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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운찬 Dec 25. 2019

정답이 없다면 오답도 없다

세상이 다차원적으로 연결되고 복잡해짐에 따라 정답이 없다는 말은 이제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조차도 '응 맞아 정답은 없어, 하지만...'이라고 말을 시작한다.


정답이 없다는 건 결국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만 이처럼 고통을 안겨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명확히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쫒기 어렵고, 금방 지치며, 결국 그만두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저 간 사람들의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남긴 지식을 통해 믿음을 얻고 나아갈 힘을 얻어 주저앉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다. 이러한 믿음과 힘은 그 지식에 대한 신뢰와 비례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지식에 대한 신뢰를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맹목은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만히 있기보다 더 나아지려는 사람들을 또는 그들을 이끄는 사람들을 이유 없이 비난한다. (이유야 금방 만들어낸다) 그들은 정답이 없는데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 너희들이 하는 말이 정답이라도 되는 것이냐.라고 비난을 하지만 결국 그러한 비난 또한 '내 말이 옳다'라는 '정답 주의'를 비껴가기엔 무리가 있다.


최근에 한 온라인 모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에 조용히 들어보았다. 그들은 고상한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리적으로 대상을 비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듣기엔 합리적 비판이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보이는 몇 가지로 대상을 판단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양 서로 동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답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대상의 행위가 오답임을 지적하는 것.


논의는 사실상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그들의 주장처럼 정답이 없다면 오답 또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오답은 동전의 양면처럼 정답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답이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모두 자연스러움 속에 속하는 존재임을 자각해야 한다. 비록 누군가가 우리 눈에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굳이 그를 오답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끌어내릴' 바에야 '끌어올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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