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ipoong Jul 10. 2023

제3장. 성탄 이야기 (3/4)



- 제3장. 성탄 이야기 (3/4)


:: “대통령이 지나가셔야 합니다!”

:: “거기 고래밥도 있나요?”

:: 멍멍 하는 소리가 300미터 밖에서도 울려 퍼졌다.



  여름날의 아이들은 할 일이 없는 것이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 디즈니 그림 명작을 뒤적이거나, 과학 앨범 전집이나 한국 전래동화 전집을 뒤적이는 일뿐으로, 이것이 비록 한가롭고 아름답긴 하지만, 지겹고 지루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 한옥 속의 나와 동생은 방에서 선풍기를 틀어 놓고 낙서를 하거나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때우는데, 무료하고 심심한 우리를 안타깝게 여긴 나의 엄마가 이런 제안을 한다.  

 “10원씩 줄게.”

  “뭘?”

  “뭐가?”

  “흰머리 한 개씩 뽑으면.”

  “진짜?”

  “그럼.”

  “그래! 하자 형!”   

  “그래.”

  어디 원시림에 살고 있는 원숭이처럼, 우리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수색하면서 흰머리를 찾았는데, 그게 10개를 뽑으면 벌써 오락 한판으로, 엄마의 흰머리는 드물지 않았고 오히려 제법 많았던 것이지만, 욕심은 끝이 없달까, 나는 현대사회 그 고도의 효율성 속에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엄마가 모조리 흰머리라면 떼돈을 벌 수 있잖아!’ 두 주먹을 꼭 쥐고, 엄마 머리를 죄다 쥐어뜯으면, 만 원~이만 원 벌 수 있을 텐데.

  “단번에 떼돈 벌 수 있는데!” 나는 동생이 들리게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동생이 물었다.

  “대머리만 들면 되잖아 대머리!”

  “대머리?! 으하하.” 동생은 솜사탕이라도 무는 것처럼 입 크게 웃었다. 우리 새 나라의 어린이들은, 대머리라고 하는 심상과 인상과 그 불러일으키는 것과 음향 및 수반 정서가, 꼭 마치 방귀와 똥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항상 웃게 만들었고, 노련한 국민학생이었던 나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용돈벌이도 지겨워지면, 나와 동생은 이제 정독도서관으로 향했다. 엄마 몰래 도서관 아래 오락실에서, 게임 한 판을 하고 나서였는데, 구리시 사건이 있었음에도 그 이후로도 나는 항상 오락실을 좋아했는데, 나는 마치 무슨 도박 중독자처럼 게임 중독자라 할지라도, 그래도 나라는 인격에는 일관성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었으면 한다; 에헴. 남자가 여자에게 보여주는 순정이라 함도 결국 일관성 아니냐.

  정독도서관을 오르면 안쪽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곧바로 어린이 열람실 있었었고, 여기에 과월 호 느낌으로 보물섬 같은 만화 월간지 같은 것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동네에는 또 따로 만화책방이 있었으나 돈을 내야 했는데, -불량한 형들도 있어서 돈도 빼앗기곤 함- 동네마다 있던 만화책방, 만화가게는 이후, <책/만화/비디오 대여점> 등으로 변하다가 웹만화와 OTT 등장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된다.

  만화를 보다가 도서관 앞 공터에서 얼음 땡을 하고 배가 고프면 집에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었고는 마당에서 물장난을 쳤다. 화장실 앞에 붉은색 다라를 두고, 다라에 물을 받아놓고서였는데, 거기서 우리는 머리칼을 도리도리 원반을 만들어 흔들었고, 물 튕김으로 물을 뿌리고, 바가지로 물을 뿌렸으며, 호스 주둥이의 가운데를 누르고 물을 뿌렸다. 입구가 좁아진 호스에서는 두 개의 물줄기가 반짝이며 나가곤 했고, 또 제법 멀리 나가곤 했는데, 그럼 물이 셋방과 우리 집에 튀기도 했다.

