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일기 (1)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 근처의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10월 13일.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Dragon Stone을 찾으러 떠났다.
유명한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 후반부에는 용의 여왕 대너리스의 타르가르옌 가문 본거지 드래곤 스톤이 등장한다. 알고 보니 이 드래곤 스톤이 빌바오 근교의 어느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
교환학생 생활 당시에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 잘 몰랐지만, 이미지로 본 드래곤 스톤이 정말 멋있어 보여서 무작정 오빠들을 따라 배경지인 가스텔루가체(San Juan de Gaztelugatxe)를 찾아갔다.
바다로 둘러싸인 바위섬 가스텔루가체까지 가려면 차를 빌리는 것이 편하겠지만, 일을 벌이는 것이 번거로웠던 우리들은 최대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먼저 가스텔루가체와 가까운 작은 해안마을 Bermeo까지 버스를 타고 간 후에 나머지 여정을 생각하기로 했다.
빌바오에는 시내를 도는 빨간 버스와 그보다 조금 더 먼 시외를 도는 초록 버스가 있다. 기세 좋게 버스에 올라타 뒷자리를 선점한 우리들은 MT를 가는 것 마냥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베르메오까지 갔다.
베르메오 마을 안 곳곳에는 크고 작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서 사진 찍는 맛이 있었다.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으면서, 높은 경사를 따라 마을과 주변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을 기슭으로 다시 내려와 바닷가 근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점심을 해결해보기로 했다.
테라스에 사람이 더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각자 마음에 드는 음식을 아무거나 시키거나 사장님의 추천을 받았다. 나는 스페인식 미트볼 알본디가스(Albóndigas)를 주문했는데, 다른 오빠들이 시킨 음식들이 더 맛있었다는 것이 함정... 특히 파프리카 소스를 끼얹은 구운 대구요리가 정말 맛있었다.
스페인 북쪽 지방은 대구가 유명하다는 것! 다음부터는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겠다.
베르메오 구경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가스텔루가체로 가기 위해 버스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1시간 이후에나 버스가 온다는 충격적인 소식! 결국 정류장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가스텔루가체로 갔다.
베르메오에서는 분명 좋았던 날씨가 가스텔루가체 쪽으로 가면서 점점 궂게 변했다. 소나기도 오락가락하는 것이 변화무쌍한 바다 날씨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입구에서부터 축축한 땅을 밟으며 하이킹을 했다. 물기를 먹으러 내려온 수많은 민달팽이들을 피하느라 곤욕을 치렀지만, 30분 정도 산 너머로 걸어 들어가면 가스텔루가체의 멋진 장관이 펼쳐진다.
왕좌의 게임 드라마 속에서 성까지 길게 뻗어있던 길은 실제로도 바위섬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까지 이어져있었다. 까마득해 보이는 돌계단은 일단 제쳐두고, 바위섬 밑에 앉아서 미리 사 왔던 맥주와 과자를 먹으며 사진을 찍었다.
겹겹이 쌓인 지층구조를 가진 가스텔루가체의 바위들은 마치 용이 발톱으로 긁어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수도원의 종소리.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온 사람들이 성취감의 표시로 종을 한 번씩 치고 간다. 종을 치려는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어서 부끄러웠던 나는 종 치기는 포기하고 수도원 한켠 팻말에서 사진을 찍었다.
가스텔루가체 구경을 마치고 입구로 내려오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갔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30분을 걸어서 Bakio라는 마을까지 가야 했다. 택시로 큰돈을 쓰기 싫었던 우리는 기꺼이 도로를 따라 걸어가면서 빌바오 외곽의 아름다운 시골길을 구경했다.
서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작은 마을 바끼오의 정류장은 여기저기서 온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루 종일 걷고 구경하느라 지쳤지만, 우리들만 아는 멋진 명소를 다녀왔다는 뿌듯함과 함께 오늘 나들이를 마무리했다.
