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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May 06. 2020

카산드라가 다시 쓴 신화

<카산드라>, 크리스타 볼프

1. 다시 쓰기
『뫼르소, 살인 사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라는 두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앞의 소설은 제목이 암시하듯 『이방인』을, 뒤의 소설은 『제인 에어』를 다시 쓴 작품이라는 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뫼르소가 살해한 아랍인 옆에 있던 친구의 시선으로, 후자는 제인 에어가 살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던 아프리카 출신의 버사 메이슨의 언어로 새롭게 쓴 책이다. 두 작품 모두 고전에 반열에 오른 소설에 손을 댔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어떤 갈증이 이미 완성된 두 명작에 손을 대도록 만들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어 다시 썼을까.

맹목적인 보편(윤리)에 저항하는 인간을 드러내기 위해 뫼르소는 한 아랍인을 살해하고, 억눌린 여성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제인 에어는 흑인 여성인 버사 메이슨을 사물화한다. 우리가 뫼르소와 제인 에어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소설은 그들을 ‘사용’한다. 두 주인공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한 아랍 남성과 한 아프리카 출신 여성은 말을 빼앗긴다. 보편과 억압에 짓눌린 어떤 서구 주체를 드러내기 위해 피식민지 사람은 살해당하고 또 무심하게 도구화된다. 그들은 말하지 못했고 우리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시 쓰기’는 잊힌 목소리를, 솟구쳐 올라오는 응어리진 말을 끌어올리려는 윤리적 글쓰기이다.

『카산드라』 역시 다시 쓴 글이다. 작가인 크리스타 볼프는 과감하게도 그리스 신화를 다시 쓴다. (용감하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다시 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듯하다.)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트로이 전쟁 편을 카산드라의 시선으로 다시 옮긴다.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파리스 등 남성 영웅으로 넘쳐나는 전쟁 서사를 카산드라의 시선으로 다시 서술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통일전 동독의 유명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고 했던 한 여성의 눈에 전쟁과 분단, 통일은 어떻게 비쳤을까. 거기에 그(녀)의 자리가 있기나 했을까. 크리스타 볼프는 망설임 없이 카산드라의 시선 속으로 진입한다. 둘은 하나가 된다. ‘우리’가 된다. 우리란 누구를 뜻할까.

(크리스타 볼프, 1921~2011)

2. 그들은  목소리로 말한다 
카산드라는 폐허를 응시한다. 트로이는 멸망했고 포로로 잡힌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트로이의 공주이기도 했던 카산드라는 무너져 내린 성벽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한다. 소설은 거기서 시작한다. 그런데 회상 전, 작가는 빨려 들어가듯 카산드라와 한 몸이 된다. 그 후 카산드라는 말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말한다. 소설 속 화자는 카산드라인 동시에 작가 자신이다. ‘우리’가 된 카산드라는, 자신의 시선으로 본 트로이 전쟁과 남성 영웅들을 다시 말하고, 잊힌 이들을 끌어올린다. 서사를 말하는 이가 다르니 내용도 다를 수밖에.

『빌러비드』나 『소년이 온다』처럼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현대인의 입을 빌어 실어나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종의 진혼곡이나 위령제의 형태를 빌어서 말이다. 작가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자신이 카산드라에게 간다. 그(녀)의 시선과 혀를 빌어 전쟁과 영웅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이 형식은 필연적이다. 각자의 말인 동시에 ‘우리’의 목소리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타 볼프는 대필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기록해야 하며, 예언자인 카산드라 역시 신탁이 아니라 자기 소리를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 또 함께 말한다. “목소리가 나를 찢지 않도록 나는 목소리를 일부러 풀어주었다.”(54)

뒤엉킨 시간을 따라가기가 곤혹스럽지만,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카산드라의 기억을 따라 우리는 트로이를 다시 더듬는다. 전쟁과 영웅들을, 그 아래 파묻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미 전해진 신화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은, 카산드라의 기억 속에서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을 너머 또 다른 ‘우리’가 된다. “잊힌 자들은 서로를 알기”(65) 때문이다.


3. 우리 너머 우리로
카산드라는 갈등한다. 왕의 딸이지만 그(녀)의 말은 닿을 곳이 없다. 전쟁은 남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들의 일이지만(123)). 말할 지위를 얻기 위해 카산드라는 신탁을 받으려고 하지만, 신은 침묵할뿐더러 사제는 왕실의 뜻만을 나를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그(녀)는 말(言)의 세계에 진입하려고 한다. 트로이라는 ‘우리’에 머무르려는 까닭이다. 카산드라는 왕의 딸로 또 예언자로 아버지의 집에 거하려고 한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헥토르를 죽음에 내몬, 어리석은 가부장적 세계 말이다.

“카산드라, 네 아버지의 영혼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라.”(57) 어머니 헤카베는 조언한다. 아버지의 영혼이 아니라면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 어머니뿐만 아니라 카산드라를 둘러싼 여성들, 심지어 자기 몸종까지도 자신을 답답해하거나, 안타깝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던 카산드라는, 어느 날 왕실과 신전 바깥에서, 산과 숲에서 낯선 공동체를 만난다. 말과 질서가 아니라 춤과 색으로, 이미지와 그림으로 생동하는 세계를.

