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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Jun 29. 2020

원본은 없다

<나를 보내지마>, 가즈오 이시구로

복제 인간을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는 『아일랜드』가 아닐까. 스칼렛 요한슨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한 『아일랜드』는, 인간의 수명 연장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이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복제 인간은 흥미로운 소재다. 미답의 영역이면서도(확신할 수는 없지만) 머지않은 앞날에 맞닥뜨릴지 모를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생명을 창조해 신이 되려 하고, 창조한 생명을 재물 삼아 무병장수하려는 인간의 끝 모르는 오만? 언젠가는 우리와 공존하며 살아갈지도 모를 복제 인간의 정체성? 상상과 실현 양쪽 모두와 근접한 탓에, 복제 인간이라는 주제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윤리인지를 물어오며 말이다.


소설 『나를 보내지 마』 역시 복제 인간을 소재로 한다. 영화 『네버 렛미고』의 원작이기도 한 『나를 보내지 마』는 같은 주제를 다룬 앞선 이야기들과 어떻게 자신을 구별할까. 복제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흔히 그렇듯 생명윤리 또는 공존 등을 다룰까. 일본 태생이면서도 영국 작가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가즈오 이시구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노벨 문학상(2017)은 작가의 무엇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겼을까.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소설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한 기숙학교와 그곳에 머무는 어린 학생들을 그린다. 고급스러운 사립학교인 듯한 ‘헤일셤’은 어린 복제 인간을 교육하는 특수 기관이다. 보통의 학교처럼 헤일셤은 음악, 미술 등 다양한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1부의 배경이 학교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왜 학교일까. 그들에게 배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음악과 미술이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장기를 기증하고 사라질 운명인데 말이다.

1부는 학교 내부만을 그린다. 외부는 없다. 평범한 학교 같아 보이지만 교내에는 묘한 분위기가 감 돈다. 바깥에서 드나드는 외부인은 있어도 출입하는 학생은 없다. 외부 물품은 교내로 들어오고 본인들이 만든 조악한 예술 작품은 바깥으로 나가지만 학생들은 드나들지 않는다. 교사들은 혀 뒤에 무언가를 감춘 듯 보이지만 내뱉는 이가 없다. 학생들 역시 감춘 게 뭐냐고 묻지 않는다. 발화되지 않은 금기가 교내를 떠돌며 그들을 감시한다.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그어진 선 앞에서 학생들은 멈춘다. 담배는 불가한데 섹스는 왜 허용하는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은 어디로 가져가며 무엇에 쓰이는지 등에 관해 학생들은 입을 다문다. 어렴풋이 운명을 짐작하지만 분명하게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 묻지 않을까. 왜 알려고 하지 않을까. 바뀌는 게 없을 거라는 걸 은연중에 감지했기 때문일까. 때로는 학생들을 향한 정체 모를 거리감과 두려움이, 은밀하면서도 지독한 혐오가 교사들에게서 혹은 어떤 외부인에게서 새어 나오지만, 학생들은 그 까닭을 묻지 않는다. 몸과 마음에 각인할 뿐이다. 이렇듯 1부는 기숙학교라는 공간과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통해, 그리고 이야기와 문장을 통해 미묘한 뉘앙스를 끊임없이 흘려보낸다. 1부는 분위기를 내뿜고 독자를 흡입한다.

소설의 화자이면서 중심인물인 캐시는 어느 날 아끼던 카세트테이프를 분실한다. ‘송스 애프터 다크’(Songs After Dark)라는 앨범으로, 캐시가 남몰래 흠뻑 빠져 듣던 노래가 실린 테이프였다. 친구 루스는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선물하지만, 이전 앨범과 그것이 같을 수는 없다. 캐시가 유난히 마음을 쏟았던 데다 학교 바깥에서 들어온 탓에 다시 구할 수 없는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테이프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캐시는 그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를 보내지 마』는 캐시가 잃어버린 테이프 찾기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 1954 ~ )

