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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Dec 28. 2019

사랑하는 자라 부르리라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무해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를 본 후 친구와의 수다 중 나온 말이다.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는 대부분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재현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위로, 기억, 애도, 진실 추구 등 선한 의도로 과거를 재현하겠지만 결과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누가 왜 재현하는지, 사건을 어떻게 그려내는지에 따라 결과는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한다. 때로는 싸구려 민족주의와 신파를, 때로는 서사와 무관한 포르노그라피를 결과로 남긴다. 게으른 재현은 의도와 무관하게 해로울 가능성이 다분하다. 진부함과 신파만으로는 부족한지, 값싼 민족주의는 길 잃은 혐오로 우리를 이끌고, 서사와 무관한 포르노그라피는 인터넷을 떠도는 엑기스만을 남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외에도 재현에는 풀어야 할 난제가 적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조심스러운 비극을 불러오는 일은 옳은가. 재현할 이야기와 사건 당사자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재현은 어렵다.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2년 전 읽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역시 광주 5.18 사건을 재현한다. 제목이 가리키는 ‘오는’ 존재는 당시 도청에 남아 있다가 죽은 어린 혼령이다. 혼령은 말하기 위해 온다. 소설은 당시에는 말하지 못했던 혼령이 말하게 한다. 소년의 목소리로 다시 그 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재현한다. 하지만 소설은 정치적 사상이나 사건의 진실, 혹은 불의에 항거한 영웅에는 관심이 없다. 소설은 말하지 못했던 연약한 존재가 말하게 하고, 우리는 혼령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죽은 자를 다시, 그러나 새롭게 기억하고 위로한다. 『소년이 온다』는 글과 읽기, 그리고 기억으로 하는 위령제이며, 동시에 재현이다.

최근 읽은 『빌러비드』 역시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입에 담기 조심스러운 과거를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유령(혼령)을 통해 과거를 말하게 하는 주요 모티프에서도 두 소설은 닮아있다. 출간 연도로 보자면 『빌러비드』가 1987년에, 『소년이 온다』가 2014년에 출간되었으니 후자가 전자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형식면에서 닮은 두 소설은 세부 주제와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서는 적잖은 차이를 보인다. 이제 『빌러비드』 이야기를 해보자.

『빌러비드』를 쓴 토니 모리슨은 국내에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노벨 문학상과 퓰리쳐상 등을 받았고,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프린스턴에서 교수로 문학을 가르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지닌 작가이다. 위의 경력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흑인 여성 중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지만 책을 소개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언급해야겠다. 기본적으로 『빌러비드』는 흑인 여성이 ‘흑인’ ‘여성’의 경험을 다룬 작품이다.

『빌러비드』는 1856년 실제로 일어났던 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흑인 노예였던 마가렛 가너는 임신한 몸과 네 명의 자녀를 이끌고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는 멀리 달아나지 못하고 노예 사냥꾼에게 포위당해 붙잡히기 직전의 상황에 처한다. 그러자 그녀는 자녀들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기로 결심하고 두 살배기 딸을 칼로 죽인 후, 다른 자녀들도 죽이려 하지만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 토니 모리슨의 상상력과 글쓰기가 더해진 작품이 『빌러비드』다.

『빌러비드』의 중심인물인 세서는 비교적 친절한 백인의 농장인 ‘스위트 홈’에 속한 노예 여성이다. 세서와 그의 자녀들, 그리고 다섯 명의 남성 노예는 바뀐 농장 주인의 억압과 폭력으로 인해 탈출을 감행한다. 도망 중에 붙잡힌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세서와 그의 자녀들은 우여곡절 끝에 흑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무사히 도착하여, 남편의 어머니인 ‘베이비 석스’가 터 잡은 124번지에 살게 된다. 하지만 며칠 후 백인 노예 사냥꾼이 세서의 가족이 사는 124번지까지 들이닥쳐 집 주변을 에워싸자, 세서는 자녀들을 ‘스위트 홈’으로 돌려보내느니 죽이기로 선택하고, 아직 젖먹인 어린 딸의 목을 톱으로 베어 죽인다.

