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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06. 2020

누구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누가복음 21장 5-19절

좋으신 하나님의 평화가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먼 곳에 흩어져 함께 걷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곧 2020년입니다. 끔찍하죠. 저는 좀 끔찍합니다. 다른 때도 싫기는 했지만 2020이라는 숫자가 유독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더 낯설게 느껴집니다. 할 수만 있다면 멀리 밀어내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 ‘2020 원더키드’라는 TV만화를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멸망한 우주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나쁜 기계가 싸우는 내용이었습니다. ‘종말’에 관한 내용이었던 거죠. 그 TV만화뿐만 아니라 많이들 그런 세계를 상상했나 봅니다. 날아다니는 차는 물론이고, 기계에게 인간의 자리를 빼앗겨버린 황폐한 세계를 말입니다. 하지만 2020년이 수십 일도 남지 않은 지금, 날아다니는 차는 ‘아직’인 것 같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주가 멸망할 기미는 보이지는 않습니다. 종말은 오지 않는 걸까요. 온다면 어떻게 올까요. 운석 충돌일까요. 전쟁으로 인한 핵폭발은요. 급격한 기후변화 때문은 아닐까요. 기계와의 전쟁은 어떤가요. 그 모든 게 다 아니라면, 느닷없는 예수님의 재림이 정답인 걸까요.   

기독교 신학은 ‘종말’에 관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두 글자만으로도 묵직한 인상을 주는 ‘종말’이라는 말은 ‘끝날 종’과 ‘끝 말’이 합해진 단어입니다. 그야말로 ‘최종 끝’을 가리키는 말 인거죠.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재림과 맞물려 중요한 교리가 된 언어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천국과 부활도 같이 얽혀서 뒤죽박죽이 된 교리이기도 하죠.

종말은 비단 기독교만의 교리는 아닙니다. 온갖 사이비 집단부터해서 종말에 관심하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종교뿐이겠습니까. 종말은 영화에 계속해서 소환되는 소재이고, 그와는 반대편인 것 같은 과학 역시 끊임없이 우주의 끝에 관심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종말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물론 그것에 관해 잘 말하지는 않지만요.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관심사입니다.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하는 흥미로운 주제이면서도, 그때가 곧 올 거라고는, 정작 자신에게 올 거라고는 사실상 누구도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이렇듯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나와는 별 상관없는 주제가 바로 종말입니다. 마치 우리 사이가 갖는 모순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종말에 관해 얼마나 관심하고 계신지요.




본문은 ‘종말’에 관해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흔히들 본문을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 중 하나로 하나로 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문에는 ‘때와 징조’를 묻는 사람들이 있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본문은 종말에 관한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본문은 몇몇 사람들의 성전 예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5몇몇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꾸며 놓았다고 말들을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몇몇 사람들이 동의를 구하듯 말을 던집니다. 풀어 말하자면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겁니다. “눈물 어린 희생과 뜻을 다한 헌금, 피와 땀이 어린 수고와 노고로 아름답게 쌓아 올린 하나님의 집을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어떻게 배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죠? 그렇죠?” 마치 우리가 좋은 음악을 듣거나 멋진 경치를 구경했을 때, 옆 사람에게 공감을 강요하듯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의 성전 예찬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6"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개도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날이  것이다."”

‘성전이 아름답지 않냐’고 공감을 요청하는 말에 예수님은 ‘망할 거다. 전부 무너질 거다.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라고 답합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대답이죠. 말을 꺼낸 상대방은 얼마나 멋쩍었을까요. 동의하기 싫다면, ‘글쎄. 난 별론데’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 예수님은 악에 받친 듯 저주를 퍼붓습니다. 거의 성전 모독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이 짧은 대화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될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본문에 포함하지 않은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도 함께 읽겠습니다.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돈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3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많이 넣었다. 4 사람들은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두 렙돈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헌금에 관한 설교에서 자주 쓰이는 본문이죠. 가진 전부를 정성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권장할 때 주로 사용하는 본문입니다. 방금 읽은 내용만 보면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그려내는 장면과, 오늘 본문이 그리는 장면을 함께 생각해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두 렙돈 헌금’에 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어서 더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무슨 이유에서든 성전에 배치된 헌금함에 자기 전 재산을 털어 넣는 홀로 된 여인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바로 뒤이은 본문에는 그런 헌금으로 지은 성전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장면을 함께 그려보면 어떤가요. 괴랄하다는 표현이 저는 떠오릅니다. 묘하게 불편하죠. 연속된 두 장면은 어딘가 뒤틀린 배열입니다. 누가는 틀림없이 두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붙여놓았을 겁니다. 그는 성전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우며 거룩한지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빼앗는 성전’에 관해 말합니다.