  우리 집은 한옥이었으므로, 어린 생각에도 나무에 물이 튀기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다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기특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은 물놀이가 지겨워진 것이다.

  “엄마, 매미 잡으러 가자.” 지겨움은 계획을 만드는 법이다. 그리고 어차피 곤충채집은 방학 숙제이기도 한 것 아닌가


  동네에는 매미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제법 있어서, 삼청공원 진입로 쪽 매미소리는 어린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공원 매미는 높은 나뭇가지에 저 높이 달려 있었고, 정독도서관도 비교적 키 낮은 벚나무가 많았고 그래서 매미 소리도 바로 옆에서 들을 수 있었지만, 아주 낮은 곳의 매미들은 다른 형들이 다 잡아가 버린다. 잠자리채 그물도 잔가지에 자꾸 걸리곤 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한 번은 ‘에이, 잠자리채를 길게 늘여보자’ 해서 잠자리채에 나무 막대기를 연결해 삼청공원을 찾지도 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던 것이, 채가 너무 길고 무거워 조준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 우리들의 팔근육 전완근으로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본 곳은, 중앙청으로, 경복궁과 중앙청에도 나무가 있지 않은가 하게 된 것이다.

  우리 한옥은 나무 대문으로 -한옥 대문은 다른 형태의 반닫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나무 문을 “크엉” 소리를 내며 열었는데,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잠자리 채를 들고 동생은 곤충채집통을 들었으며, 옆의 엄마는 양산을 들었는데, 100만 명의 어린이 모두가 빠짐없이 동의할 이야기를 한번 하자면, 양산 그것은 대체 왜 있는 것일까. 뭐 길 필요 없이, 어린이에게 있어 양산이란, 비도 오지 않는데 들고 있는 것이다.


  왜. 한 팔로 벌서고 더위 먹고 알배기라고 말이다.


  경복궁 안에 중앙청이 있었고, 광화문 뒤가 중앙청이 있었는데, 중앙청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중앙청은 차가운 돌덩이로 이루어진 것이라, 여름에도 제법 시원했다는 점이다. 여기는 더위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는데다가, 박물관으로 역사 유물이 공부도 되니 얼마나 좋단 말인가, 특히 어른들 입장에서는 말이다.

  물론 청소년들은 역사가 모두 다 파괴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왜.


  그들 입장에선 역사가 전부다 사라지게 되면 역사 공부할 때 공부량이 줄어들게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꾸역꾸역 역사라는 것을 힘들게 외우다 보면, 아, 역사는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기존의 존재자들이, 옛날 사람들이 우리를 지금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고, 또 어른들은 역사와 관련하여 단지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더 역사에 유리하고 젊을수록 불리한 무엇이 되는 것인데, 왜 여기서 계속 불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 마음에 스치는 정확한 한 단면이며, 이것이, 결국 내 추억 중앙청, 뭐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광화문 뒤에서 경복궁을 가로막던 내 쉼터 바로 그 중앙청의 폭파, 폭발, 붕괴를 가져왔던 기본 동기 중 하나였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까지 기쁘고 그럴 것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뭔가 그 이상 더 크게 기뻐했으며, 거기에는 역사에서의 해방감, 역사라는 것이 내리누르는 압박감 내지 위계하락감에서의 해방이 있었으며 청소년의 경우 특히 그러했다. 물론 내가 자백하는 것은 아니다; 중앙청은 이후 내 청소년기에 폭파되어 부서진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야 이 쌤통이다, 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 당신의 추억이 부서졌다고? 그게 대수인가, 야하하 대충 쌤통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지만, 내가 당신들을 향해 강철같은 손가락을 흔들며 삿대질을 하는 바지만, 당신 집은 무조건 붕괴될 것이다. 당신이 단독주택에 살았다면 당신 집은 재개발되어서 포크레인이 무자비하게 짓밟아 파괴할 것이고, 당신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당신 아파트는 재건축되어 당신 추억은 완전한 새 건물 새 아파트 위에서 대파멸,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이야 쌤통이다). 어떠한가. 나는 이제, 그러니까 이제 나도 당신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이게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비열한 미소이고, 나는 이 미소 지으며 경복궁을 향하고 있다.

