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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물 안 묻힌 삼일 세끼

남이 한 밥이 먹고 싶다

by BH

우렁각시가 필요한 도비

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삼시세끼 내손내밥 하고 있다. 그러려면 평일에는 새벽부터 도시락과 간식을 싸야한다. 주말에 좀쉬어 볼까하지만 토요일은 밀프렙의 날이고 일요일은 청소와 빨래가 도사리는 날일 뿐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은 다행히 먹을만하지만 그 맛있음이라건 주방에 붙어있는 시간과 들이는 에너지에 비례하기 때문에 맛있어 질수록 나는 피곤해졌다. 그러다보니 신기한 음식을 시도하며 즐겁던 나는 없어지고 과일 씻고 자르는 것까지 허드렛일이자 노동으로 느끼는 지친 도비만 남았다.

우렁각시가 도시락을 싸주고 청소도 해줬으면...... 하는 환타지에 빠져 토요일 오후를 멍하니 보내기도 했다.

식도락의 즐거움이 노동으로 바뀌면, 삶은 회색빛이 되고 화폐를 열심히 모으면 뭐하나 하는 염세적인 생각도 들었다. 뿌연 일상에 질식되어가던 중 번쩍 정신을 차리고 잠시 올 스탑을 외쳤다. 자연식도, 내손내밥도 좋지만 삶의 낙을 잃으면서까지 집착할 가치는 아니었다. 이제껏 회사소속 도비로 일하면서 열심히 축적한 자본으로 우렁각시 손을 빌리기로 했다.

그동안 나에게 좋은 밥을 먹이느라 고생한 몸과, 교과서 같은 바른 먹거리만 먹어 지겨워하는 마음에 휴식시간을 주는 거다.


이번 주말은 물 안 묻히고, (몸의 청결은 제외) 적어도 먹거리 준비로 물 묻히는 일은 없이 지내보기로 한다.


나도 남이 해준 밥 먹으러 간다.


휴가 낸 금요일, 포포 브레드

일이 많아져 목요일에 벌써 머리 회로가 다 타버린 도비를 금요일 오프로 회사에서 빼냈다. 그렇게 하루 일찍 주말을 맞이했는데 그냥 밥은 너무 아쉬웠다. 남이 해줄 뿐 아니라 밥으로 때우면 안되는 것들로 식사를 하고 싶었다.


맘모스빵이후로 빵구경을 못해서 몸이 한껏 안달났을때 우연히 인스타에서 포포브레드의 밤식빵을 보고 바로 꽂혔다. 포포브레드는 생활의 달인에서 식빵들 중 1등으로 뽑혀 인기가 올라간 베이커리다. 쌀빵에다 동물성재료를 안쓰고도 top을 찍은것을 보니 내공있는 베이커리가 분명하다.

포포의 밤식빵은 겉에는 소보로 속에는 단밤이 들어있는 디저트빵이다. 밤식빵, 흑임자, 쿠기들 한보따리 사와서 한끼를 채운다니 생각만해도 흥분되었다. 방탕한 휴가 첫날의 점심으로 훌륭한 구성이다.

12시 오픈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찍 출발했는데 아뿔사 단팥빵은 삼십분을 더있어야 나온다고 했다. 2월 한정판매인 단팥빵을 오늘(2월 28일) 못사면 1년을 기다려야는데... 배고프고 지루해도 참고 기다릴 수 밖에 다른길이 없다.

빵을 용기에 담아 고이 집으로 모시고 옴

전두엽의 절제를 봉인해제시키고 밤식이(밤식빵), 흑식이(흑임자식빵), 쿠키, 파운드케익 그리고 단팥빵을 본능적으로 집었더니 순식간에 37500원이 찍힌다. 빵값이 비싸다고 하기에는 요즘 남이 만든 것들 전체가 다 비싸다. 그래도 사장님이 30분을 더 기다린 순한 양에게 은혜롭게 마들렌을 덤으로 주셔서 4만원 안넘긴걸 다행으로 여긴다.


