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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an 14. 2020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타인의 고통>, 수잔 손택

사진은 어렵다. 스마트폰에 장착된 카메라가 제아무리 뛰어나도, 사진을  찍지도  찍히지도 못하는 내게 사진은 손에 붙지 않고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못된 애물단지다.  뜻대로 결코 어쩌지 못하는 타인의 마음 같거나. 자연히 카메라와는 물론이고 사진 예술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대부분의 사진은 내게 기록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연히 사진에 관해서라면 무엇에든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졸지에 사진을 다룬  한 권을 읽게 됐다.
 
『타인의 고통』은 사진을 다룬다. ‘타인 ‘고통이라는, 무겁기 그지없는  주제를 하나로 묶은 『타인의 고통』은, 엉뚱하게도 사진에 관한 책이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선정적인  주제 타인과 고통을 수잔 손택은 어떻게 다룰까. 사진과 타인, 고통과 사진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미 30  전에 『사진에 관하여』에서 짙은 문체로 사진의 윤리를 다룬 적이 있는 수잔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 『해석에 반대하여』 등으로 명성이 자자한 문화 평론가이다. 하지만 수잔 손택을  솜씨 좋은 날카로운 지식인으로만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세계의 관심을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사라예보 내전 현장으로 가서 연극을 상영하거나, 1988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구속 중인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는 등의 이력을 지닌 손택은 ‘열렬한 실천가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덧붙여 () 9·11 테러 이후 애도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물결이 미국을 뒤덮었던 시기에도, 자국인 미국을 향해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필요하다면 네 편과 내편을 나누지 않고 어느 방향을 향해서든 활시위를 당기는 비평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타인의 고통』 역시 미국을 위시한 소위 1세계 국가들,  울타리 안에서 우아하고 고상한 ‘우리 지켜내려고 2·3세계를 필요로 하는 어떤 이들을 향해 날린 화살 인지도 모른다.  

(수잔 손택, 1933~ )

『타인의 고통』은 ‘우리라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그것은 누구를 뜻하는가. 수잔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에서 던진 ‘우리 관한 물음을 소환한다. 3기니』는  남성 변호사가 버지니아 울프에게 던진 ‘당신의 견해로는 우리가 전쟁을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때늦은 답장이라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과  사이에는 진솔한 대화가 오고갈  없다”(19)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3기니』를 시작한다. 남성인 그와 여성인 자신이 전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전혀 다를  분명하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3기니』 전체를 통해 ‘우리라는 말에 몰두하는데, 바로  지점에서 수잔 손택은 논의를 시작한다.  

당면한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된다.  충격적인 사진들을 보고 있는 ‘우리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라는 말은 약소국이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는 국가 없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타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열한 전쟁에 명목상 관심을 보이는 척하는 사람들(훨씬  수가 많은 유권자들) 포함하는 경향이 있다.”(23)    

손택은 사진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라는 문제에 접근한다. 그런데  사진일까. 텔레비전, 영화, 스트리밍    없이 밀려드는 이미지들 중에서도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라고 () 말한다. 이것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주장이다.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여러 매체들  사진기술이 가장 근대적이지 않은가. 뉴스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선정적인 영상이나, 수천억을 들인 영화가 보여주는 스펙터클을 사진이 어떻게 이길  있다는 말인가.  

수잔 손택은 사진이 기술이 갖는 사실성(reality) 고정성에 주목한다. 사진은 쏘고(shot, 손택은 이미 『사진에 관하여』에서 ‘shot’ 총을 쏘다와 같다는 점에 주목한다) 붙잡는다. 또한 치열한 경합 끝에 선택받아 대중에게 전해지는 전쟁 사진들은 우연성을 담보로 한다. 우연과 사실이 결합된 사진은 새로우면서도 강한 신뢰(이를테면 사진 이전의 그림과는 다른) 사람들의 뇌리에 심는다. 사진은 하나의 이미지를 항구적으로 만든다. 찰나를 붙잡는 기술이 빚어낸 항구적인 이미지는 개인의 시선을 통해 각인된다.

그렇다면 각인된 이미지는 진실인가. 뇌리에 뿌리내린 이미지는 사진  장면을 충분히 설명해주는가. 고정되고 붙잡힌  장의 사진은 그것을 보는 ‘우리 향해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보는 ‘우리 피사체에게서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가. 사진을 찍고 사진에 찍힐 ,  장의 사진이 전시되고 전시된 그것을 관람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보다 사진을 보는 시선의 주인공들은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사진 일반론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건 책의 관심이 아니다. 손택은 사진이 네모난 프레임에 담아내는 타인의 고통,  중에서도 전쟁과 관련한 고통에 주목한다.

