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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쭈 Jan 15. 2023

몸, 경계, 그림 그리고 납작한 것들

소나무를 키워 보겠다 마음먹은 것은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일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얼마 전 술을 먹다 친구에게, “돈을 좀 더 벌어 땅을 사 가지고는 거기다 소나무를 심을 거야.”라는 뜬금없는 선언을 했고 그는 처음엔 웃다 내가 꽤나 진지한 걸 눈치채곤 대답했다. “그래, 나도 이젠 말 없는 것들만 대하며 살고 싶다. 앞으로는...” 머리를 끊임없이 굴려야 하는 영업직의 내 친구는 다행히도 내 마음을 알아들었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슬며시 웃었다. 들킨 적 없던 친구의 고단함이 잠깐 비추었고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인 것 같아 소주만을 목으로 넘겼다. 뜨거워졌다.     


아버지는 올해로 22년째 소나무를 기르신다.



 2000년 2월. 그러니까 군 입영영장을 받아놓고 대전 고향집에 내려와 있을 때, 아버지는 잉여인간인 나를 노동 삼아 소나무 씨를 뿌리고 농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20년은 길러야 한다셨다. 관상용 소나무는 그 정도 수령은 돼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다며. 취미라 하기엔 규모가 꽤나 크고 그렇다고 직업이라기엔 당장 아무 소득도 없는 일을 벌이는 아버지의 도전이, 당시에는 귀찮을 뿐이었다. 추운 겨울 논산훈련소를 들어갈 생각을 하니 따뜻한 아랫목에만 틀여 박혀 있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군대를 들어갔고, 들어가서야 이건 내가 간 것이 아니라 끌려온 거구나 깨달았고, 이후 계속되는 이십여 년의 후회와 깨달음을 지나고 지나 오늘이 되었다. 내가 소나무를 기르겠다 다짐한 오늘이 돌아왔다.        


나는 부동산 감정평가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이 직업은 9할이 머리와 손가락으로 완결된다. 이 부동산에 과연 얼마의 가격을 책정해야 할지라는 고민은 결국 의뢰인이 원하는 가격과 향후 이 감정평가서가 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금액의 범위 안에서 수십 번을 저울질하다 머릿속에서 결정된다. 자격자라는 허울로 의뢰인의 욕망을 무심한 듯 가려주고는 떼어주는 돈을 받아먹는다. 결정되면 나머지는 손가락의 몫. 키보드를 두드린다. 한글파일 하나가 만들어지면 감정평가서를 출력하고 수수료가 결정된다. ‘이거 정말 쉽군.. 대동강 물을 팔아 돈을 쉽게 벌었다는 봉이 김선달도 그 많은 물을 이고 지고 했을 텐데 난 손가락만 굴리면 되니.’ 라며 이 일을 해온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돈을 쉽게(오직 내 기준에서,, 나보다 더 힘들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버는 건, 다행스럽고 편안한 일이나, 그러다 이렇게 어떤 날 죽는다면, 머리와 손가락이 아닌 나의 나머지 몸들은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만지고 느끼고 맡아보고 때론 어떤 거칠음에 깜짝 놀랄 과정들은 모두 사라진 채 주는 음식만을 받아먹는 내 몸.. 마비가 돼버린 몸.     


소나무의 몸은 거칠다. 껍질은 울퉁불퉁하여 좀처럼 쓰다듬을 수가 없다. 몸통도 구불거려 한아름 안아줄 수도 없다. 특히 산꼭대기나 능선에 홀로 자리를 잡은 소나무는 직선으로 자라지 않는다. 빽빽한 산속의 소나무들이 직선으로 자라는 건 좁은 공간 안에 서로가 경쟁하기 때문이다. 해를 받기 위해 수직으로만 올라간다. 그늘에 말라죽지 않기 위해. 그러나 밀도가 얇은 꼭대기나 능선에선 줄기들이 해를 따라 수평으로 넓게 퍼진다. 그렇게 퍼지다 중력에 부러지거나 바람에 꺾이면 방향을 틀어 길게 또 이어진다. 거기엔 자연스러운 역경이 있다. 경쟁도 없고 질투도 없는 곳. 아니면 말고 라며 구부러진다. 반면 분재는 인위적이다. 철사로 끈으로 몸통을 조이고 당긴다. 인간의 욕심과 고통. 구불거리는 소나무를 볼 때면 우린 그 세월에 숙연해질 뿐 힘들지 않다. 아프지 않다. 강요 없는 나무. 그래도 살아간다는 게 만만치는 않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나무. 말이 없는 나무. 색채 나는 꽃도 없이 화려해지길 포기한 나무. 