난 쌀로 만들어서, 버터, 계란 우유가 안들어가서, 원당을 써서 몸에 좋다느니고 뭐 이런 눈가리고 아웅 할 생각은 없다. 쌀이든 밀이든 곡식을 갈아 넣었고, 정제당이든 원당이든 첨가당(added sugar)이 들어갔고 유기농이든 아니든 오일이 섞였다. 정성을 들이고 맛있는 것과 건강이나 치유는 별개의 문제다. 입에서 달고 고소하고 부들 쫄깃한 음식들은 명백히 가공도가 높아 쉽게 흡수되고 기분을 좋게 한다. 이렇게 단기간에 최고의 기분을 주는 음식은 건강을 책임질 끼니가 될 수 없다.


포포브레드를 선택하는 것은 질좋은 재료와 정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맛있어 보여서다. 비건이라서, 몸에 좋은 재료라서, 환경에 좋아서 같은 가슴을 웅장하게 하는 무슨 추상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다. 맛있는 디저트를 양껏 먹는 건은 그냥 단순히 즐기는 행위이다.

오늘은 '너 하고싶은대로 하세요'의 날이라 얼마 먹을지 제한없이 먹기시작했다. 쫄깃한 식빵, 치아바타를 시작으로 달달한 쿠키, 마들렌, 파운드까지 한바퀴 돌고 또 식빵부터 다시 한바퀴 더 하다보니 전체 빵의 절반정도(한 만팔천원어치?)가 날아갔다. 그제야 머리속 디저트 센서가 '이젠 그만 좀 먹지' 하며 만족의 사인을 보낸다.


디저트가 밥이 되면 카브 코마(carb coma)를 피할 수 없다. 일전에 건강검진에서 혈당패치와 24시간 심전도를 해보고 확실히 알게 됬는데 난 디저트를 몰아서 많이 먹으면 혈당이 솟구치면서 살짝 어지럽고 심장도 빠르게 두근거린다. 디저트 빵 좀 거하게 먹었다고 '빈사'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 유전자는 쏟아지는 혈당공격에 빠르게 대처할 능력은 없는 거 같아 나중에 은퇴하면 먹방해볼까 하는 소망은 접기로 했다.


포포브레드의 식빵, 쿠키, 그리고 치아바타까지 모두 맛있었다. 늘 강조하지만 비건 디저트에 습관적으로 건강 수식어를 붙이는 건 강박이다. 디저트 좀먹는게 몸에 좋거나 나쁜 영향을 준다기보다는 그저 적당히 먹으라는 룰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의도적이긴 하지만 달달한 맛에 기분좋아 어지럽고 심장이 두근거릴때까지 먹은 내가 버터, 계란 우유가 들어간 일반 디저트 많이 먹은 사람보다 건강할일인가.


밤식이를 먹을땐 빵과 나 그리고 도파민이 있을 뿐 환경을 생각하거나, 다른 종의 생명체를 보호한다는 그런 거창한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다.

몸은 나가 떨어져도 정신이 좋아죽는 것 그것이 오늘의 미션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정신을 위해 심장이 좀 두근대고 머리가 어지러운건 별 문제도 아니다.


한끼 잘 먹었다.


토요일은 신당천팥죽

내 영어선생님은 단팥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곡식으로 만든 도우(빵피)에 곡식으로 만든 소(팥앙금)를 넣는 것으 뭔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누군가는 밥으로 팥죽을 왜 먹는지 이해 못한다고도 했다. 한끼에 탄단지 골고루를 부르짓는 현대인에게 탄탄탄으로 쏠린 팥죽의 구성은 너무 한쪽에 치우쳤다는 것이다.


이런 팥 불호자, 탄수화물 기피자들의 의견에 대해 나도 할 말은 있다. 항상 사람은 음식을 먹는거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같은 성분은 먹는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콩과 잡곡으로 밥을 지으면 탄수화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요소가 다 들어 있는 잡곡밥이 되는거다. 탄단지 각각의 성분을 공장에서 조립한 가공식품에나 쓰는 성분표를 자연의 음식에 붙일 이유가 없다.

팥죽 팥빵이 곡물, 곡물 구성이라 단조로울 수 있지만 고기, 고기 구성으로 먹는 사람도 있으니 취향의 문제아닌가 하고 항변해본다. 게다가 매일 팥죽만 먹는 건 아니니 다양성이 부족하다느 염려는 접어두어도 된다.