  매미소리를 내면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경복궁은, 박물관을 낀 동네 수목원이나 호수 공원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나무와 호수와 중앙청(박물관)이 있었고 번데기 장수와 아이스크림 장수, 솜사탕 장수가 있었다.

  나는 매미소리를 완전히 동일하게 정말 완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개나 고양이 삽니다~” 하는 그 소리 내는 방법과 비슷하다. 내 지병인 축농증(비염) 때문에 생긴 잡기랄까, 심지어 나는 병에 걸린 매미소리도 낼 수 있었다.

  “맴맴맴맴맴.”

  동십자각까지 내려와, 사간동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경복궁이었기에, 우리는 기무사 담벼락(낮은 축대와 철망담)을 따라 걸었다. 여기에는 꽃나무가 심겨 있어서, 주먹만한 울타리 철망 사이로 장미꽃이 돋아 있기도 했고, 그 뒤로는 스쿱 느낌의 동글동글 향나무가 있기도 했으며, 축대 사이로는 이 침엽수의 낙엽이 축대 돌 틈에 갈색으로 빼곡히 꽂혀있기도 했다. 철망 담에는 장미가 삐쭉 경복궁 돌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동십자각을 광화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유는, 동십자각이 훨씬 더 뭔가 예스럽고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길, 소격동에서 동십자각으로 뻗은 이 길은 거대한 공터와도 같았다. 대형광장이라고 해도 좋을 이 널따란 길에는, 반듯한 도보 불록이 깔려 더욱 정돈되어 있었고, 가로수로는 은행나무가 양쪽으로 멋스럽게 꽂혀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경복궁과 기무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멀리서 중앙청 머리와 첨탑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장수와 솜사탕 장수가 작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근처 횡단보도 옆에는 “노”씨 성을 가진 아주머니가 상회를 하나 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노 씨였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고, 우리는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왜냐. 이것이 언제나 길건너 캐리어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싸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언젠가 엄마와 아주머니들이 이 가게 앞을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경찰과 전경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황을 보니, 대통령이 지나가기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경찰 등이 하얀 장갑을 끼고 호루라기를 짧게 불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통제를 따라야 하는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고, 왜 계속 기다려야만 하는가. 결국, 한 아주머니 한 아주머니가 그냥 길을 건넜고, 몇 사람이 따라 건너며, 이에 엄마도 길을 건넜는데, 경찰은 길게 호루라기를 불며 이 무리를 막아서며 말했다.

  “대통령이 지나가셔야 합니다!”

  의미심장하다. 그러자 이 아주머님들 무리는, 길을 건너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국민이 있어야 대통령이 있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때마침 그때,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동십자각을 도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그 무리 앞에서 멈춰 서는 것이다. 무리 앞에 대통령 차량이 순간 멈춰 서게 된 것인데, 이것은 경호상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 일을 겪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잠시 베게 위에 잠시 머리를 누인 다음 다시 집안일을 하러 자리에서 일어나 도마 위에 야채를 썰면서, ‘국민이 있어야 대통령이 있지’ 라는 말을 되뇌어 보았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어딘지 편치는 않았다.

  이 이야기를 저녁식사 때 아버지께 꺼냈을 때,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찬을 밥 위에 올리시면서 무엇인가 끄덕일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말서”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 사람은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시더니 문득 혀를 차면서 제법 안타깝다는 듯 코를 훌쩍였는데, 나는 그것이 그저 눈물과 관련되거나 코끝이 찡해져서 나타나는 훌쩍임인가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고, 그저 아버지는 다시 유난히 무심하게 다시 밥 위에 찬을 올리고, 밥숟가락을 냄비 가에 살짝 긁으며 찌개를 뜨실 뿐이었다.


