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저승 보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나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고 하지만 아무 근거 없이 그저 이승에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이승과 저승을 동시에 경험해 보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알고 보니, 즉 죽고 보니, 저승은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해서 저 세상에서는 이미 "고양이똥밭에 굴러도 저승이 이승보다 오백프로 낫다"라는 이야기가 이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특히 이제 이승에서의 삶 보다 저승에서의 삶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면, 저승의 부정적인 면만 볼 것이 아니라 저승의 혜택과 복지에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해 우주 생성의 비밀을 풀어내고, AI의 도전을 걱정하며, 양자역학의 실현을 앞둔 이승일지라도, 아직 저승, 즉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것은 원래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과학은 지난 수세기 동안 사실상 신의 영역을 침범하며 수수께끼를 규명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치 신이 그깟 몇 가지는 인간에게 공개할 수도 있지만 이것만은 절대 공개할 수 없다며 꼭꼭 숨겨놓은 것이 바로 저승의 영역이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 안쪽에 꼭꼭 숨겨 놓은 것처럼 저승만은 아직 어떠한 과학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저승을 규명할 그 흔한 천재 과학자 하나 보내주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인간은 이제 우주를 정복하겠다고는 하면서 바로 코 앞의 저승 탐사는 이미 포기한 듯 보인다. 그 이유는 이제 이승의 삶이 꽤 달콤해졌음에도 있다. 너무 고되고 배고파서 그나마 저승에서의 안식을 원하는 삶이 이전에는 보편적이었고, 그래서 저승은 꽤 탐사 가치가 있는 신대륙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먹고 즐길만한 이승의 삶에 취해 도무지 저승이 기대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팔아서 한몫 챙겼던 비즈니스 모델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승에서 바로 축복받고 극락을 경험할 수 있는 이승 패스트트랙이 인기이다. 심지어는 이승이 얼마나 좋은지 너무 돈이 많다 보면 반미라의 상태로 저세상 도착이 지연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는 것은 불변의 정해져 있는 결과다. 모든 생명체는 그 소멸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심지어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빼앗아 에너지로 삼는 시스템은 얼마나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에 이 시스템이 진심이었나를 보여준다. 마치 소멸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창조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 끝을 분명하게 명시하며 반드시 죽는 만큼 새로 채울 수도 있다는 연결의 고리를 분명히 한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남으려는 본능과, 유전자 전달이라는 두 개의 프로그래밍을 따른다. 이 질서는 꽤 효과적으로 유지되었는데, 두 사명이 충돌할 경우 살아남으려는 본능보다 유전자 전달이라는 후자가 조금 더 우선시되는 듯 보였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것도 때론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어차피 목숨은 유한하기에 유전자 전달을 통해 생명체의 연장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생 인류는 그 시스템의 규칙에서 과감히 벋어 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이승이 중요하지 저승은 고려 대상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유전자를 전달하여 생명체를 연장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을 저승에서 지켜보며 확인할 것도 아닌데, 개똥밭이라도 자신이 직접 굴러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으면 끝인 이승에서 유전자 전달의 프로그래밍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한세대만 지나도 쉽게 잊히기 쉬운 조상과 후손의 관계에서 이미 그 유전자의 고리가 느슨해졌음을 보여준다.
후손이라는 유전자의 연결은 저승이 없이 모든 것이 끝인 마당에 보험사만 배 불리는 무배당 무환급 유전자 사기일 뿐이다. 후손의 입장에서도 어떤 유전자를 받고 선조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누구였는지 보다는 재산을 얼마나 자신과 연결시켜 남겼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더군다나 현재의 이익을 위하여 자원을 마구 써버리고 쓰레기만 무한히 남겨주는 것을 보면 더 이상 후대에게 쏟을 관심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것은 결국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다"라는 지극히 이승 중심적 사고로 이어진다. 현생이 가장 중요한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저 세상 천국과 지옥은 기대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다. 다음 생은 모르겠다거나 없다고 치고, 일단 지저분하고 더럽게 개똥밭에서 구르더라도 이번생의 만족에 전력하기로 한다. 불확실한 저승 보험에 자원을 나누어 투입하느니 이승의 코인에 올인한다.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심지어 아주 나쁜 짓일지라도 이승에 모든 것을 걸어 한몫 챙기고, 누릴 때로 누리고 저승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인간이 개가 된다 해도 개똥이 금이 될 수 있다면 뭐가 문제인가? 어차피 개로 환생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전애는 천국과 지옥행 확률이 50:50이었다면, 현재는 이승의 개똥밭에 모든 것을 몇 배로 배팅한 나머지, 결과는 거의 90% 이상 지옥행이라고 보인다. 저승 보험은 인기가 떨어져 팔리지 않으며 이승에서 다 쓰고 죽어야 만족한다. 저승에 남겨두거나 가지고 갈 선행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렇게 이승에 올인했는데 만약 저승이 있다면!
죽음이라는 소멸의 시스템은 창조라는 필연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저승은 필연적으로 이승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그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전달된다. 그것은 과학과 우주의 원리상으로도 가장 질서 있는 균형이다. 죽으면 끝.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고 연결되어 전달되어야 맞다.
하지만 천국, 지옥 또는 환생 같은 기존의 신의 폐허가 된 놀이동산과는 일치시키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종교는 마치 지옥의 심판이라도 불리하면 불복하고 테러하며 지옥의 해체를 주장하고도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지옥에서의 난동이라니 꽤 볼만은 할 것 같지만 아무리 신이라도 진저리를 칠 것은 분명하다.
이승이 개똥밭이라면 오히려 저승은 황금밭이라고 어겨진다. 당연히 이승은 저승보다 좋을 수 없으며 저승은 이승보다 훨씬 좋다. 왜냐하면 저승은 이미 완결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국가로 치면 선진국이고, 과거의 무질서한 도시가 아니라 첨단 미래 도시이고, 절대 개똥이 바닥에 구를 리 없는 보다 정제된 세계이다.
그런데 왜 저승의 이미지는 이렇게 악의적으로 어두운 블랙홀일까? 그것은 사실은 이승이 고통이고 저승은 기쁨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너무 일찍 이승의 생을 마감하려 들것이기에 철저히 비밀에 부쳤을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다"라는 주장은 저승에서 보낸 반어적 유언비어이다.
그러나 이승의 생이 황금밭이었다면 저승에서 개똥밭을 굴러야 될 경우를 충분히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승에 올인했을 때 당연히 저승에서는 아무것도 없거나 오히려 마이너스인 것이 균형의 원리에 합당하다. 이승에서 이유 없이 그리고 불행하게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있었다면 저승에서는 그 보상이 주어져야 공평하다. 이승에서의 죄는 마땅히 저승에서 리셋되는 것이 아니라 개똥밭에서 구르는 보상으로 되돌려 받아야 비교적 합리적이지 않을까? 미래 도시에 이 정도 시스템을 갖추어 놓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빠르게 정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 수록 이승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점점 저승에 분산 투자를 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보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자신만 살아남려는 본능, 자신의 유전자만 전달하려는 프로그래밍적 과업에도 불구하고 그 본능을 이기고 남도 살리려는 마음, 유전자에 모든 재산을 남기려는 대신 저승의 은행에 남겨 놓을 선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고스란히 저승의 황금밭에서 나중에 수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승에서 개똥밭에 구르는 일은 그만하여야 할 이유다. 이승이 저승보다 결코 구르기에 바닥이 고르고 평평하다 하기 어려울것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