“여자 노예가 말했다. 우리한테 오세요. 당신들한테 오라고? 무슨 말인가요. 산으로 오세요. 숲으로. 스카만드로스 강가의 동굴로요. 죽이고 죽는 것 사이에 제3의 것, 삶이 있답니다.”(157)  

‘우리’라고 여자 노예는 왕의 딸에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를 가리킬까. 왕실이나 신전?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가족? 연합국에 맞서는 중인 트로이? 노예와 왕의 딸이 어떻게 ‘우리’일 수 있을까. 하지만 왕실과 신전 밖, 말의 질서 너머에는 여자 노예뿐 아니라 포로로 잡힌 상대국의 여성, 어머니 때문에 쫓겨난 첫 번째 여왕 아리스베가 어머니 헤카베가 함께했다. 전쟁을 답으로 삼지 않은 이들이, 잊힌 이들이 서로를 기억하며 두려움과 적개심을 뚫고 새로운 ‘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두려움과 적개심은 애당초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리스베에게 말했다. 저 남자는 복수할 거예요. 위대하고 유명한 그리스 함대 사령관이 자부심 없는 겁쟁이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강한 적과 싸우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법이다.”(71)

두려움과 적개심은 영웅들의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거대한 몸은 두려움으로 부풀었으며, 파리스는 꾸며낸 헬레네를 핑계 삼아 증오를 키웠고, 헥토르는 가부장제가 희생시키려는 억지 영웅이다. 두려움은 적개심을 낳고, 적개심은 거대한 잔혹을 쌓아 올릴 것이다. 그들은 내용 없는 영웅이다. 전쟁은 텅 비어있다. 공허한 전쟁을 영웅들은 거짓과 잔혹함으로 채운다. “남자들은 두려움을 부정하거나 고통과 전쟁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상한 속임수를 썼다.”(44) 속임수의 결과를 역사는 영웅 서사라 부를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을 막아선 트로이의 높다란 벽은 잊힌 이들에게도 견고했다.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면 양쪽 진영 남자들이 우리 여자들을 상대로 동맹을 맺은 듯 보였”고 “트로이는 적뿐 아니라 내게도 난공불락이었다.”(133)

카산드라는 알지 못하던 ‘우리’에 스며들어 말하기 시작한다. 비로소 가두어 놓았던 자신의 말을 풀어놓는다. “나는 프리아모스 앞에 수십, 수백 번 섰고, 찬성하라는 그의 명령에 ‘예’라고 대답하기 위해 백 번 노력했다. 백 번 다시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내 목숨, 내 목소리, 내 몸은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찬성하지 않는다고? 예, 안 해요. 그럼 입은 다물 테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그들이 옳았고, ‘아니요’라고 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175) 아니요. 그것은 오롯이 카산드라 자신의 목소리이다. 왕의 딸이나, 말하지 않는 신의 대변자로서가 아닌 자신의 음성이다. 비로소 카산드라는 말한다. 『카산드라』는 죽음 전에 전한 그(녀)의 증언일 것이다. “증인이 되리라. 내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지라도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33)

4. 고쳐 쓰기
『카산드라』는 여러 층위를 갖는다. 첫째, 전쟁 이후 동독과 트로이를, 정치 참여자로서 자신과 카산드라를 겹쳐서 쓴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독일과 관련한 전쟁과 분단 등에 대해, 소수자인 여성의 시선으로 쓴 정치적 비판인 동시에, 카산드라의 성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자아 성찰적 작품이기도 하다. 둘째, 『카산드라』는 페미니즘 소설로도 부족함이 없다. 출간된 해가 1983년인 까닭에 그 이후 진행된 첨예한 논의를 따라잡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에 관한 실제적이면서도 이론적인 내용을 폭넓게 담고 있다. 셋째, 굳을 대로 굳어버린 고전을 옮겼기 때문에 이야기의 틀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시적인 언어와 아름다운 문체로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려준다. 다른 시선으로 과거를 증언하며 다시 쓰기를 실천하여 잊힌 이들에게 애도와 위로를, 그리고 다른 가능성을 우리에게 전한다.

끝으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한 어린 소녀가 쓴 이야기가 망가트린 타인의 삶에 대한 평생의 속죄를 다룬다. 자신만의 입장에서 이미 쓴 글을 소녀였던 주인공은 평생에 걸쳐서 고쳐 쓴다. 고쳐 쓰는 과정에서 그(녀)는 타인의 자리에 서려고 부단히 애쓰며 끊임없이 고쳐쓰기를 반복한다. 무책임한 쓰기에 대한 속죄로 말이다. 아마도 그런 고쳐쓰기가 이언 매큐언이 생각하는 글쓰기의 윤리가 아닐까.

책임 없는 무심한 글쓰기가 망쳐버린 삶과 세계를 우리는 안다. 이름 없는 댓글과 전쟁을 승인하는 손쉬운 서명과 자를 대고 선을 그어 국경을 나눈 무책임한 쓰기를 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쓰고 고쳐 써야 할지 모른다. 반복되는 그 쓰기가 그날 그 삶에 온전히 닿지 않더라도 말이다.



서평35. 『카산드라』/크리스타 볼프/1983/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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