  보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직선제 대통령으로 군인 출신이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는 모토로 당선되었다. 이런 모토나 광고랄까 선전 문구로 확인 내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상당수가 군부와의 단절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확실히 단절과 파괴, 폭파, 폭발 같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국민 정서를 관찰하고 확인하던 노태우 측도, “보통사람”으로 선전하는 것이 당선에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겠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엄마를 포함한 길을 건너던 우리 동네 우리 국민들이 경복궁 앞에서 행했던 하나의 작은 사건이자 작은 징후는, 그러니까 길을 건너고, 그 앞에서 차량이 멈춰 선 이 작은 맥락은, 결국 밑바닥의 정서 그러니까 노태우 정권의 허약성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는 점이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우리는 아직도 혁명 중이고, 그것은 미적지근하고 천천히 가고 오래가고 느슨하게 가는 혁명의 한 일환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프랑스처럼 왕의 목을 우리 손으로 자르지 못했고, 우리는 영국처럼 대타협을 이루지도 못했으며, 미국처럼 새 땅에서 갑자기 어느 날 떡하니 민주주의를 실시하지도 못했다. 말인즉슨, 왕 그러니까 임금은 사실상 일본이 날렸으며, 그 일본은 미국이 날려버렸고, 우리 국민이 우리 스스로의 힘을 확인하는 것은, 역대 대통령의 비극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른바 표현으로서 역대 대통령들의 목을 조금씩만 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국민들은 확실히 이승만은 어떤 왕의 감각, 임금의 감각으로 받아들였고, 박정희도 그와 같지는 않으나 대략 그와 버금가는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치면서 그 감각은 천천히 사라져 갔고 권위를 역시 그와 함께 느슨해져갔다.

  결국, 아무튼 과반 득표를 얻지 못하고 집권한 노태우는, 이런 느슨한 혁명 분위기와 함께 출렁임 속에 있었고, “보통사람”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의 권위 추락과 이 불안정한 출렁임을 의미했다. 그 말에는 아첨이, 국민에 대한 아첨을, 그리고 임금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부정과 패배에의 자인을 녹여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모종의 만회가 필요로 했던 노태우 측은, 이후 국정운영 차원에서 3당 합당을 단행하고, 민심 회복 차원에서 범죄와의 전쟁(1990)도 선포한다.

  참고로 노태우 당선 당시에, 같이 선거전에 뛰어들었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이들 후보는, 이후 차례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들이 그토록 동경했던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다. 소격동 옆 팔판동 뒤 청와대가 바로 그분들의 직장이었던 것이다.


  경복궁에 들어섰으나 매미는 보이지 않았다. 매미소리는 들렸으나 소리를 따라 걸어도 너무 높고 또 보이지가 않아 잡을 수가 없었다. 경복궁은 역사 현장 아닌가. 경복궁은 포석으로 빛났고, 어린이들은 그곳에서 교육용 비슷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지만,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고 아는 것이 보이는 걸 막는 법이기에, 우리는 그저 매미소리에 지쳐 나가떨어진 너무 덥고 현기증이 날 뿐이었다.


  별수 없이 중앙청이나 구경하는 수밖에 없겠다. 중앙청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는데, 중앙청의 뾰족부와 주변 큰 돌들은 번쩍거렸고 들어선 내부는 돌덩이 암이 그러하듯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옛 서양 느낌을 주는 건물은 돌계단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연탄불 위 정성스레 잘 구어진 쫀디기처럼, 모양새 어여쁘게 잘 휘어져 있었다.

  우리는 매미채를 들고 역사 유물을 구경했지만 곧 지겨워졌고 다음에 구경을 해도 되는 것이었기에, -오늘만 날인가- 녹색과 나무가 있는 곳으로, 햇빛 돌로 번쩍이는 경복궁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 매미 소리가 없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그게 나무는 있을지언정 숲이구나 하는 느낌은 아니어서, 숲과 사막 둘 중에 더 닮았다한다면 사막에 가까운 풍경이었지만, 물이 없지는 않고 나무가 없지는 않았고 매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모두 애매하였다. 매미는 수가 적고 너무 높은 나무에 달려 있었던 것인데, 이 더위에 미쳐버린 매미는, 절규하는 이 매미들은, 어쩐지 자기 괴로움을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를 약 올리는 것도 같았다.

