은 아량으로 아내를 이해합니다. 실제로 빌리 진 킹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모르고 결혼한 것에 대해 남편에게 미안해했다고 전합니다. 래리 킹은 빌리가 세계 여성 테니스 협회를 창설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혼한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보비의 아내 프리실라는 보비가 남성우월주의자임을 내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비가 보여준 쇼비니즘은 쇼맨십의 일환일 뿐입니다. 그는 여성해방 사상의 흐름과 그에 대한 남성의 반동을 이용할 줄 알았던 영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보비의 도박 중독 때문에 보비의 부부 생활은 위태롭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갈라서기로 합의하지만, 후에 재결합합니다. 경기장에 들어서 남편을 응원하는 프리실라의 표정은 복잡합니다. 남편이 내세우는 기치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함께 살아온 부부의 정으로 그를 응원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남녀가 겪는 갈등뿐 아니라 소소한 정과 깊은 애정, 의리를 그립니다. 남녀는 서로 대결하는 상대라기보다는 동등하게 서야 할 사회의 주체이니까요. 관중석에는 이처럼 보비를 응원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빌리를 응원하는 남성도 있습니다. 타고난 성이 그들의 정치적 지향점마저 결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비와 빌리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보비가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님을 방증합니다. 보비는 빌리를 테니스 선수로서 깊이 존경했습니다. 두 사람은 보비(1918-1995)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빌리는 한 ‘남성’을 꺾기 위해 테니스 경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싸운 대상은 여성을 남성 아래로 두는 사회제도와 테니스계의 아집이었습니다. 테니스협회 회장 잭 크레이머가 여성에 대한 제도의 폭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빌리 진 킹은 보수적 테니스계에서 세계 여성 테니스협회를 창시하고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한 악녀입니다. 남성 선수를 이긴 테니스 여제 역시 사랑 앞에서는 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빌리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과 갈등은 영화의 한 축입니다. 보수적 테니스계에서 유부녀인 빌리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았습니다. 실제로 빌리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달은 후에도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실존 인물인 마릴린 바넷은 오랫동안 그녀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랑의 끝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1981년 마릴린이 빌리에게 그동안의 동거 수당을 달라는 소송을 벌입니다. 이 사건으로 빌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힐 기회를 잃고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해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당한 셈입니다.
살아있는 전설을 연기한 엠마 스톤은 빌리 진 킹의 목소리, 말투, 걸음걸이를 오랫동안 분석했습니다. 킹이 지닌 철학과 신념, 그가 겪었던 개인사 역시 연구해서 체화했습니다. 그 결과 빌리 진 킹으로부터 ‘엠마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 것’이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7kg을 증량하고 체력 단련과 테니스 수업을 통해 테니스 여제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비 리그스와 스티븐 카렐의 싱크로율도 만만치 않습니다. 테니스 라켓으로 주요 부위를 감춘 채 찍은 두 장의 누드 사진은 어떤 것이 실존 인물의 사진인지 구분하기 힘듭니다. 스티븐 카렐은 유쾌하고도 신경증적인 중년 남성의 복잡한 심경을 훌륭하게 연기합니다.
영화가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은 세심하고 아기자기합니다. 주변 인물들의 서사를 놓치지 않으며 영화에 디테일과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세계 여성 테니스 협회의 스폰서 글래디스 헬드먼(세라 실버맨)은 투지에 불타고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입니다. 빌리의 라이벌인 마거릿 코트는 빌리의 동성애 성향에 반감을 보입니다. 테니스 복식 디자이너인 테드 틴링은 보수적인 테니스 복식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흰옷, 흰 테니스화만을 고집하던 규칙을 깨고 화려한 색감과 세련된 장식을 가미합니다. 그는 빌리와 같은 성소수자였으며 빌리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관해 상의한 유일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미스 리틀 선샤인’을 공동 연출한 부부 감독, 발레리 패리스와 조너선 테이턴은 균형 잡힌 시선으로 자칫 성 대결 구도로 흐를 수 있는 영화에 중심을 잡습니다. ‘세기의 대결’이 열린 지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빌리 진 킹은 남녀 선수가 동일한 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성별 임금 격차는 존재합니다. OECD 회원국의 평균 남녀 임금 격차는 11.6%입니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31.2%로 OECD 국가 중 가장 큽니다. 50여 년 전 테니스 코트를 달구었던 논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은 셈입니다.
한편 50여 년 전의 경기에서 빌리가 보비를 이겼다는 사실은 앞서 언급한 섹스⁄젠더 이원론에 대해 고민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남녀 사이에서도 남성보다 우월한 경기 수행력을 지닌 여성이 존재합니다. 최근에는 각종 스포츠 경기에서 트랜스 젠더 선수의 경기 출전 여부를 두고 설전이 벌어집니다. 생물학적 성별이 모호한 간성(Intersexual) 스포츠 선수에게도 비슷한 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50년여 년 전 빌리 진 킹이 생물학적(biological) 차이라고 표현한 성차는 점차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성차를 둘러싼 논의에는 치열한 고민과 열린 마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