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사는 집은 채광이 참 좋은 편이다.
서울 땅에선 바람도 햇빛도 돈을 내야 가질 수 있었는데 이왕지사 생긴 햇빛을 놀리기엔 아깝다는 심보가 생겨버렸다.
그렇게 바질과 토마토 화분 키트가 다이소에서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바질과 토마토는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순전히 화분이 빨갛고 파란색이라 나란히 늘어놓으면 보기 좋겠다는 이유로 산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 보기 좋은 화분은 내가 다리를 다치게 되면서 몇 달을 집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방치되게 되었다.
5월은 아직 추웠고.
6월은 내 몸이 무거웠으며.
7월이 되어서야 겨우 살만해진 몸을 이끌고 씨앗 포장을 뜯었다.
질 좋은 흙과 함께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씨앗이 비닐봉지에 동봉되어 있었다.
얼마나 작은지 심다가 날아가면 어쩌나, 심어놓고도 내가 방금 씨앗을 심은 게 맞나 의심하게 되는 크기였다.
그렇게 토마토와 바질씨앗은 거의 반년 가까이 기다린 후 땅에 심길 수 있었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지만 비닐봉지 안에서 빼앗겨 버릴 작은 씨앗들의 기회가 이불 밑에 깔린 완두콩처럼 나를 찔러 댄 것이 그나마 여름이 다 가기 전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다고 내가 완두콩 공주님처럼 잠자리를 가린다는 건 아니다.)
바늘 끝으로 찔러놓은 것 같이 작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니 연필심으로 찌른 것처럼 싹이 났다.
그것도 아주아주 작은 새싹이었다.
빨간 화분에 담긴 걸 보니 토마토 씨앗이 확실했다.
씨앗은 욕심 껏 물과 양분을 빨아들여
처음엔 길었다가,
그다음엔 두 갈래로 갈라져 각각의 잎을 키우다가
또 그 사이로 새로운 잎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바질 화분엔 흙만 담겨있었다.
날은 여전히 더웠고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일상의 모든 것이 불편해지면서
인내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도 인내하지 못할 정도로 속 좁은 인간이 되어가다가
나의 노력에 답하지 않는 이 괘씸한 화분을 버리려고 화가 난 마음 그대로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때,
흙 알갱이랑 섞여 거의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싹이 보였다.
햇빛에 각도를 달리 해 비춰 봐야 겨우 확실히 보일 정도로 작았지만 더없이 선명한 녹색이
'나 여기 있어.'
라고 확실히 소리치고 있었다.
심었던 씨앗 세 개 중, 딱 하나가 살아서 싹이 되었다.
그리고 토마토보다는 느리지만 확실히 살겠다는 의지를 갖고 자라났다.
보통 씨앗을 보면 희망이라던가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떠오르게 마련이지만,
내가 힘들어서 인지 나는 갓 싹을 틔운 씨앗이 삶에 대한 욕심으로 힘겹게 세상에 덤비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욕심스러운 녀석에게 요새 트렌드에 맞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침내 씨'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몸이 아파 한껏 올라온 나의 감성에 맞게
'그래. 쟤도 마침내 저렇게 싹을 틔웠는데, 나도.....'
라는 생각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탕웨이 씨와 박해일 씨의 숨 막히는 눈빛 연기가 '마침내'
를 그런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영화는 안 보고 그 장면만 봤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고작 작은 화분에게 화풀이하려던 게 부끄러울 정도로
마침내 씨는 잘 자라고 있다.
여전히 내 손가락 한마디를 겨우 넘는 크기이지만 오늘도 선풍기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그 뿌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참고로 마침내 씨 옆의 토마토는
탕웨이로 할까 박해일로 이름 지을까 아직 정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