  경복궁은 바닥이 사막 같았고, 포석들은 반짝여 공간은 더 환하고 덥게 더 무덥게 느껴졌다.

  하지만 풀밭이 있어서, 방아깨비나 멍청한 풀벌레는 제법 있는 것이 내 숙제 채집에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고, -메뚜기 한 마리 정도의 수확- 또 다행히 궁에는 연못이 있어서, 물방개나 소금쟁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경복궁의 연못은 경회루를 끼고 있었다. 경회루 수면 위는 마치 무슨 국보 보물의 은입사처럼 조밀하게 반짝이며 움직거렸고, 사실 지나치게 반짝이며 움직거렸으며, 그 윤슬 옆으로는 기와지붕과 능선을 여실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못에도 태양은 사실상 번득거리고 이글거리고 있었기에, 그러니까 말하자면 뜨거운 구멍이자 소실점 비슷한 것을 만들며 미친 듯이 내리쬐고 있었기에, 경회루 연못에도 그와 비슷한 부어~언쩍 하는 햇님놈의 빛 덩어리가 떨구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태양 놈은, 마치 연못이 돋보기라도 되는 듯, 그쪽 주변으로 집중하여 폭염의 레이저를 사정없이 주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연못 주변 마치 춤추는 가마솥 같았다.

  나는 뭐 물론 사실상 거의 다한증 환자였기 때문에 옷가지들은 이미 한참 전에 땀에 젖었지만, 그래도 여름이 겨울보다 나은 것은, 겨울 거지가 얼어 죽기는 하여도 여름 거지가 얼어 죽지는 않기 때문이다.

  경회루 옆 버들가지 아래로는 물이끼가 떠있었고, 큰 잎 식물들은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짙은 녹색의 연못물에는 작은 녹색 보풀 같은 것이 떠다녔다. 바로 그 옆으로 소금쟁이가 마치 점 같은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물 위에 떠있던 곤충의 다리 끝 장력진 물 보조개에서는, 아주 작게, 점처럼 아주 작게, 작은 빛이, 은처럼 맺혀 있었다.

  그리고 보석 같은 우리 북악산, 저쪽의 구름성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 연못은, 그 구름을, 바로 그 빛나는 구름을, 물 위에 비추어 그려두고 있었다. 우리 북악산을 같이 그려두면서 말이다.


  이유가 무얼까.


  구름 그 자체보다 물이 비친 구름이 더 아름다운 이유 말이다.


  그리고 북악산 보다, 경회루 연못에 비친 북악산이 더 아름다운 이유 말이다.


  무엇일까. 세종의 월인천강지곡처럼, 그러니까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말처럼, 달이 도장을 찍는다고 한다면, 그래서 천 개의 강에 달의 도장이 찍힌다고 한다면, 그리하여 해보다 달이 보다 미학적인 우월함으로 노래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해보다는 달이 아름답고, 달보다는 물에 비친 달이 더 아름답다고 말이다. 그리고 더욱 최고로 아름다운 것은, 이 글의 묘사로서, 다른 말이 아닌데, 지금 이 글에 우리 독자의 인상 속에 비친 물속의 달이 아닐는지.

  모든 것은 점차 거리를 두면서 아름다워지는 바, 보면, 해보다 달이 아름답고, 달보다 물에 비친 달이 아름다우며, 실제 물에 비친 달보다, 우리의 머릿속, 인상 속에서 물에 비친 달이 더욱 아름답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나간 바람은 차갑지 않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옛 시절이 아름다운 이유가 될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지나간 시절이든 지나간 옛사랑이건 간에,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 인상 속에 고요한 형태로 잔잔히 잠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미학과 아름다움의 진지한 거주지는 다른 아닌 우리의 머릿속, 인상 속인 것이다.

