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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망이 Apr 06. 2021

말의 홍수가 아니라, 생의 바다

『생의 한가운데』

1. 말의 홍수가 아니라 생의 바다에서

『생의 한가운데』는 생(生)을 중심으로, 세 인물이 등장한다. ‘생을 중심으로’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생을 객관화한 다음, 그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정리하려는 인물, 그와는 달리 생 속에 뛰어들어서 그것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물, 그들 간에 오가는 실랑이 사이에서 자신의 생을 다시 숙고하는 인물 등을 소설은 다룬다. ‘생을 중심으로’라는 말이 틀린 표현이라면, 그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 선 위치가 다른 탓이다. 누군가는 생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마주하느라 그것의 바깥에서는 도무지 생을 규정할 수 없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생과 간격을 두고, ‘생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려고 한다. 소설은 생에 대한 세 인물의 태도를 다루지만, 그다지 공정하지는 않다. 『생의 한가운데』라는 제목이 넌지시 일러주듯, 저자는 이미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 주요 인물이면서, 생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니나가 저자의 지지를 받는 쪽이다.


『생의 한가운데』의 주요 인물은 단연코 니나지만, 그녀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화자(話者)가 아니란 뜻이다. 저자는 그녀에게 말하는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생이란 이런 거야’라고 규정하게 두지 않는다. 니나는 생을 언어로 포착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의 의미를 물었지요?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인간은 생의 의미를 물으면 결코 알지 못하게 되지요. 오히려 그걸 묻지 않는 사람만이 생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에요.”(331)

루이제 린저, 1911 ~ 2002

그녀는 말의 홍수가 아니라 생의 바다에 산다. 니나는 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곳, 이쪽 구석구석에서 저쪽 끝까지를 종횡무진 오간다. 죽음과 닿아 있는 생의 경계선까지도 그녀의 범위다. 생에 내던져졌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의 끝 선에 자신을 내던지며 삶의 생생함을 만끽한다. 니나는 사랑과 충실을 앞세운 한 남성에게 갇히지 않고, 안전한 삶에 안주하지 않으며, 여성이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삶은 자유, 무규범, 방종, 위험 등으로 나타나면서도 한없이 매혹적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생을 언어로 포섭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포섭한 그것에 포획되는지도 모른다. 니나는 갇힌 삶을, 스스로 가둔 삶을 거부한다. 니나라는 인물의 생동감을 묘하게 표현한 소설 속 묘사를 옮긴다.


“새를 봐, 달아날 준비를 갖추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포에 차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전 세계가 적의를 띠고 그를 보는데 그 새는 노래 부르는 거야.”(161)


2. 형식: 대화와 일기

말하는 이는 니나의 언니다. 어린 시절 헤어진 두 사람은, 수십 년 뒤 우연히 만나고, 며칠간을 함께 머문다. 니나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언니는 니나와 대화를 나누는 한편, 동생에게 온 편지 뭉텅이 전부를 읽는 역할을 맡는다. 이렇듯 『생의 한가운데』는 대화와 일기, 두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여기에서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이 몇 가지 나타난다.


첫째, 대화와 일기 사이에 놓인 인물은 언니다. 그녀가 대화하고 편지를 읽는다. 니나의 독특성을 앞세우는 듯했던 소설은, 보기에 따라 언니를 중심으로 한다. 소설은 은근히 언니를 향한다. 둘째, 니나에게 온 편지에 당사자 니나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일평생 쓴 일기를 편지로 보낸 슈타인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편지를 읽는 이는 언니다. 그러니까, 니나에게 닿지 않는 편지는, 엉뚱한 수신자에게 닿는다. 이처럼 『생의 한가운데』는 니나라는 독특한 인물뿐만 아니라, 어긋난 수신자(동시에 편지에 대한 니나의 무관심)라는 형식을 갖는다.

한편, 편지의 내용은 일기다. 발신자는 슈타인이라는 의사로, 니나를 환자로 만난 이후로 그녀만을 사랑한 인물이다. 생과 죽음의 경계 주변을 서성이던 니나를, 슈타인은 안락함으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그녀는 순응하지 않는다. 슈타인이 니나에게 부친 편지 뭉텅이는, 그가 니나를 만난 이후로 죽기 전까지 그가 그녀를 생각하며 쓴 일기다. 소설 내에서 일기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일차적으로 일기는 니나를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독자는 일기에 의지해서만 니나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우리는 슈타인이 쓴 일기 속 니나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슈타인이 보고, 듣고, 추측하고, 판단해서 기록한 니나는 온전한 그녀일까. 어쩌면 소설에서 유일한 3인칭 문장인 “자매는 서로에 관해서 전부를 알고 있거나 또는 조금도 모른다.”라는 표현은, 그녀에 관해 말로 이루어진 어떤 설명도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일기는 말이며 기록이고 과거다. 그것이 니나가 슈타인의 일기에 관심하지 않는 이유다. 일기는 슈타인이 니나의 생을 ‘정리’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말로 이루어진 기록에서가 아니라 역동하는 현실에서 살기를 바라며, 과거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니나는 ‘었다’가 아니라, ‘이다’를 바란다. ‘었다’가 슈타인의 일기라면, ‘이다’는 그녀가 쓰는 소설의 삶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을 고치고 또 고친다. 니나는 일기 속 기록이 아니라, 이야기에 산다. 니나가 삶을 만들어가는 작가라면, 슈타인은 지나온 삶을 기록한 역사가다.


3. 여성 루이제 린저와 니나, 그리고 전혜린

사실 썩 재밌는 소설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야기보다는, 대화와 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도 몇 안 되고 흥미를 끄는 사건도 드물다. 소설은 분명히 세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에 치중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소설의 재미를 논하는 건, 내 실수일지도 모른다. 니나가 여성으로서 뚫고 나가고 싶은 삶에, 온전히 이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남성인 슈타인의 시선으로 소설을 바라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당시(1950년, 독일) 여성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생의 규격 바깥으로 뛰쳐나가기를 갈망하는 니나를 오롯이 이해하기란 어려울지도 모른다. 여성 억압 등을 주로 다루지는 않아서, 『생의 한가운데』를 딱히 여성주의 소설로 제한할 필요는 없지만, 여성의 위치성을 지운 채로, 소설이 담아낸 감정을 전달받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가 눈에 띈다. 역자는 전혜린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등의 작품을 남긴 작가이자 독문학자이기도 하다. 출중했던 문학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이라는 사회적 제약 속에서, 우울증을 겪다가 31세에 숨을 거둔 여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1961년에 예스러운 한글로 번역된 『생의 한가운데』를 통해 독자들은 전혜린의 서글픈 음성을 니나의 목소리와 겹쳐 듣는다. (그런 점에서 전혜린 역을 권한다. 번역이 더 좋다는 보장은 없다. 되려 전혜린의 목소리와 감정이 더 많이 녹아있을 것이다.) 이때 들리는 음성은 비단 두 사람의 목소리뿐 아닐 것이다. 즉, 소설 바깥에서 『생의 한가운데』가 얼마나 재밌는지를 판단하는 건 두 번째 문제다. 그건 언제나 겉핥기에 그칠 것이다. 첫 번째는, 소설 속에서 니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녀와 같아질 필요는 없다. 그녀를 오롯이 이해할 필요도 없다. 필요한 일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생의 한복판으로 한 발을 내딛는 일이다. 언니, 마르그레트처럼.


“그리고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내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야.”(71)

전혜린, 1934 ~ 1965



39. 서평: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1950/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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