 • 원본은 없다.
2부는 장소가 바뀐다. 헤일셤을 졸업한 학생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다. 캐시가 배정받아 간 곳은 코티지라는 장소로 헤일셤과는 확연히 다르다. 헤일셤이 고급 사립 기숙사라면, 코티지는 허름한 창고에 가깝다. 혹은 가축을 기르는 축사라거나. 허드렛일을 맡은 한 남성만 오갈 뿐 아무도 그들을 돌보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곳에서 그들은 적정 시간을 머문 후에 간병인이 된 다음, 결국 장기 기증자로 삶을 끝낼 것이다. 그러기 위한 존재로 태어났으니까. 코티지는 교육이 아니라 사육을 위한 장소다. 그들은 훗날 쓰일 장기를 위해 순번을 기다릴 뿐인 생을 산다. 적어도 그들을 향한 바깥의 시선이 그렇다는 사실을 코티지는 암시한다. 새삼스레 궁금하다. 헤일셤은 왜 그들을 가르쳤을까. 사육과 교육 중 무엇이 그들에게 적절할까.

어느 날 캐시의 친구 루시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문을 듣는다. 누군가가 자신의 근원자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원형을 확인하고픈 갈망에 사로잡힌 루시는 친구들과 함께 노포크로 향한다. 공교롭게도 복제 인간들에게 노포크는 잃어버린 것들이 모인다는 소문을 지닌 장소였다. 그렇다면 루시 역시 무엇을 잃어버렸던 걸까. 복제 인간에게 근원자란 되찾아야 할 삶의 원본 같은 것일까. 루시는 왜 자신의 원본을 그토록 보고 싶어 했을까.

어렵게 찾아간 건물의 창문 바깥에서 훔쳐본 인물은 루시의 근원자가 아니었다. 처음엔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의 원본이라고 확신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녀와 루시는 달랐다. 닮았고 비슷했지만 달랐다. 그렇게 루시는 근원자를 찾는 데 실패한다. 노포크는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루시는 좌절 가득한 언어를 쏟아내며 자신을 어두움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통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 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232)

한편, 노포크에서 따로 시간을 갖게 된 캐시와 토미는 중고 잡화점을 찾아간다. 캐시가 잃어버린 카세트테이프를 되찾아주고 싶은 토미의 계획이었다. 온갖 잃어버린 물건들은 노포크에 모일 테니까. 토미의 마음만으로도 캐시는 한껏 들뜬다. 테이프를 찾아 노포크를 더듬거리는 과정과 두 사람만의 시간은 캐시를 충만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캐시는 노포크 한구석에서 테이프를 발견한다. ‘송스 애프터 다크’를 찾은 것이다. 그건 정말 캐시가 잃어버린 앨범이었을까. 헤일셤에서 사라진 테이프가 노포크에 도착한 걸까. 토미는 그렇기를 바라지만 캐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것은 ‘송스 애프터 다크’이기 때문이다.

노포크에서 루시가 근원자를 찾지 못해 낙담한 일과 캐시가 토미와 함께 카세트테이프를 찾은 이야기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루시는 찾지 못한 반면 캐시는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원본과 복사본에 관해 소설은 말하기 때문이다.

카세트테이프는 원본이 없다. 아니, 모두가 원본이며 모두가 복사본이다. 애당초 원본이 더 나은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복사본이 따라야 할 원형적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송스 애프터 다크’는 그것 자체로 노래일 테니 말이다. 루시가 근원자를 만나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루시 말고는 누구도 그녀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복제 인간에게 덧씌워진 운명, 곧 죽음과 그것에 갇힌 하찮은 삶을 루시는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 정해진 죽음과 그것을 준비하는 간병인과 기증자로서 운명 지어진 생은 얼마나 비루하고 무가치한가. 그러므로 루시는 알지만 바라보지 않으려는 인물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타인을, 앞선 이를 흉내 낸다. 선임들의 행동과 TV 드라마 속 인물의 어투를 따라 한다. 원본이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루시는 원본을 믿고 싶다. 원형에 대한 믿음은 의미의 빈칸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옳지 않은가. 복제 인간인 루시가 근원자를 찾아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뭐가 문제인가.