증거는 더 있습니다. ‘두 렙돈 헌금’ 이야기 바로 앞에 있는 20장 끝 절에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지도자들을 향한 비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렙돈을 헌금하는 홀로 된 여인’의 이야기는 그 비판의 예인 겁니다. 그러니 두 렙돈 이야기가 정성이나 헌금을 권장하는 내용일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헌금을 권장하는 내용으로 읽는다면, 서글프지만 자기 얼굴에 제대로 침을 내뱉는 겁니다.

돌아와서, 어딘지 지나쳐 보이는 예수님의 반응은 그 이야기에 대한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아름답지 않느냐는 속없는 순수함에, 그 순수한 악함에 분노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성전은 반드시 무너질 거라고, 산산조각이 나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산산조각 나야 할, 크고 아름다운 성전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수고와 눈물을 바닥에 깔아놓고, 타인의 피를 제물로 삼은 다음,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의 신화로 자신을 포장한 성전은 무엇일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우선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성전이 무너질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본문 주제는 바뀝니다. 성전은 무너져야 하지만, 유대 사람들에게 그것은 끝을 뜻했습니다. 성전 멸망은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문제였을 겁니다. 성전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니까요. 성전이 건재해야 자신들의 삶이 확인되니까요. 성전이 멀쩡한 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인생을 인증받는 겁니다. 성전은 자기 확인, 곧 정체성 문제입니다. 그게 무너지면 끝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면 자신들의 믿음도 삶도 다 박살 나는 겁니다. 성전 없이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까요. 무엇으로 자신들과 사마리아를 구분할까요. 메시야가 온다한들 무엇을 중심으로 왕국을 선언할까요. 구원은 이제 어디에서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유대 사람들에게 성전 멸망은 그야말로 끝 더하기 끝입니다. 만에 하나 성전이 무너진다면 자신들은 ‘끝’에 서게 되는 겁니다.

어느새 질문하는 주체가 제자들로 바뀝니다. 제자들은 때와 징조를 묻습니다. 종말에 관한 단골 물음이죠.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긴 답변을 들려줍니다. 전쟁부터 시작해서, 지진과 굶주림, 질병 등 여러 얘기를 합니다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땐 아직 종말이 아니라고 말씀하니까요.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마나 한 얘깁니다. 그런 게 없던 때는 없었으니까요. 누구 하나라도 전쟁, 굶주림, 기후변화, 질병 등이 지구 상에 없던 때를 밝혀낼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읽다 보면 결국 예수님이 강조하는 건 핍박이나 박해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보면 끌려 다니며 매 맞을 거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살해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참고 견뎌라 그러면 생명을 얻을 거다. 사실상 이게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래 놓고 그 앞에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18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입니다. 방금 전까지 박해받을 거라고,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매 맞고 버림받고 미움받을 거라고 말해놓고, 머리카락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거라고 말해놓고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거라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본문을 오늘에 적용해도 얼토당토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든, 결은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든, 머리카락 하나는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개 뻥입니다. 두들겨 맞았다는 소리를, 미움받고 버림받았다는 소식을, 누군가 목숨을 또 잃었다는 비보를, 우리는 지치도록 듣고 있으니까요.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이라는 정념 가득한 목청에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겠지만, 저처럼 못된 인간은 무슨 개소리냐며 비웃을 게 뻔합니다. 어디 가서 저는 그런 말을 확신에 차서 내뱉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본문은 전체적으로 이상합니다. 분명히 성전 멸망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왜 종말일까요.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기껏해야 코딱지만 한 성전 하나 무너지는 건데 그걸 종말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걸까요. 이 본문이 정말 전우주적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제가 보기에 오늘 본문은 우주적 종말에 관심이 없습니다. 본문을 마지막 때와 관련시켜 읽기 좋아하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분명히 성전 멸망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끝에 관해 말할 수 없는 걸까요. 본문은 왜 ‘종말’ 혹은 ‘끝’으로 번역되는 말을 언급했을까요. 끝에 처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성전은 멸망합니다. 요세푸스라는 유대 역사가에 따르면, 주후 70년쯤 로마는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박살 냅니다. 빼앗고 부수고 불 지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실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 누가복음은 부활을 이미 알고 있는 증인들이 쓴 책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성전의 멸망 역시 경험했을 거라고 대다수 학자들은 언급합니다. 그 말이 옳다고 합시다. 유대인들에게는 심장과도 같았던 성전마저 박살난 마당에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게 누가 공동체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들은 무엇에 기대어 서 있었을까요. 무엇에 의존했을까요. 딛고 있던 땅이 사라진 것 같은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감각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요. 때로는 로마인에게 끌려가 매 맞고, 때로는 유대인에게 미움받았던 그들의 삶이 날마다 종말과도 같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까운 친구에게 미움 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으며, 끌려갔던 동료가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끝에 선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지는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신앙했던 공동체가 자신들의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끝이라는 선이 있다면 대부분 거기 서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집을 사고, 돈을 모으고, 보험에 듭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가지고 있는 걸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뒤로 물러설 곳 없는 끝에 서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뒤는 낭떠러지니까요. 성경도 거기에 서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만 우리는 인간을 끝으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번 수능에 또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의 판단이야 어떻든 뒤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홍콩에서는 또 어느 고등학생이 실탄에 맞았습니다.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 몇은 자꾸만 잡혀가고, 또 몇은 시신이 되어 물에서 떠오릅니다. 그러면서도 시위를 계속합니다. 내 머리카락도 상하게 해 보라는 듯이 말입니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죽은 김용균님의 어머니는 11개월 만에 사망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식의 엄마로서 서게 된 끝이 있었을 겁니다. 제 주변 한 성소수자는, 쾌락에 미쳐있을 거라는 무책임한 기독교의 비난과는 다르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인만 10명에 달합니다. 어떻게 끝에 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금도 끝은 있고 거기에 선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중 있을지도 모르죠. 그들은 이미 종말을 삽니다.