10월 14일. 리카코와 함께 빌바오 북쪽의 Getxo 지구에 갔다.
가스텔루가체 나들이의 여독이 채 풀리기도 전에 게초라는 작은 마을로 떠났다. 빌바오에서 지하철을 타고 약 40분 정도면 도착하는 게초는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초 역에서 만나기로 한 리카코가 늦잠을 자는지 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내가 게초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전화를 받은 리카코. 시간을 보고는 깜짝 놀랐나 보다.
"ヤバい(망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정말 미안하다며 후닥닥 준비해서 나간단다. 천천히 오라고 리카코를 안심시키고는 혼자서 역 밖을 나서 근처를 돌아다녔다.
나도 시간 약속에 관대한 스페인의 생활방식에 물들었거나, 아니면 느긋하고 포근한 게초에서의 나들이 기분을 스스로 망치고 싶지 않았나 보다. 생각해보면 스페인 교환학생 이후로 매사에 더욱 여유를 가지고 낙관하는 태도가 굳어진 것 같다.
작은 공원을 지나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넓은 바닷가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는 쌀쌀해졌지만 햇살은 따듯한 맑은 날씨, 산책 나와 기분이 좋은 듯 잔디에 몸을 굴리는 강아지. 잠깐의 기분 좋은 답사를 마치고 리카코가 도착했다는 게초 역으로 다시 돌아갔다.
리카코는 카메라를 하나 가지고 있다. 'フムフム'라고 이름을 붙인 카메라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필터 렌즈가 끼워져 있어, 리카코가 찍은 사진은 특유의 쨍한 느낌이 있다.
사진을 잘 찍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이번 나들이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게초의 해안에는 수많은 요트와 카약이 놓여있어, 성수기에는 요트투어를 많이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착장 근처 푸드코트에서 간단하게 햄버거로 점심을 먹으면서 리카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나라에서 대학생활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역시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동아리나 대외활동이 이뤄지는 것 같았다. 특히 일본은 분야별로 동아리 커뮤니티가 규모도 크고 많이 활성화되어있어서,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꾸준히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 같았다.
부족한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어렴풋이 서로의 대학 생활과 그 이후 취업에 대한 고민까지 나눠 볼 수 있었다.
배가 가득한 선착장의 한편에는 작은 해변가도 있었다.
햇볕 덕분에 날은 따뜻해도 바닷물은 아주 차가웠다. 그런데도 파도를 맞으며 바다에 들어가 있는 몇몇 아저씨들을 보니, 발이라도 담가야겠다 생각이 들어 곧장 바닷가로 달려갔다.
해안을 따라 등대까지 이어지는 길에 작은 수족관이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리카코를 따라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보니, 나름 여러 가지 물고기들이 많아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산한 수족관 안에서 함께 유난을 떨며 사진을 찍고 나왔다.
수족관을 나와 하얀 등대 근처 바닷길을 걸었다. 해안가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화물선들과 컨테이너를 싣고 나르는 크레인들이 나름 현대적인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산책하는 중에 리카코와 서로 단어 알려주기 놀이(?)를 했다.
나는 중학생 시절 나루토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일본어를 배운지라 기초적인 단어 표현이 부족했다. 지금 기억나는 단어는 '선글라스를 끼다(スングラスをかける), 옷을 입다/벗다(ふくをきる/ぬぐ), 뜬금없지만 꽃보다 남자(花より男子)' 뿐이다. 나도 리카코에게 '해삼, 말미잘, 엉덩이, 개더워' 같은 한국말을 가르쳐주었다. 서로 생각나는 대로 알려준 단어라 연관성은 하나도 없지만, 나에게 언어교환은 항상 흥미로운 대화 주제다.
마지막으로 게초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디자인의 고택들을 구경하며 지하철역으로 돌아갔다.
예스러운 건축양식을 가진 집들 너머, 바다에서 바삐 움직이는 화물선들이 마을 안 신구의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