소설은 이런 믿음을 비웃는다. 원본은 없다고 이야기는 말한다. 원형에 대한 믿음은 삶을 드높이기는커녕 도피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고발한다. 원래의 삶은 없다. 삶이 있을 뿐이다. 원본은 없다. 루시와 캐시가, 노래가 있을 뿐이다.

복제 인간이라는 주제는 함정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독자를 속인다. 그는 복제 인간과의 공존이나 그들의 권리 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말한다. 복제하려는 인간. 그러므로 『나를 보내지 마』를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여긴다면 우리는 읽기에 실패할 것이다.

 • 어두움에도 노래할 수 있을까.
수년 후 캐시와 토미는 간병인과 기증자로 다시 만난다. 그들은 뒤늦은 연애를 시작한다. 이미 기증을 시작한 토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이미 폐교한 헤일셤에 관한 소문을 듣는다. 헤일셤 출신에 한정해서, 사랑을 증명하는 연인은 기증을 몇 년 후로 미룰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는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까’라는 앞서 던진 물음과도 맞물린다. 사랑을, 또 영혼을 어떻게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토미는 직접 그린 그림으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헤일셤은 글과 그림과 음악 등을 가르쳤던 거라고 그는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진실을 알기 위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캐시와 토미는 헤일셤 설립자를 찾아간다.

헤일셤은 특별했다. 그곳만이 복제 인간을 가르쳤다. 다른 복제 인간들은 그와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만이 좋은 시설과 삶의 풍요를 누렸다. 헤일셤은 시범 기관으로 후원을 받아 설립한 시설이기 때문이다. 헤일셤은 복제 인간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운 사회 운동가들이 얻어낸 결과이자, 시험이었다. 후원을 위해 학생들은 만들고 그렸으며 썼다. 그들의 작품은 후원을 위한 전시회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헤일셤이 폐교한 지금은 토미가 그린 그림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캐시와 토미는 설립자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는가? 그들 덕분에 특권을 누렸으니 고마워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다른 복제 인간들은 생각지도 못할 삶을 누렸으니 말이다. 설립자들은 자신들에게 감동한다. 자신들의 정의와 투쟁을 회상하며 젖어든다. 헤일셤의 창조자들은 토미의 그림에는, 두 사람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어긋남이 있다. 외부자와 내부자, 창조자와 피조물, 목적과 행위의 어긋남이다. 학생들은 후원을 위해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명하려고 그리고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에 닫힌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배움을 목적으로 환원할 수 있는가. 닫힌 삶에도 우리는 배우고, 쓰며,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영화 『아일랜드』의 복제 인간들이 그렇게 하듯, 캐시와 토미가 싸우거나 도망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부는 없기 때문이다. 바깥은 없다. 그것이 학생들이 학교를 넘지 않고, 또 캐시와 토미가 달아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것이 소설에 액션 장면이 없는 이유다. 죽음이 닫아놓은 삶, 이것이 삶에 대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시선이다.

누군가 ‘이들은 왜 울타리를 넘지 않는가. 왜 대체 달아나지 않는 건가’라고 물으며 답답해한다면 가즈오 이시구로는 ‘당신 역시 삶과 내 책을 오해하고 있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삶에 바깥은 없다고 그는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외부라는 허구가 아니라 닫힌 삶이라는 진실을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갈지를 작가는 관심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노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는 말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가즈오 이시구로는 왜 간병사와 기증자로만 죽음을 앞에 둔 복제 인간을 묘사했을까. 왜 돌보고 주는 존재로만 표현했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더 많은 수다를 떨어야 하지 않을까. 무용하더라도 말이다.



36. 서평: 『나를 보내지 마』/가즈오 이시구로/2009/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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