 

  경복궁이니 정독이니 공원이니를 돌아다니면 이제 사람이 피곤해지고, 집에 와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하게 되면 벌써 노곤해지고 조용해지면서 차분해지게 된다.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말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인데, 이렇게 말수가 줄어든 아이들을 바라보게 되면 확실히 어린이는 귀엽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밤이 오면, 노곤노곤해진 나는 이제 잠을 잠을 청한다. 널은 길가를 생각하고 그쪽 풍경을 잠시 아주 잠시 떠올리고는 거기에서 솜사탕을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솜사탕을 한 번도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우리 집은 가난했고 그 정도가 될 형편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어느 다른 여름 날, 나는 남동혁과 학고재네 놀러 가기도 한다. 거기서,  놀다가 점심을 먹기도 하는 것인데, 내가 앞서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고재네 누나는 우리와 10살 넘게 나이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학고재와도 10살 넘게 차이가 났던 것인데, 그래서 더운 여름날이면, 누나는 학고재의 머리를 감겨주기도 했다.

  한번은 우리가 그를 옆에서 보고 있는데, 학고재가 누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것이었다. 친구의 행동에, 누나는 나와 남동혁에게, 이렇게 소리 죽여 말하는 것이다.

  “니네만 오면 저런다, 쟤.”

  난 친구가 짜증 내는 장면을 처음 본 것인데도, 누나는 그리 말했다. 나는 속으로 나 말고 다른 친구가 왔을 때도 저랬던 건가, 또 남동혁 왔을 때 그랬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튼 학고재는 저쪽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학고재네 할머니가 식사를 차려 주시면, 우리는 식사를 맛있게 하고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물고 와서 전화기 앞에 나란히 앉는다. 할머니는 마실을 나가시고, 집에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고, 우리는 이제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이제 장난전화를 걸 준비를 하는 것인데, 장난전화는 -자타 공인에서 타 제외- 남동혁의 주특기다.


 

  “따르르르릉~!”

  “야! 조용조용!” 남동혁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따르르르릉~!” 요즘은 집 전화기 모습을 못 보았을 것이다. 전화 제스처를 취할 때 엄지와 소지를 펴 보이는 것은 -그 멍청한 그 스마트 휴대폰이 아니라- 이 모습을 모사한 것이다.

  “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네. 북경반점입니다.”

  “거기 중국집이죠?”

  “네 맞습니다.”

  “거기 밥 있나요?“

  “네. 여러 가지…”

  “(말 자르며) 아, 짜장밥 있나요?”

  “(딸깍) 네.” 볼펜 모나미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짬뽕밥도 있나요?”

  “네. 주문하시겠어요?”

  “네. 근데요.”

  “네. 몇 개씩 할까요?"

  “거기.”

  “네.”

  “거기 고래밥도 있나요?”

  “(황당하다는 듯) 네? 무슨 밥이요??“

  “오리온 고래밥이요” 그럼 벌써 전화기 주변 나와 학고재는 입을 틀어막는 것이다.

  “(못 알아듣고) 네? 무슨 어려운이요?”

  “아니요. 재미로 먹고~ 맛으로 먹는~ 오리온 고래밥!”

  “으하하하!”

  “야 이시키들아 장난쳐!” 하지만 이미 “재미로 먹고 맛으로 먹는” 할 때부터, 그러니까 남동혁이 CM송의 음을 줄 때부터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럼 이제 남동혁은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욕설을 최대한 동원하여 뭐라 뭐라 하고 수화기를 탁 끊어버리는 것이다. 어디 지금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보면, 유-창한 욕설에는 어딘지 모르게 플로우와 리듬감이 있다.

