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믿는 나이건만, 아침에 눈뜨자마자 들른 욕실에서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출산 후 두 달 가까이 매일 한 움큼씩 빠졌던 머리카락의 빈자리를 멜라닌 색소를 잃은 힘없는 녀석들이 채워가고 있는 게 아닌가.
예전 같았으면 흰머리카락은 잡초 대하듯 인정사정없이 뽑아버렸을 텐데 이젠 그러지도 못한다. 뽑고 나면 다시는 안 나올까 봐서.
'빳빳한 까마귀 털이 아니고 연약한 백로의 털이면 뭐 어떤가,탈모 부위 휑하지 않게 메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거울을 뒤로한다.
"생일 축하해!"
"올해도 스물아홉 살이지?"
"응, 맞아. 내 마음속 내 나이는 늘 스물아홉이야!"
남편과 시댁 식구들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인사와 농담 섞인 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처음으로 시댁에서 맞는 내 생일에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시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한 케이크가 오븐 안에서 달콤한 향기를 뽐낸다.
처음이다. 수제 케이크가 식탁 테이블 중앙을 따뜻하게 장식한 생일상이 그리고 이렇게 많은 어르신들이 한자리에서 축하해주시는 생일날이.
"저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몇 해 전 너희 시할머니 장례식에서 우리 만났었잖아. 당연히 기억하지!"
혹시나 나를 기억 못 하시면 내 소개를 다시 해야겠다 싶어서 여쭤봤더니, 1915년생인 아이린(Irene) 할머니는 역시나 나를 기억하신다.
남편의 증조할아버지의 비서로 일을시작하시고 할아버지의 비서 역할까지 훌륭하게 수행하신 아이린 할머니는 남편 가족의 살아있는 역사책 같은 분이다.
그런 분을 시어머니가 깜짝 게스트로 초대하셨고, 흔쾌히 초대에 응해주신 할머니는 직접 운전해서 오셨다.
지난번 뵈었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시다.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빛과 백과사전을 읽어내시는 듯한 기억력, 그리고 대화를 이끄는 순발력까지.
아이린 할머니가 굳이 숫자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감히 짐작하지 못할 그녀의 나이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를 할머니가 들려주셨다.
최근에 참석했던 어느 모임에서 만난 귀여운 꼬마와의 짧은 대화.
아이린 할머니: 꼬마야~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너 나이가 어떻게 되니?
꼬마: 저는아홉살인데, 할머니는 몇 살이에요?
아이린 할머니:호호호~~ 나는 백 다섯 살이란다.
할머니의 나이를 들은 아이가 잠시 손을 꼽아보며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되묻더란다.
"아직까지 살고 있어요?"
1915년생(오른쪽 분), 1935년생, 1955년생 어머니들. 세분은 친구다. 적게는 스무 살, 많게는 마흔 살 차이가 나는 친구.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게 맞다.
여덟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세계 1,2차 대전을 직접 눈으로 본 아이린 할머니는 여전히 잘 살고 계신다. 직접 운전을 해서 마트에 가 장을 보고, 요리와 청소도 혼자 힘으로 척척해내신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할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씀하시는 그녀를 보며, 아침부터 흰머리가 어쩌고 저쩌고 했던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알츠하이머 분야의 명의 데이비드 스노든
(Dr. David Snowdon)이 678명의 수녀님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쓴 책,
<Aging with Grace: 품위 있게 나이 들기>에는희망을 위한 처방전이라는 수식어가따라붙는다.
적게는 74세부터 많게는 106세인 수녀님들의 휴먼스토리를 통해 이 책은 말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질병과행동의 제약이 야기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힘과 노련미를 통해 진정으로 우아한 시간을 맞이할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피할 수 없고사양하려고 해도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것이 나이인데,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삶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흐를 수 있음을 배운 마흔 번째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