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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한커피 Sep 09. 2020

난 엄마처럼 하려면 멀었다

가족의 일이라면 장소에 상관없이 실강이 하고, 욱 하던 엄마가



하루 종일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내렸다. 저녁을 먹고 TV 뉴스를 보는데 부산을 비롯한 아래 지방의 역대급 태풍의 강풍과 비로 피해가 크다는 소식이다. 큰 비가 내려 집이 물에 잠겨 주민들이 대피하고, 물이 안방까지 들어와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보니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내가 살던 곳은 여름이면 몇 년에 한 번씩 물난리를 겪었다. 여름 장마나 비를 동반한 태풍이 닥치면 물이 어른 무릎까지 차올라 동사무소나 인근 학교로 피난을 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교 때인 것 같았다. 그해 여름에 몇 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동네가 물에 잠겼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메가폰을 들고 다니며 큰 소리로 '집에서 나와 모든 주민들은 대피하세요. 지금은 괜찮아도 계속 물이 차오르니 집에서 나오세요.'라고 소리쳤다. 그때 밖에서 엄마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애순 엄마, 대문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으면 바로 옆에 있는 우리 집으로 물이 더 많이 들어오잖아."

"윤희 엄마, 그럼 지금 우리 안방까지 물이 들어오게 생겼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거야?"

"자기 집 막아 보겠다고 남의 집 피해 보는 것은 생각 안 해?"

"윤희네는 마루가 높아 방으로 물이 들어 올 염려가 없고, 또 부엌 문턱도 높아서 물이 들이칠 염려가 없으니 태평이지."

옆집 애순이네 아줌마와 우리 엄마가 모래주머니로 물을 막아 보려고 하다가 싸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물이 들이닥치는데 모래주머니도 소용없을 것 같은데 워낙 절박하니 그것으로 라도 막아보려고 했고, 옆집은 그것 때문에 더 피해를 볼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소동이었다.


엄마는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이나 동네 주민과 크고 작은 일로 다투었고, 하필 난 그때마다 엄마 옆에 있었다. 난 그게 싫었다. 엄마야 참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지만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는 것도, 큰 목소리로 우격다짐하는 것도 싫었다. 친구의 엄마처럼 늘 부드러운 말투였으면 좋겠는데 싸울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말을 참지 않고 언성을 높이는 엄마가 부끄러웠다.


한 번은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영자 아줌마와 실랑이가 붙었다.

"영자 엄마, 내가 우리 아이들 대학교를 보내 든 말 든 무슨 상관이야?"

"윤희네 이제 돈 없는 거야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애들 셋을 다 대학 보내느라 돈 빌리러 다니니까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지."

"내가 영자 엄마한테 돈 빌려달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난 돈 때문에 공부 포기하는 게 싫어서 밀어주는 거야."

"그래도 여자애들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되잖아. 우리 딸 상고 나와서 은행에 취직해 돈 잘 번다고 윤희 엄마도 부러워했잖아."

그 뒤로도 서로 누가 옳으니를 두고 다툼이 이어졌지만 난 도저히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몇 번 엄마의 팔을 끌다가 집으로 도망치듯 와버렸다.


"엄마, 동네 아줌마들과 싸우지 좀 마. 창피해 죽겠어."

"그럼 우리 가족 얘기를 안 좋게 하는데 어떻게 참아?"

"그냥 지나가는 말 뿐이잖아. 그리고 아주 안 볼 사이도 아니고 매일 얼굴 보는데 껄끄럽지도 않아?"

"난 다른 건 다 참아도 우리 가족에 관한 일은 못 참는다."

오랫동안 엄마를 교양이 없다고,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엄마를 이해하고 고마워하고,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는 날이 찾아온 건, 우리 아이가 심장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였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수술을 하고, 하루에 한 번 중환자실의 면회가 가능할 때였다. 그날 엄마와 같이 아이를 보러 갔다. 아이는 팔목과 발목, 어느 때는 머리를 밀고 주삿바늘을 꽂기도 했는데 발목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에서 피가 새어 나와 시트에도 빨간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엄마가 발견해 간호사를 불렀다.

"여기 우리 아기가 피를 흘렸네요. 많이 흘렸는지 싸개에도 묻어 있네요."

"아이가 움직이면 그럴 수도 있어요. 바늘이 약간 빠지기도 하고요.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아요."

"쪼그만 애기가 피를 이렇게 흘릴 정도면 많이 아팠겠죠. 말도 못 하고..."

"저희도 신경 쓰고 있어요."

간호사는 별일 아닌 듯, 불친절과 친절의 사이의 말투로 대답을 하고 곧 다른 일을 했다.


면회시간이 다 되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엄마는 다시 간호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난 엄마가 다른 때처럼 싸움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손주의 피를 봤으니 이성을 잃고 물불 가리지 않고 쏘아붙일 거라고 믿었다. 난 속으로 '나도 불만이 많지만 아이를 맡기는 입장이라 웬만한 건 참고 넘어가는데 엄마가 왜 나서고 그래. 그러다 우리 아이 밉게 보면 어쩌려고 그래?' 중얼대며 엄마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다.

"간호사 선생님, 우리 아기 좀 잘 봐주세요. 태어난 지 두 달인데 그 쪼그만 몸을 가르고 수술을 했어요. 저는 손주가 아플까 잠도 못 자고 있어요."

"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저기 우리 딸은 아이가 아파서 몸조리도 못하고 병원으로 면회 다니는데. 오늘 지 아이가 피 흘린 걸 봤으니 또 얼마나 울까요. 간호사 선생님 우리 아기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들만 믿을게요."

엄마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드려요.'를 반복했다.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동네에서 소문난 한 성질 하는, 가족이 피해를 보는 걸 참지 못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욱하는 엄마가 아이를 위해 두 손을 모으고 거듭해서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는 엄마가 다툼과 실랑이를 하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아님 할머니가 되고 그러기를 멈추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다시 누군가와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걸 목격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예전처럼 무조건 엄마를 탓하거나, 창피하다며 집으로 잡아끌어당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난 아직도 싸움이 싫다. 다른 사람과 목소리를 높여 얼굴을 붉히는 일도 좀처럼 없는 일이다. 혹시 가족의 일로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난 엄마처럼 할 수 있을까. 싸움꾼처럼 다투고 아님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며 두 손을 모아 '잘 부탁한다'는 할 수 있을까.

난 엄마처럼 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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