  전화를 거는 곳에 대중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 데나 전화를 걸거나, 전화번호부에서 희생자를 물색한 다음에 아무렇게나 전화를 걸었던 것인데, -말인즉 그렇게 어른들에게 욕을 진탕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던 것인데-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수화기 너머로 “야 이 새끼들 니들 뭐 하는 새끼들이야!”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남동혁은 수화기의 구멍을 막고, “닥쳐 인마!” 하고 호통을 쳤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흐흐흐” 하고 웃었다. 앞서 말했듯 전화기는 ‘C’자처럼 생겨 있었고, 수신기 부분과 송신기 부분이 각각 귀와 입에 닿았으며, 전화기와 본체 사이에는 스프링 같은 고무줄이 돌돌 말려 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네.”

  “거기 창신이네 집이죠?”

  “아니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네?”

  “네. 없습니다”

  “진짜요?”

  “네.”

  “아닌데요?”

  “네?”

  "아니라고요."

  “뭐가 아니야.”

  “아니에요. 있습니다. 있는데요?” 그러면 이상하게 우리들은 참으려 해도 큭큭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럼 전화를 붙들던 아이도 터지고 만다.

  “으하하하!”

  “야 이놈의 시키들아! 장난치면 혼나!”

  장난 전화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제대로 된 장난전화를 진짜로 한번 경험한 사람은, 결코 내 이 주장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경찰서나 소방서에 장난전화를 걸면, 그곳에서 우리 쪽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를 걸어온다는 점이었다. 그들에게는 무슨 장치가 있어서 우리 쪽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가 있었던 것인데, 하지만 이는 금세 주의하게 된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친구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친구네 집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친구가 전화를 받고서는 자기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아는가. 포석이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포석이네 집 전화번호를 물어봤는데, 포석이가 자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는가.

  우리는 포석이네 전화번호를 알고 있기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도 재미있게도, 포석이는 전화를 받고서도, 친절하게도 자기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다.

  ‘설마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상당히 많고 흔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예를 들어서, 내가 한 아이를 부르며 “이정아, 이정이 이름이 뭐야?” 하고 물어보면, 이 미취학 아동 김이정은, 자기 이름에 성을 붙여 이야기한다. “김이정!” 그것도 굉장히 당당한 태도로 말이다.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는가.

  아무튼 이제 우리는 포석이네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참고로 포석은 재동국민학교 싸움 짱이었는데 남동혁과 같은 팔판동에 살고 있었다.

  “띠리리리링~!” 남동혁이 역시 전화기를 들고 있다.

  “띠리리리링~!”

  “여보세요.” 포석이가 받는다.

  “네 여보세요.” 남동혁이 말한다.

  “네-.”

  “어. 거기 포석이네 집이지요?”

  “네. 아, 어. 나. 그래 너 누구냐?”

  “응, 포석이냐?

  “어어.”

  “나, 동혁인데.”

  “아, 어. 근데 왜?”

  “뭐 하냐.”

  “집에 있어, 왜.”

  “있잖아. 근데, 니네 집 전화번호 뭐야?”

  “우리 집 전화번호?”

  “응.”

  “723-45XX인데. 왜?” 우리 동네는 럭키세븐, 앞자리가 7로 시작했다. 종로는 세계 최고의 행운아이기 때문이다. 종로가 사람이라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 왜냐고? 어- 왜냐하면~ 몰라서.”

  “어. 그래?”

  “근데, 번호 그게 다야?” 남동혁은 포석이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것은 일종의 힌트였고 확실히 힌트였지만, 포석에게는 까다로운 힌트였다.  

  “아. 아마, 앞에 02 써야 될걸?" 포석이는 지역번호라는 개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 그거. 그래 그거 앞에 써야지.”

  “어, 근데, 안 써도 되는데, 아마 안되면 써야 될 거야." 서울끼리는 괜찮으나, 다른 지역에서 전화를 걸 때 02를 앞에 붙여야 한다.

