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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Mar 25. 2020

어떻게 닿아야 할까

<컨테이젼>

얼마 전 옆자리에서 오고 간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다. 주제는 코로나19였다. 바이러스가 어디서 비롯했는지에 관한 짧고 가벼운 대화였는데,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은 인간이 원인이라고 말했고, 다른 한 사람은 야생 동물이 발원지라는 뉴스를 근거로 앞사람의 말을 부정했다. 나는 끼어들어 그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말하는 야생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세계냐고.
 
코로나19로 다시 관심을 얻은 영화 한 편이 있다. 바이러스 감염을 다룬 <컨테이젼>이 그것이다. 2011년 개봉작인 <컨테이젼>은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 플루 사태에 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국내에는 <오션스> 시리즈로도 잘 알려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작품성과 사실성 등 여러 면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감염(contagion)을 뜻하는 <컨테이젼>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2015년 메르스 사태나 현재 코로나19 등의 상황마다 소환되는 대표적인 재난 영화다.

영화는 감염 2일째 장면에서 시작한다. 출장차 홍콩에 다녀온 여인이 애인인 듯한 상대와 통화 중인 장면이 영화의 도입이다. 화면은 곧 그의 손이 닿은 물건을, 그 물건을 만진 다른 누군가의 손을, 그의 손이 접촉한 다른 사물을 차례로 비춘다. 영화를 관람하던 이들은 곧 안다. 통화 중인 여인이 숙주이고, 바이러스가 빠르게 퍼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왜 1일째가 아니라 2일째가 첫 장면일까. 첫 장면은 은근한 물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영화가 어디로 향할지를 넌지시 일러주며 다음 장면으로 향한다.
 
<컨테이젼>은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다룬다. 급속도로 확산하는 바이러스와 그것을 막으려는 정부와 국제기구, 혼돈에 빠진 사회와 무너진 개인의 일상 등을 영화는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과학적인 고증 면에서도 영화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컨테이젼>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영화는 바이러스에 맞서는 세 명의 여성 전문가를 조명한다.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를 차단하려고 발로 뛰어다니는 역학 조사관(케이트 윈슬렛), 최초 발병경로를 파악하려는 WHO 파견원(마리옹 꼬띠아르),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밤낮없이 애쓰는 연구원(제니퍼 엘)이 그들이다. 영화가 후반으로 향하면서 그들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다, 역학 조사관은 바이러스 감염되어 죽음을 맞고, WHO 파견원은 홍콩에서 납치당해 작은 마을에 억류되며, 연구원은 백신을 자신에게 투여해 성공 여부를 확신한다.
 
영화는 그들을 유별난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영웅이나 희생양으로 재현하지 않는다. 처연한 음악과 아련한 연기를 맞물려 눈물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다소 밋밋할 정도로 영화는, 그들의 대응을 담담히 기록한다. 그들이 겪는 납치나 죽음, 선택적 희생도 유난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인 그들을 카메라는 응시하듯 담아낸다. 바이러스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각각의 개인을.

영화 관람을 마친 후 세 인물을 다시 곱씹게 하는 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맞이하는 무명의 인터넷 기자(주드 로)다. 특종에 목말라하면서도 인쇄 언론은 사라질 거라고 믿는 그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인물이다. 바이러스가 터지자 그는 우연히 발견한 사망자의 동영상을 발판 삼아, 바이러스에 관한 불분명한 정보들을 블로그에 실어 나른다. 바이러스에 대한 대처 방안을 정부가 알면서도 제약회사와 짜고 시민을 외면한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로, 그는 개나리꽃에서 추출한 액을 제시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 급기야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얼굴로 개나리꽃 추출액을 직접 시음하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린다. 결과는 물론 좋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듯 그는 바이러스에 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의 관심은 진실이 아니다. 정부를 향한 의심과 개나리꽃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이라는 숙주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다. 한 데 뒤엉킨 불신과 정보(말)와 거짓 희망은 사회를 감염(contagion)시킨다.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다.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불안에 감염된 시대에, 그는 마법처럼 희망을 제시해서 확신과 치유를 제공하고, 정부를 타자로 세운다. 스쳐 가는 화면이 보여주듯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로 칭송하지만, 그것은 필요에 의한 맹신일 뿐이다. 자신 역시도 예언자가 된 자신을 신앙한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이다. 정면으로 바이러스를 마주한 세 여성과 달리 그는 현실을 삭제하고 자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또 다른 감염원이 된다. 그는 바이러스로 인해 벌어진 틈에 침입해서 똬리를 트는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컨테이젼>은 바이러스로 인한 종말론적인 상황을 보여주거나, 현실에 가까운 묘사를 통해 경각심을 일으키는 게 주요한 목적이 아닌지도 모른다. 영화는 개인에 주목한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등장인물끼리 전혀 연결하지 않는다.) 각 개인은 감염의 시대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두려움에 전염되어 문을 잠그고 높은 벽을 쌓거나, 또 다른 감염원이 되어 타인을 전염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마주하는 방식으로 결국엔 타인과 접촉할 것인지를 영화는 넌지시 묻는 게 아닐까.


영화가 끝날 무렵 장면이 바뀐다. 한 기업 로고가 찍힌 기계가 나무를 밀어 넘어뜨린다. 첫 장면에서 전화하던 여성이 근무하던 기업이다. 나무를 잃은 박쥐는 돼지 농장 천장에 매달려 있다가 먹이인지 배설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그것을, 비좁은 우리에서 사육당하던 돼지가 먹는다. 어느 식당에서 돼지를 손질하던 주방장이 급하게 호출을 받는 바람에 손을 씻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 악수한다. 첫 번째 숙주였던 그녀다. 감염 1일째.



영화리뷰1. <컨테이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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