이날은 동지날에 팥죽을 먹지 못한게 불연듯 생각났고 팥죽을 미친듯이 검색해서 심사숙고 끝에 서울 3대 팥죽이라는 천팥죽으로 좌표를 찍었다.


팥이 곱게 갈린 팥국물에 찹쌀 가루로 만든 새알경단을 둥둥 띄운 팥죽은 자연식 기준에서도 가공도가 높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팥을 불리고 오랜시간 뭉근하게 푹 삶아서 보드랍게 갈고 거기에 찹쌀가루를 뭉쳐 반죽하고 일일이 새알을 굴려 익히고 팥국물에 넣는 전체과정은 정성스런 가공이다. 그냥 기계가 밀가루로 기름에 튀겨내는 과자의 가공과는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싶은 마음이다.


여튼 마음은 정성이라고 구분했지만 팥과 찹쌀이라는 단조로운 재료의 곡물 죽 한사발로 한끼를 채우는게 보약같은 효능은 없을거다. 내가 먹고 싶은 목록은 어떤 옳고 그름 이나 효능효과의 기준이 아닌 단지 그러고 싶은 마음의 크기로 정해진다.


뜬금없지만 '죽'은 나에게 일반인, 채식인이라는 사회적 철학적 구분을 녹여주는 평화와 단합(?)의 음식이다. 내가 죽 먹자고 할때 비건 죽집을 찾을 필요가 없다. 팥죽, 흑임자죽, 호박죽, 녹두죽은 그냥 태생부터 채식이자 일반식이기 때문이다.


양이 작아보여도 죽 안에 새알이 바글바글하다

맛있게 한그릇 때리고 집에 가니 배에 곡기가 가득차 눈이 절로 감긴다.

즐거운 카브코마로 토요일오후를 보낼 수 있었다.




일요일은 달냥

달냥은 그냥 채식 식당을 검색하다 우연히 건저올린 식당이다. 식당을 고를때 유별난 메뉴를 찾는 건 아니고 그저 메뉴판에 모든 선택지가 내가 먹을 수 있는 식당이면 족하다. 안 망하고 영업해주는것만도 감사한데 후기까지 좋으면 심장이 콩닥콩닥한다.

냥이라는 이름대로 인테리어가 고양이스러운 아기자기함이 있었다.

메뉴판을 무슨 교과서처럼 두번은 정독하고 나서 타이그린커리와 템페 당근라페 반미, 두개를 시켰다.

자연식을 하다보면 밥통이 커져서 일반 메뉴 하나로는 배가 잘 안찬다

우선 타이그린커리는 딱 내가 좋아하는 소스 맛이었다.

고소한(기름진) 국물에 건더기 많고 매운 킥이 느껴지는 요리를 좋아하는 내 취향 저격이었다.

진한 코코넛 밀크 베이스의 커리에 푸욱 익은 감자가 있고 위에는 구운 브로콜리, 단호박, 주키니 그리고 바질잎이 올려져 있었다.


다만 평소 집밥에 간을 잘 안해서 이런 식당요리는 다소 짜게 느껴졌고 밥이 알단테(꼬들밥)라는 게 나랑 안맞았다. (난 떡진밥을 좋아하는 소수자) 게다가 밥이 (내 기준에) 너무 적어서 마지막에 소스국물만 남았을때 밥 한공기 더 시켜서 말고 싶었다.

반미를 안시켰다면 배고플뻔 했다.


바삭한 바게트, 아삭한 양상추, 달달고소 당근라페, 그리고 짭짤한 템페슬라이스가 입안에서 맛의 밸런스를 완성하고 식감도 최고였다.

심사위원이라면 별 5개 날리고 합격의 목걸이를 걸어줄 정도.


이게 끝은 아니었다.

달달한거 안먹고 '남이 해준 밥'을 끝낼 순 없지

두유 아이스크림 콘을 진짜 마지막으로 시켰다.

두유 아이스크림... 2016년 이후 먹지 못먹었던 바로 그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다.

소프트 아이스크림 특유의 또아리가 없어 아쉽지만 눈감고 먹으면 상관없다.

콘 아래 부분까지 꽉 채워주신 인심에도 감동하고

오늘은 미리 땡겨 챙기는 내 생일날이라며...


잘 먹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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