  포석이는 우리가 자기 집에 어떻게 전화를 했는지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충분히 포인트가 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충분히 놀림감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친구를 놀리지 않았다. 놀림으로 삼기에는 그 태도가 너무나 단박 했고, 특히 무엇보다 포석이는 싸움 전교 1등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싸움 1등이 4명이나 있었는데, 포석이는 그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4명 중 다른 두 명은 형이 있었고 남은 한 명도 손위 형제가 있었다. 1등 중 한 명은 정 씨로 안국동에 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인사동에서 음식점을 했고 2살, 3살 터울로 형이 두 명이나 있었으며 태권도를 배운 덕에 발차기가 특기였다. 다른 한 명은 삼청동에 살고 있었는데, 김 씨로 이 친구도 2살 위의 형이 있었고 조부가 조계사 앞 쪽에 건물을 갖고 있었으며, 머리가 좋고 입심이 좋아 판단이 빨랐으며 상대 귀를 때리는 것이 특기였다. 다른 한 명은 강 씨로 저 멀리 평창동에 따로 살고 있었고-그래서 우리와 어울리진 않았음-형은 아니었고 손위 누나가 있었다. 물론 이들이 싸움을 못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형들은 형들이 있었고, 적어도 누나가 있었으나, 포석이는 형이 없었고 혼자로 외아들이었다.

  포석이는 빌딩 모양의 모던하고 단출했던 팔판동 2층 건물의 2층에 살고 있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또 어디 들리는 바에 따르면 다른 고위직이나 특수 업계에 종사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런 소문이 있었던 것은, 이 친구가 항상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항상 좋은 옷에, 또 항상 머리는 가르마를 빗어넘겨 고정시켜 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사실 팔판동이라는 동네 자체가 조용한 동네였고, 여럿 외국 대사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에서도 어딘지 조금 더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곳이다.

  팔판동 야구장이었던 전경 공터 (전투경찰 주차장) 옆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 뒤로는, 마름모 축대를 따라 청와대 춘추관 쪽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면, 날 좋은 봄날 이 길을 따라 나무 높이 옆을 지나가 걸으면, 그 길에 떨어져 있곤 하던 작은 연녹색 알갱이들이 걸음 밟아 축대 길을 따라 걸으면, 어린이의 가슴에도 가슴 가득 청량함이 느껴지곤 했다.

  또 축대 아래쪽 이 나무의 새까만 응달 아래를 지나갈 때면, 단단한 나무 질감과 크기와 또 나무가 등지고 있는 축대를 지날 때면, 특히 여기에도 깔려있던 작은 연녹색의 알갱이 때문에, 항상 어딘지 또 매우 상쾌하고 다크 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곤 했다.

  한번은 포석은 자기 집에서 우리를 불러 놓고 과자를 먹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엄마가 자기를 진짜 열받게 하면, 이 집에 불을 지를 거라고 말이다. 라이터를 탁탁 켜면서 한 말이었고, 뭘 사주지 않으면 열받는다는 이야기 중 나온 것이었는데, 다른 효과를 노린 -그러니까 우리를 향한- 엄포요 센 척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진짜로 이 친구가 불을 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인데도 친구는 어디서 구했는지 라이터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 전교 1등들은 무리를 이뤄 함께 몰려다니게도 했는데, 이들과 놀 때 조금 과격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문방구에서 아이스크림을 훔치는 것과 과격한 일이고, 윗 학년 형들을 때리는 것도 과격한 일이며, 기와 담장을 넘어 빈집을 터는 것도 과격한 일이지만, 나는 여기에 전혀 절대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라고 적을 수밖에 없겠지만, 보면, 모두 형사미성년자이고, 게다가 이것은 또 소설 아닌가.

  아무튼 실컷 장난전화를 하고, 배가 아플 정도로 실컷 웃고 나면, 우리는 각자 자기 집으로 흩어져 들어가 어른들이 차려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티비를 보며 뒹굴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잠을 청했다.

   잠을 자기 위해 누워있으면, 멍멍 하는 소리가 300미터 밖에서도 울려 퍼졌다. 바로, 소격동의 여름밤이었다.






(제3장 3부 끝. 4부 계속)

작가의 이전글 :: 확성기 트럭은 동네의 공터에 공터를 돌아다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