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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H Aug 19. 2022

내 몸 사용 매뉴얼 3장 - 내몸 소유권

내 몸의 주인이 누구인가

내 것이 아닌 검사결과

일년에 한번오는 직장인 검진일을 좋아한다. 이유는 내 피검사결과가 궁금해서도 프로포폴을 합법적(수면내시경)으로 맞는 날이라서도 아니다. 원래 매년 똑같은 결과인데 머하러 아까운 피는 자꾸 뽑냐며 검진을 안받겠다고 했었다. 그랬더니  근로자가 건강검진을 받지 않으면 회사에 불이익이 간다고 인사팀의 경고를 받은후 전략을 수정했다. 검진을 가장 최소 구성으로 끝내면 남은 하루는 전부 놀 수 있어 검진일이 휴가가 되었다. 여튼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혹시나 검진결과에서 큰병 나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건강을 해치는 생활습관이나 유전질환도 없는데 덜컥 암이 발견되는 일은  드라마에서나 일어난다. 그래도 심전도는 좀 궁금했다. 심장의 전기적 신호를 그래프로 나타내는 심전도가 학문적으로 궁금하다기 보다는 '내' 심장박동을 사진으로 간직하려는 마음이었다. 음식사진도 열심히 남기는 판에 내 심전도 내가 찍는게 뭐 큰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심전도 검사후 결과지를 핸드폰으로 찍어도 되냐고 정중히 물어 보다가 바로 거절당했다. 위에 허락이 필요하다는 답변에 더 놀랐다. 이거  방금 내 몸에서 측정한 결과지 아닌가.  누구 허락을 받는단 말인가.


결국 이번만 찍게 해주겠다는 큰 양보를 받고 사진을 찍긴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가만히 보니 내가 병원에서 불편했던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급성 통증으로 허리 MRI를 찍었는데  디스크가 튀어나왔다는 한마디 듣고 진료실을 나온 기억이 떠올랐다. 사진관에서 2만원내고 증명사진을 찍어도 수십장의 사진을 받고 나오는데 반해 거금 30만원을 들여 허리 MRI를 찍고나서는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MRI를 찍고나서 내 허리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사진을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찍었지 하는 현타가......)  

얘기가 너무 멀리 갔지만 대부분의 의료정보가 이런 식이다. 내 돈내고 받은 진료 혹은 영상검사의  정보를 그 주체가 소유하지 못한다. 영상 복사본을 가지는 방법이 있지만  결국 병원에 돈을 '더' 내야한다. 그럼 그 정보는 누구것인가. 병원 것인가? 아님 나라 것인가?    


이렇게 내 의료정보를 제3자가 소유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놀랍다. 아마도 그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넘겼서가 아닐까. 어짜피 나는 봐도 모르니 전문가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일찌감치 양도하고 의학 정보를 소유할 생각은 안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몸의 정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모두 전문가에게 넘기고서 우리 건강이 좀더 나아졌다면 좋겠지만 결과는 반대이다. 몸과 그 관리자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있다.  

 

아픔을 확인받는 곳

어느 주말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 아빠는 무릎이 좀 불편해진거 같다고 얘기했다.  오빠가 듣자마자 꺼낸 첫마디는 바로 '병원은 가보셨어요?'였다.  

이 낯설지 않은 느낌, 기시감은 평소 자주해서 익숙한 대화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직장동료들과 대화하면서 누군가 요즘 갑자기 허리가 아프다 관절이 쑤신다 혹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때  가장 빠르게 위로를 전하는 말이 바로 '병원은 가봤냐'다.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병원에서 확인을 받는게 당연한 순서가 된 것이다.   


아버지는 한 5년 전부터 여기저기 아프다는 부분이 많아졌다. 처음엔 허리부터 시작해서 무릎 그리고 어깨 까지 계속 번졌다. 그렇게 초반 3년 정도는 무수히 정형외과를 드나들며 여러번의 MRI를 찍었다. 당시엔 나도 혹시 큰 이상이 있는건 아닌가해서 건강검진 결과도 샅샅히 살피고 같이 진료를 따라가기도 했다. 그렇게 길게 아버지를 관찰하니 반복되는 패턴이 보였다.    

다행히 그동안의 진찰과 MRI 결과에서 수술 해야하는 큰 이상이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특별히 류마티스나 다른 만성질병 없으셨고  무엇보다 늘 진료실을  걸어서 들어가셨다.  아버지가 아픔에 대해 길게 하소연하면 의사는 딱히 해줄건 없고 아플때 드시라고 진통제 일주일치를 처방해 주었다. 아버지는 늘 한 2일치 먹다가 통증이 사라지면 나머지 5일치는 안먹고 버려졌다.  특이하게도  무릎과 허리의 통증이 커지는 것은 늘 심리적으로 움츠러드는 시기와 겹쳤있었다.  


혼란스러운 시간이 한 3년정도 지나자 아버지도 점차 스스로의 상태를 받아 들이셨다.  통증과 불편함이 나이듦과 손잡고 오는 성가신 변화이지만 마냥 움츠러들고 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관리를 시작하셨는데 좀 불편해도 계속 움직이고 근육운동도 하셨다. 물론 그러다 통증이 많이 크다 싶으면 진통제 도움도 받으셨다. 그간 무수한 진료와 MRI, 비싼 환약에도 답이 나오지 않아 갈팡질팡하실때보다 직접 몸을 관리하는 지금 더 능독적이고 적극적이시다.


