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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Jun 19. 2020

큰언니의 메밀전병

(feat. 남편의 메밀디야)

 일주일간 짧게 한국에 다녀온 남편을 따라 바르셀로나로 날아온 24인치 캐리어 안은 아기용품들로 꽉 차있었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내온 치지베베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다 가방 귀퉁이 바닥에 숨죽인 듯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가루를 발견했다. 여러 겹의 비닐팩으로 꽁꽁 싸인 거무튀튀한 색깔의 가루 위에 투박하게 쓰인 네 글자.

메밀가루.

눈물샘이 파르르 떨리며 시야가 흐려졌다. 이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얼굴, 나의 큰언니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주던 따뜻한 메밀전병.


뭉근한 화덕불 위에 뒤집어 얹은 평평한 솥뚜껑이 적당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른 주먹 크기만 한 무를 반으로 뚝 잘라서 밑동 양 옆부분을 살짝 베어내어 손잡이로 만든 도구로 사기그릇에 사이좋게 반반 담긴 식용유와 들기름을 휘휘 저어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재빠르게 솥뚜껑 위로 옮겨 두르는 큰언니의 손놀림에서 능숙함이 느껴졌다. 큼지막한 스테인리스 양푼에서 약간은 묽은 듯하게 주르륵 흐르는 메밀 반죽을 한 국자 크게 떠서 솥뚜껑 위에 길쭉한 타원형이 되게 가장자리부터 모양을 잡아 부어준 후 남은 반죽을 중앙에 털어 붓고 숟가락으로 살살 펴면서 안쪽에 골고루 채워주었다. 뚜껑에 닿은 회백색의 반죽이 금세 진회색으로 피부색을 바꾸니, 오른손으로는 뒤집개를 전 밑으로 쑤욱 찔러 넣고 왼손으로는 얇은 전이 찢어지지 않게 전을 살짝 받쳐주며 빠르게 뒤집었다. 이어 미리 준비해둔 전병 소를 손으로 꾹꾹 눌러 뭉쳐서 잘 구워진 메밀전 위에 김밥 재료 채우듯 올린 후 돌돌 말아주었다.


메밀전병 하나가 완성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분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진 윤기 자르르 흐르는 음식 앞에서 코흘리개 어린이였 나는 군침을 흘리며 슈렉 고양이로 빙의한 듯 간절한 눈빛으로 언니를 보았다. 그러면 국자로 향하던 언니의 손은 멈칫하며 방금 막 만들어진 메밀전병의 꽁다리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귀퉁이 한 부분을 조금 떼서 입김으로 호호 불어 식힌 후 내 입에 쏘옥 넣어주던 언니의 그  따뜻했던 손끝의 맛.


'혓바닥을 부드럽게 감싸는 메밀전의 쫀득함과 메밀 특유의 구수한 향이 기분 좋게 입안 가득 퍼지자, 이어서 전 안에 숨어있던 쫑쫑 다져진 배추김치와 얼청 갓김치의 아삭하게 알싸한 맛이 침샘을 마구마구 자극했다. 김치들 사이에 박혀있던 통들깨가 씹힐 때 나는 경쾌한 톡톡톡 소리에 오감은 충만했다... '

여덟 살의 내가 이런 깊고 진한 맛을 알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너무나 편안해 보였던 그날의 언니 모습을 나는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요리에 몰입하며 행복해하던 스물한 살, 딱 그 나이다운 언니의 모습을 나는 그때 처음 보았던 것 같다.


메밀을 닮은 큰언니의 삶이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2~3개월이면 다 자라는 강한 메밀처럼 나의 큰언니는 일찍 영근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녀가 열세 살이 되던 해인 1980년에 이미 밥을 짓고, 일곱째를 낳은 엄마를 위해 미역국을 끓였다. 출산 직후에 그전부터 앓고 있던 류마티스 관절염의 증세가 악화된 엄마는 갓난쟁이를 큰딸에게 맡긴 채 세 살배기 아들만 데리고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집안일과 육아 거기에 아버지의 농사일까지 도우며 그렇게 큰언니는 또래 친구들이 초등학교에서 글을 배울 때, 강원도 두메산골 집에서 인생을 배웠다. 

줄기 끝에 여러 송이가 순차적으로 무리 지어 피는 메밀꽃처럼 언니 등 뒤에 줄줄이 매달려있던 동생들 때문에 무척이나 삶이 버거웠을 텐데, 언니는 기후를 탓하지 않는 메밀과 같이 본인이 타고난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태풍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메밀처럼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동생들을 키워냈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순리대로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이었으리라. 언니만큼이나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후의 언니의 은 아주 편안하고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다. 언니가 처녀시절에는 가을걷이가 다 끝난 겨울에만 만들어 먹던 메밀전병을 이제는 아무 때나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언니 집에 동생들이 놀러 올 때면 늘 빠지지 않고 식탁 위에 오르는 단골 메뉴가 메밀전병이다. 여전히 기분 좋게 입맛 돋우는 그 음식을 먹으면서, 그래도 가끔은 목이 멘다는 나의 큰언니. 그 옛날 메밀 맛이 뭔지도 모르면서 침까지 흘려가며 맛나게 먹던, 지금은 너무 먼 곳에 살고 있는 막내 생각에...



그 옛날 화덕이 있던 자리에 이제는 휴대용 가스버너가 놓여있지만 여전히 맛깔스러운 언니의 메밀전병. 전병을 말기 귀찮을때 후다닥 만들어내는 백김치 메밀전, 그리고 나의 큰언니.



 인덕션 앞에 서서 요리하는 남편의 어깨 위에 긴장감이 올라타 있었다. 얼마나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내가 뒤에 와 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실망감이 섞인 짧은 탄식과 함께 프라이팬에서 갓 완성된 음식을 접시로 옮기고 나서야 남편은 나를 돌아보았다.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한 남편의 손에는 메밀가루 옷을 입은 퀘사디야의 모습을 한 음식이 들려 있었다. 대학생 때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한 경력을 가진 남편에게도 메밀전병은 쉬운 요리가 아니었나 보다.


"큰 처형이 해준 것처럼 예쁜 메밀전병을 만들어서 육아에 지친 당신에게 큰 기쁨을 주고 싶었는데 메밀전이 너무 뜨거워서 돌돌 마는 것에 실패했어. 그래서 어차피 망친 것 그냥 내 방식대로 하자 싶어서 반으로 접어버렸어." 남편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인이 아닌 남편이 요리한 한식은 어차피 퓨전이 아니던가?!

남편표 메밀디야(메밀전병+퀘사디야)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고향의 맛, 가족의 사랑 맛.

이 맛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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