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귀가할 시간이 가까워오자 세상이 어둑어둑해지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꽤 많은 양의 비, 며칠 전 싸워서 말을 안 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우산 있냐고 전화했다. 없어서 학원 앞에서 비가 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지하철 타면 몇 시에 도착하는지 카톡 남겨 두면, 아이랑 우산 챙겨서 시간 맞춰 나가겠다고 했다.
그 사이 나는 아이의 머리를 이발하고 씻겼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이 아이 몸을 덮은 거품과 함께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튀어나온 나의 한 마디는 무의식에 남아있는 강렬한 과거 경험이 꿈틀거리느 것과도 같았다.
나 : 엄마 보고 싶다.
아이 : 별나라에 먼저 간 엄마?
나 : 응, 아이야, 있지- 혹시 어디 나갔다가 집에 오려는데 비가 엄청 쏟아져. 근데 우산이 없어. 그러면 언제든 엄마한테 전화해. 엄마가 우산 두 개 챙겨서 네가 있는 곳으로 꼭 갈게! 알았지? 우리 아가 비 맞지 않게 엄마가 갈 테니까 꼭 전화해~
아이 : 알았어. (기분 좋게 웃는다)
나 : 예전에 버스에서 내렸는데 비가 엄청 쏟아지는 거야... 우산이 없는데, 나오라고 전화할 엄마가 없어서 그 비를 다 맞고 집에 갔어... 그날 너무 슬퍼서 엉엉 울다가 잠이 들었어.
아이 : 너무 슬프다... (눈물 핑-)
20대 후반, 고모랑 살 때였다. 야근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렸는데 미친 듯이 비가 쏟아졌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 단지였음에도 늦은 시간이라 잠들었을 고모를 깨울 수 없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도, 속옷까지 다 젖을 만큼 쏟아지는 그 비를 고스란히 다 맞고 걷는데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은 물 범벅이었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폭탄을 맞은 듯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겨우 씻고 누웠는데도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20대 후반에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면 오바였을까...
지금은 아무리 시간이 늦어도 남편에게 우산 좀 갖고 와 달라고 전화할 테지만, 그때는 참 외로웠다. 지금도 때때로 중년 고아의 기분을 느끼곤 하지만... 20대 중반부터 온전해야 할 엄마의 사랑이 영원한 부재중이 되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의 나는 20대의 정서가 멈춘 듯, 미성숙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사랑을 갈구하는 면이 있다. 누군가 나를 애 같이 느낀다면 아마 그 영향일 것이다.
그런데- 30대엔 몰랐는데, 40대가 되고 나니까 엄마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하나, 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엄마의 이상하고,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들이었다. 엄마가 없는데 이제 와서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니, 미칠 노릇이다. 이런 정서적인 문제가 뒤엉켜 지난 추석을 보내고 나서는 공황장애가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이 힘들었다. 심리 상담이나 어떤 조치가 필요함을 잘 알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다. 파 해쳐서 들여다볼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 일단은 스스로 다독여보기로 했다.
밖에 빗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니까 또 눈물이 날 거 같다. 배갯니 적시며 엉엉 울던 20대의 내가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다. 그 잊을 수 없는 축축함과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이 같이 살아난단
나는, 아이가 비 맞지 않게 해 줘야지...
비올 때 전화하면, 언제든 우산 2개 챙겨서 나갈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지... 우리 엄마가 그랬을 행동과 똑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