소설은 위의 비극적인 사건을 묘사하는데 힘을 쏟지 않는다. 독자들은 위에서 소개한 사건에 앞서 124번지를 떠도는 유령을 먼저 만나게 된다. 엄마에게 목이 잘려 죽은 딸은 집 안에 붙박인 혼령이 되고, 그로 인해 도망한 흑인 노예들을 따뜻한 환대로 맞았던 124번지는 절망이 가져온 황폐로 가득하게 된다. 텅 빈 124번지에 그득한 절망은 유령 때문일까? 아니면 딸의 목을 그은 엄마 세서 때문일까.

대체  여자는 어쩌자고 저런 짓을 하죠?”(250)

값비싼 노예인 세서와 자식들을 ‘포획’하러 온 노예 사냥꾼들 중 한 사람이, 아기를 죽이려는 엄마 세서를 보고 내뱉은 한 마디이다. 흑인을 가축으로 대하면서도 아무 때나 성폭행을 저질렀던 백인이, 자식을 죽이는 ‘엄마’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엄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백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18년 전 ‘스위트 홈’에서 함께 노예로 지냈던 남자 폴 디 역시 이렇게 말한다. “세서, 당신은 두 발 달린 인간이야.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고.” 세서는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을까. 두 발 달린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그녀는 한 걸까?

한 죽음, 혹은 아기 유령 때문에 희번덕거리는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124번가는, 18년 전 세서와 함께 ‘스위트 홈’에서 노예로 지냈던 남자 폴 디의 등장으로 변화를 맞는다. 폴 디는 124번가를 장악하던 정체 모를 유령을 내쫓고, 18년 만에 만난 세서와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얼마 후 자신을 ‘빌러비드’라고 소개하는 한 여자 아이가 느닷없이 나타나 124번가에 함께 살게 된다. 세서는 갑작스러운 존재인 ‘빌러비드’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매료되고, 빌러비드는 세서에게 맹목적인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며 124번가를 차지한다. 빌러비드(Beloved), 그녀는 누굴까.

빌러비드는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죽은 딸의 묘비에 엄마 세서가 새긴 호명이다. 짐작하겠지만 ‘빌러비드’는 엄마 세서가 죽인 딸이자 폴 디가 쫓아낸 유령이 여자 아이의 몸으로 나타난 존재다. 폴 디에 의해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은 몸을 가진 ‘빌러비드’가 되어 말하기 시작한다. 토니 모리슨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의 핵심 인물은 그녀여야만 했다. 살인자가 아니라 살해당한 , 모든   잃고도 그에 대해 아무 발언권도 갖지 못했던 사람. 그녀는 바깥을 떠돌고 있을  없었다.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오두막이 아닌 진짜 집에, 정식 주소가 있는 , 한때 노예였던 사람들이 사는 그들의 집에.  집으로 들어가는 로비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 혹은  소설로 들어가는 ‘서문 있을  없다. 나는 다짜고짜 독자를 납치하여 낯선 공간에 사정없이 내던짐으로써  책의 인물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는 첫걸음을 디디게 하고자 했다. 마치 등장인물들이 아무 준비나 대비도 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무 데로나 끌려 다녔던 것처럼 말이다.”(453)

토니 모리슨(1931-2019)

토니 모리슨에 따르면 빌러비드는 “살해당한 자”이며, “모든 걸 다 잃고도 그에 대해 아무 발언권도 갖지 못했던 사람”이다. 비약하자면, 빌러비드는 억눌린 채 언어를 빼앗기고 죽임 당한 흑인 모두이다. 사랑받고, 사랑할 권리마저도 빼앗긴 과거를 지닌 흑인 전부가 빌러비드다. 빌러비드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나온 모든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몸이다. 빌러비드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명명할 자격을, 사랑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기억이다. 이제야 빌러비드는 목소리를 내어, 독자들이 과거 자신들의 삶을 재기억하기를 요구한다.

미국 현대 소설의 기틀을 놓았다고 칭송받는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흑인 노예인 짐을 등장시켜 인종차별이 뿌리 깊게 남아있던 당시 사회를 비판하지만, 그는 흑인 짐을 백인의 도움이 필요한 어리석고 순진한 존재로 우스꽝스럽게 그린다. 다시 말해 흑인이 겪는 고통을 비교적 ‘착한’ 백인의 시선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좋은 태도 같지만, 이는 고통당하는 주체가 스스로 말할 수 없게 만들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를 전혀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빌러비드』에서 자신처럼 좋은 주인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스위트 홈’의 주인에게 베이비 석스는 이렇게 답한다.