그렇다면, 머리카락 얘기는 더 이상 끝에 선 사람들이 더 이상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교회의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예언이 아니라, 더 이상 누구도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끝에 서 있고, 이미 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신앙하던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의 종말 신앙이란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자신들이 날마다 끝을 걸으면서도, 다음에 믿는 이들은 누구도,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한편, 종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그것과는 무관한 듯 사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제가 속한 동네 욕 좀 하겠습니다. 목사들에게도 연금제도가 있습니다.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퇴직하고 나면 답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근데 그걸 관리하는 단체가 무슨 짓을 했는지 큰돈을 날려먹었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알겠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2년 전 총회에서 연금법을 바꿨습니다. 전부 엉망진창이지만 이것도 볼만합니다. 목사들이 계속 목사를 하려면 3년마다 연임 청원을 해야 합니다. 이건 서류만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얼마 전부터 매년 6개월 연속으로 연금을 내지 않으면 연임을 안 해주기로 법을 바꾼 겁니다. 연금 중 제일 싼 게 매월 10만 원 정도 합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만만치 않죠. 근데 저 같은 사람이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많습니다. 매년 60만 원 정도를 꾸준하게 내야 하니까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중간에 연금을 탈퇴하면 안 돌려준다는 겁니다. 좀 심한 말 좀 하겠습니다. 이런 걸 60살쯤 된 남성 목사들이 잔뜩 모여서 총회법이라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그 혜택은 자신들이 받으니까요. 그들은 그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끝을 자신들이 만든다는 것도, 후배들을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도, 성소수자를 죽음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종말을 믿지만, 지금 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종말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들의 끝만을 바라보고 거기 가지 않기 위해서만 남을 이용합니다. 아멘 아멘 하며 ‘나만 아니면 된다.’고 외칩니다. 그런 이들은 타인을 끝으로 내몹니다. 그들은 참지도 견디지도 않습니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목숨을 상하게 합니다.  

반면, 누가 공동체처럼 끝에 선 이들과 함께 서자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누구의 머리카락도 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누군가가 쓴 글의 일부를 읽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총에 맞은 청년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진 속의 청년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홍콩에서 다치고 죽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삶을 우연히 겪는 불행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죽은  아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냥 희생자들이 아니라 불의에 맞선 용감한 저항자들이다.

국제도시 홍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홍콩은 우리에게 이제  일은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어디서라도 일어날  있다고 말해주는  같다.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장전된 앞에서 날마다 살아간다.

내게 경찰의 폭력보다  놀라운 것은 폭력에 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저런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나는 오늘도 묻고 있다. 당신은  거기 있으며,  나왔으며,  도망가지 않으며,  잡혀가는 친구를 구하려고 달려가는지, 어떤 사람들은 괴물이 되어도 마땅한 조건 속에서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가는지.

어제, 오래 멈춰서 보았다.  사진을. 자신이 살아온 세계서 일어나고 있는  믿을  없는 일들을 보게  사람, 알게  사람, 묻게  사람의 .   속에 비치고 있을 세상을. 그의 눈으로 함께 바라봤으면 한다.”



2019년 11월 7일 [함께.걷는.교회.] 설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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