전쟁을 사진에 담으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폐허와 잔해, 널브러진 시신들,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발가벗고 도망쳐 나오는 어린 소녀의 현장감 넘치는 어떤 장면, 화학무기 때문에 일그러져버린 얼굴의 피부 등을 통해서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리고자 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손택은 고통을 담은 사진의 여러 측면을 다룬다. 전쟁의 현장에 사진 기자를 출입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진의 리얼리즘을 통제하는 국가의 의도에 대해서(그렇다면 전쟁에 관해 대중들이 봐왔던 이미지는 뭐란 말인가. 전쟁의 현실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사진을 사실로 받아들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대중들이 별다른 고민 없이 현실로 받아들이는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 작가들에 의해서 어떻게 연출되고 구성되는지에 관하여(우연히 찍힌 사진이라고 믿었던 엄청난 ‘작품들이 가짜였단 말인가), 고통이 드러나는 참혹한 현장을 끔찍해하면서도 동시에 매혹당하는 관음증적인 시선과  역사에 관해서(참혹한 사진을 보는 까닭이 전쟁이 가져오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인가), 자국민 시신의 얼굴은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려 깊고 윤리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죽음을 눈앞에  캄보디아 시민의 얼굴은 무감각하게 내보이면서 익명으로 처리해버리는 1세계 작가들의 의식에 대해서(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을 당하게 되면  사람은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30) 말했다. 손택에게 폭력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익명으로 처리한  shot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세계  지역에서 일어나는 생생하면서도 각기 다른 고통을, 제아무리 선한 의도라고 해도 동일한 아픔으로 만들어버리는 전시에 관해서(“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뭔가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여 지기를 원한다.”(162)), 고통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심미적인 이미지로 생산하는 사진에 대하여(‘천재 따로 있고 자신은   없다고 쉽게 믿어버리는 것만큼, 사진  ‘그들 고통 또한 ‘우리 어쩌지 못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무력감을, 이미지는 만들어 낸다. 고통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 없다) 등을 손택은 말한다.

우리 누구인가. 이미지  고통을 응시하는 우리다. ‘그들 아닌 채로 사진을 응시하는 시선들의 집합이다. ‘우리 연대하지만 ‘우리 묶어주는 것은 우리가 사진  ‘그들 아니라는 안도감이다. 연민과 무력감, 그리고 안도함으로 묶인 우리는 단지 타인인 존재를 타자로 만들어 버린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있는  무엇으로 변형시켜 버린다.”(125)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들을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154)

그렇다면 전쟁을 실어 나르는 모든 사진은 나쁜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수잔 손택은 사진이 갖는 긍정적인 기능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사진은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고(미국 국민은 자신들의 예상과는 크게 달랐던 전쟁의 실상이 찍힌 사진 때문에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기 시작했다), 과거를 ‘기억하는데 유용하기도 하다. 손택은 흔히 ‘기억이라 부를만한 성질의 것을 매만져 진술하기도 한다.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며 재현될 수도 없다. 기억이란 것은  기억을 갖고 있는 개개의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 우리가 집단적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기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약정이다. ,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이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라고 우리의 정신 속에 꼭꼭 챙겨두는 것이다.”(131)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전쟁 사진의 장점과 단점을 5:5 정도로 고르게 서술한 책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를테면, ‘사진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진술인가 보군?’ 하고 읽다가도 어느새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문장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기억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 이해와 기억이 퇴색된다.  ...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135)

독자들은 책의 논지가 불분명하다고 느끼기 쉽다. 분명히 문장도, 내용도 어렵지 않은데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느 순간 헷갈린다. 어쩌라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쉽고 분명한 도착점으로 독자들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사진이 얼마나 나쁜지를 설명하거나, 1세계 국가들을 비난하는 데만 책의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 삽입된 여러 사진과 그림, 넓은 행간을 지닌 손택의 문장들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사진  지옥을 어디에서 보고 있는지, 사진을 응시하는 당신의 시선이 당신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일독뿐 아니라 여러  읽기를 권한다.



서평30. 타인의 고통/수잔 손택/이후/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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