물론 모든 허리 무릎 통증이 나이탓이라거나 정형외과 진료는 모두 필요없다는게 아니다.

아버지 경우는 건강염려증과 나이듦에 대한 애닮음이 아픔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게다가 그 통증은 진통제나 병원의 진찰받는거 보다 내가 전화로 한 30분 불편한 얘기를 들어드리거나 손자의 재롱을 볼때 더 호전되었다.  


오빠는 아빠의 이런 3년간의 긴 히스토리를 알지 못하니 아프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현대인이 선호하는 빠른 솔루션 "병원 가보기"를 제시한 것이다. 병원가기는 즉각적인데 반해  내 몸을 직접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 병원의 짧은 진찰이, 비싼 MRI가, 아니면 1회 10만원인 도수치료가 우리의 아픔을 얼마나 개선시켰나.

병원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와 그럴 수 없는 문제는 엄연히 구분되야 하지만 우리는 모든 문제를 병원으로 가져간다. 어떤 문제는 병원에서도 개선의 방법을 모르는데 안그래도 바쁜 그 곳으로만 달려가야 할까?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의 해방일지'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드라마다. 인상깊은 장면은 바로 주인공이 어머니 유골함을 집에 두었다고 말할때 친구들의 호러영화 본 듯한 표정이다. 수십년을 같이 살아온 가족도 생명이 떠난 육신을 다시 집에 들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 어릴때만해도 할아버지 장례는 할아버지 시골집에서 치뤘다. 당연히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할아버지 시신은 집에 (관속에)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만에 모든 장례는 병원의 장례식장이 아니면 상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출생은 또 어떠한가. 나 역시 병원에서 태어났고 주변에서 집에서 아이를 낳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동기 오빠 부인이 집에서 출산했다고 했을때 신기해했고 한편으로 유별나네 하고 생각했다. 그가 의사임에도 그렇게 놀랐으니 일반인이 집에서 출산하는 것은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올 법한 이벤트가 되었다. 야생의 짐승들은 병원도 없이 어떻게 그리들 새끼를 낳을 수 있을까. 알고 보면 우리조상들도 가능했는데 말이다.


이렇게 현대인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그사이 일어나는 모든  질병, 통증 그리고 기타 모든 불편함들을 병원에 등록해서 상의한다. 뭐 체중도 병원에서 약과 주사로 관리해주겠다고 하니 현대인의 몸은 병원에서 토탈케어를 받는 셈.

원래 다양한 사람들이 배분해서 관리하던 인간의 생로병사 이벤트가  모두 병원이라는 단일기관으로 이관되었다. 모든 것을 한군데로 몰아넣는것이 매우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가장 최선은 아닐텐데...  그 와중에 몸의 진짜 주인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가지는 관심이나 정성도 덩달아 줄어들고 있다.


몸의 소유권 찾아오기

주인의식에 대해 난 주인와 알바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자주가는 일반식당에서 샐러드를 주문할때 난 늘 토핑으로 올린 새우나 계란을 덜어내게 빈접시를 달라고 한다. 그때 마뜩찮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접시만 건네는게 알바라면 뭘 안먹길래 덜어내냐고 물어봐주고 다음에는 첨부터 빼주겠다며 접시와 집게를 같이 건낸 건 분명 가게주인이었다.

알바의 서비스가 주인보다 떨어진다고 일반화 할 순 없지만 자기가게라는 생각이 있어야  최상의 서비스가 나오는 건 분명하다. 그건 내 몸도 마찬가지다. 몸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되려면 그 몸에 대한 주인의식 내지는 소유권이 있어야한다. 물건도 관리의 일차책임은 소유주에 있지 않나. 비싼 외제차 주인이 차를 사랑하는 마음에 직접 손세차로 일일이 닦는 것은 드물지 않게 본다. 그냥 알아서 잘해주겠지하고 기계세차 맡기면 차가 금방 낡아진다는 얘기도 들은 적있다.

 

지금 내 몸이 하는 말을 주인처럼 신경쓰고 듣고  있는가 아니면 알바가 기계적으로 주문받는 것처럼 흘려듣고 있는가. 내 몸이 어떤 음식을 먹었을때 가장 최선의 컨디션을 내는지, 어떤 생활습관에 건강한 체형을 유지하는지, 어떨때 아프고 어떤 아픔이 감당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걸리고 귀찮음과 노력도 필요하다. 물론 때론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반드시 의사일 필요는 없다. 스스로 관리를 잘하는 지혜로운 어른도 건강에 대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병원이 필요한 순간이 분명히 있지만 병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곳은 아니다.   


모든것이 분업화된 세상에서 건강관리는 병원이 잘 해줄거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병원은 내 몸의 소유자가 아니다. 차로 비유하자면 병원은 고장 수리가 전문인 곳이지 최상의 컨디션으로 만드는 기관이 아니다.

몸을 꾸준하게 관리할 의무는 자신에게 있고 그 귀찮은 일을 다 감당할 수 있는것은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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