“‘맞습니다, 주인님. 그렇게 해주셨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들을 가졌고  만신창이가 되었죠. 내가 하늘나라로  후에도, 당신은  몸값을 치러야 한다며  아들을 다른  빌려주겠죠.”

『빌러비드』는 백인들의 시선에 포섭되지 않는 그들만의 저항과 삶을 기억의 방식으로 그려내어 들려준다. 이를테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주인이 호명하는 이름으로 결코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얘기해주리다.”... “그들은  조슈아라고 불렀지만,   이름을 새로 지었지.”(381)

소설은 큰 역사가 관심하지 않은 이름을 드러낸다. 사연 없는 인물이 『빌러비드』에는 없다. 모두가 빌러비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등장인물 모두를 소중히 다룬다. 흔히 조연으로 대접받기 쉬운 등장인물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과거를 기억하여 말하게 한다. 노예로 살면서 겪은 고통을, 그렇지만 결코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않는 다양한 기억을 독자들 앞에 펼쳐 놓는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수많은 빌러비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이 직접 내는 목소리는, 그들의 삶을 결코 어리석음이나 순진함으로 환원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기억을 막는다.

앞서 언급했듯, 『빌러비드』는 ‘흑인’에 관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심스럽게 언급하자면, 『빌러비드』속 흑인이 백인의 시선에 전부 붙잡히지 않듯, ‘단 하나의 여성주의’에도 포섭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가족이나 아이를 자유롭게 가질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가부장과 가족, 모성애가 억압이었다면, 다른 누군가는 부모에게 사랑받고, 자녀를 사랑할 권리를 박탈당한 과거를 지녔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이를 죽여야 했던 엄마 세서뿐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야기 전반을 통해 들려주기도 하니 말이다.

한편 『빌러비드』는 ‘흑인 여성’에 관한 소설이라고 해서 백인이나 남성을 배척하는데 힘을 쏟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악이 아니라 백인이 있을 뿐’이라고 악에 받혀 말하다가도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인종을 넘어서는 장면을 그려내기도 하며, 여성주의 시각에서 남성 문제를 드러내다가도 고통받은 인종이라는 소수자성 안에서 함께 희망을 모색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주의와 인종문제, 혹은 그 외의 주제가 소설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하고, 경합하며 독자들의 판단을 어긋나게 만든다. 애당초 여성주의나 인종문제를 정치적으로 말하는 일이 소설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빌러비드』를 통해 하려는 일은 재기억, 혹은 다시 말하기가 아닐까.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다시 기억하려는 목적은 의외로 단순한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타진하려는 것이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붙잡히지 않은 세서의 딸 덴버는 새로운 삶을 위해 124번지 밖으로 나선다. 바깥엔 절망뿐이라고 할머니가 늘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덴버에게 “그 사실을 명심하고, 마당 밖으로 걸어 나가렴. 어서 가거라.”(398)라고 답한 할머니의 말을 가슴에 품고.

앞에서 언급한 내용 외에도 『빌러비드』에는 다루고 싶은 주제가 넘친다. 글솜씨가 부족해서 충분하고 적확하게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쉬울 뿐이다. 확언컨대 소설은 본 서평이 말하는 내용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깊다. 『빌러비드』의 문장을 천천히 맛보는 일 역시 빼놓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토니 모리슨의 문장은 다루기 어려운 과거를 다루면서도 결코 신파로 향하지 않는다. 『빌러비드』의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처연하고 아름답다.

저쪽으로인디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꽃나무를 따라가시오. 꽃이 피는 나무만 따라가시오. 꽃이 지면 떠나시오. 꽃이 모두 지면, 원하는 곳에 이르게  거요.”(190)

소설 속 시간이 뭉개져 있어 처음에는 읽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조금만 참아내면 토니 모리슨의 글과 문장이 친 덫에 걸리고 말 것이다. 일독뿐 아니라 재독, 삼독을 권한다.



서평25.  『빌러비드』/토니 모리슨/문학동네/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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