나도 저 산꼭대기의 소나무처럼 밀도가 옅은 삶을 살고 싶다. 우연찮게 내 삶의 경로가 구부러져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다 해도 그 모양이 좌절은 아니라는 여유 안에 살고 싶다. 그러나 그 여유에는 날카로운 침묵이 있다. 고요하고 단단한 소나무의 몸은 그 여유를 나태나 방종으로 흘려보내진 않는다.     


구부러진 소나무의 등어리는 살아있는 선을 만든다. 직선의 나무에선 볼 수 없는 경계의 굴곡. 소나무의 껍질과 외부의 공기가 만나는 그 경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움직인다. 그리고 다시 배열한다. 눈이 새롭게 떠진다. 현실의 공간감이 사라지고 한 장의 그림으로 변해있는 소나무. 판화처럼 박히는 선의 경계들. 놀라거나 숨이 막힐 때 찾아오는 느낌. 시리도록 새퍼런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등성이의 경계가 주는 비현실성.



그 선의 명료함은 우리의 시공간을 2차원으로 잡아당긴다. 살아있는 경계는 산과 하늘을 같은 평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경계라는 건 두 물체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이어 붙여 내는 것이다. 저 멀리 떠 있는 달과 무한한 우주의 공간을 경계로 이어 붙인다. 함께 있다는 안도감. 원근이 사라지고 오직 색채만이 뚜렷한 그 경계를 바라볼 때 풍경은, 시간이 멈춘 납작한 그림이 된다.      


그래서 르네상스, 원근법의 발견을 무슨 대단한 것인 냥 쇠내시킨 식자들에 나는 의문한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일상의 3차원을 그대로 베껴다 옮겨 놓은 원근법의 공간. 현실을 또다시 현실 속으로. 상상력이 사라지는 붓의 소리들. 그러나 식자들은 다시 반박한다. 원근법은 인간이 보는 방식을 온전하게 구현한 것, 그래서 인본주의의 이정표라고. 그동안 성경의 구절을 전하기 위한 그림만이 제작된 중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원근법은 수학이지 미학이 아니다. 단 하나의 소실점. 인간을 변하지 않는 '단안'의 주체로 규정하고 이것이 모든 대상에 적용되는 '보편적 시각'임을 가정한다. 하지만 인간은 카메라처럼 고정된 하나의 눈이 아닌 개인의 감정과 심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컬처리스트 정다경(아트인사이트)    


내 눈을 또다시 현실에 가두는 그림에 나는 취미가 없다. 인간의 눈을, 동물 전체도 아닌 고작 사람의 눈을 뒤 따라가는 기교의 결과물에 시간을 버리고 싶진 않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그림의 배경이 되는 단순한 선들 때문이다. 어수선하고 화려한 꽃잎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배경이 되는 벽과 테이블 그리고 화분을 이어 붙인 단순한 경계들 때문이다. 순수하게 평면이 되어버린 배경위로 아무것도 모르는 해바라기는 활활 타오른다. 평면 속의 공간. 2차원과 3차원이 뒤섞인 이상한 세계. 그 오묘한 느낌을 가끔씩 현실에서 마주칠 때, 내 눈에 잠깐 비칠 때,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공간을 차지하는 몸을 갖고 태어난 모든 것들에게 2차원은 상상의 세계이다. 그곳은 시간도 부피도 없는 비현실의 세계. 차지함이 없는 빛과 색과 소리만이 가득한 세계. 그러나 시간이 없는 그곳에서 과연 빛을 보고 소릴 들을 순간은 있는걸까. 상상하기 어려워 상상밖에 할 수 없는 그곳. 그래서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는 세상.      

그래도 나는 납작한 것들이 좋다. 아무리 납작해봐야 별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걸 보는 나는 잠깐이라도 멍해져 시간이 멈춘 듯 상상할 수 있으니 그걸로 족한다. 넘기는 책장, 공간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처럼 눈에 박히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좋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아도 이미 충만한 것들이 좋다. 공간을 차지해도 싸우지 않고 이어 붙인 경계가 좋다.     


구불거리는 소나무의 세월을 만지며 늙어가는 몸이 되고 싶다. 끊임없이 잔소음을 내는 머리는 잠시 내려놓고 너를 바라보고 싶다.     


그런 너를, 몸과 몸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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