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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Mar 10. 2022

영국인들은 '스토리'에 강하다(2)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함


영국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다른 무엇보다 독서 교육에 아주 열심이다. 아이들은 매일 독서 숙제를 하면서 어릴 때부터 스토리를 즐기는 독자로 자란다.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이야기의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고 생산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영국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그림책부터 성인을 위한 작품까지 다양한 연령층 대상의 폭넓은 작가군이 꽤나 탄탄하다. 그 결과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낳은 시대부터 J.K 롤링으로 이어지는 지금까지 생명력 강한 이야기들이 탄생한 스토리의 강국이 되었다. (지난 글 : ‘영국인들은 스토리에 강하다(1)’ 참고)


또한 영국의 초등학교에서는 Drama를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가르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그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감정을 느끼고 연기를 해 보는 경험을 갖는다. 이야기를 더 깊은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다. (지난 글 : ‘영국 학교에서는 Drama를 배운다’ 참고)

이 모든 것이 누적되어 작가와 배우 층이 두텁게 쌓이게 되니, 21세기 이야기 전달의 가장 주된 방식인 영화와 드라마에서 영국은 큰 힘을 갖고 있다.




이야기, 극, 드라마라는 것이 무엇일까? 왜 영국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모든 아이들에게 교육과정에까지 포함시켜 가르칠까? 물론, 정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평균적인 수준보다 훨씬 드라마와 이야기를 잘 몰랐던 사람이기 때문에 짐작되는 이유가 있다.


현대 인지과학 연구에서 과학자들은 ‘모방’이야말로 인간 학습의 가장 핵심적이면서 중요한 방식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우리 인간의 뇌 속에서 ‘거울 뉴런’이라는 신경다발의 존재를 확인하여, 타 개체의 행동이나 의도를 모방하는 것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 학습 방식이라는 것을 증명해 낸 것이다. 이러한 거울 뉴런을 통해 학습하는 것은 감정, 욕망, 의도, 협동, 공감, 사회작용 등 인간으로서 습득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아이는 엄마의 표정과 말을 따라 하면서 감정과 언어를 습득하며, 엄마 반응을 따라 하면서 사회적 상호관계를 배운다.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또래집단을 만나 서로를 모방하며 소속감과 정체성을 배운다. 교육기관에 들어가 교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질서, 규칙, 지식을 배우기 전까지 인간은 대체로 ‘모방’을 통해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운다.


하지만 가족, 또래집단, 교육기관에서 아이가 접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폭은 가족, 친구, 선생님까지 뿐이다. 거기서 있을 수 있는 상호작용의 종류는, 물론 적지는 않지만, 충분히 많지도 않다. 그에 따른 경험과 감정의 폭도 일정 수준 제한적이다.

한 사람이 직접 마주치고 경험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 더 다양한 시간적/공간적 배경, 여러 종류의 사람, 다양한 상호작용 방식, 더 폭넓은 감정과 언어, 사회관계를 배우는 수단이 바로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럴 때 주인공이 어떤 느낌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며, 그때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어떻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게 된다. 아이들은 직접 모든 상황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대리 체험을 할 수 있다.


이런 간접체험의 경험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상식과 규칙을 학습시키는 경로가 된다는 차원에서 사회적으로도 유용하지만, 인간이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유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 역사에서 어느 시대의 어떤 지역에든 이야기가 있었고 사랑받고 번성했던 것이 당연하다. 그 형식이 호메로스의 시대처럼 구전으로 이어지는 것이든, 양피지에 문자로 기록된 형태이든, 구텐베르크 이후 인쇄된 책의 형태이든, 라디오이든, 방송국이든, 요즘처럼 유튜브와 넷플릭스이든 말이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이런 ‘스토리를 통한 감정과 사회성 교육’ 이 부족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관찰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간주해도 좋을 것 같다.

어린 시절 기억을 살려 보면 내가 처음부터 이야기책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꽤 어린 나이부터 학습적인 영역으로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외부의 압박이 있었고 나의 개인적인 흥미나 특성도 하필 이런 학습적인 부분에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책을 많이 사 주셨지만 대체로 학습과 관련된 책들이었고, 나는 초등 저학년부터 이미 백과사전이나 과학책을 주로 읽었다. (엄마가 되고 보니 그게 참 희귀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릴 적 나는 진심으로 이 책들이 재미있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루 종일 혼자 내 방에 틀어박혀 책을 봤다.)

부모님은 이야기책과 소설은 공부에 도움이 안 된다며 대체로 권장하지 않았다. 또 TV와 관련해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기분전환으로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영화, 가요 프로그램, 예능 같은 것은 허용해 주었지만 내용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드라마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못 보게 했다.


물론 내가 100% 이 말에 따랐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 몰래 소설과 만화, 드라마도 조금씩 보긴 했다. 하지만 대체로 나는 말 잘 듣는 소위 ‘모범생’이었고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대체로 내 생활이 편안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전형적이며 보수적인 첫째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전형적인 이과인으로 컸다. 학창 시절 나는 수학의 엄정함이 좋았고 과학의 딱 떨어지는 인과관계가 마음에 들었다. 국어와 영어 등 언어의 모호함이 싫었고 그중에서도 본격적으로 모호함의 영역을 다루는 문학은 정말 질색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행동, 갈대 같은 마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불명확 모든 것이 이해할 수 없고 싫었다. 제멋대로인 인간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역사도 싫고 국어와 영어를 포함해 모든 언어들도 싫었다.

하지만 언어영역, 외국어영역, 사회나 역사 같은 싫어하는 과목도 독서 빨(?)로 웬만큼은 성적이 잘 나왔다. (비록 모호한 언어는 싫었지만 명확한 언어는 좋았으므로) 책 읽는 것을 좋아해 읽는 속도가 빨랐고 아는 단어와 지식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참 희한하게도, 고등학교까지는 내가 그리 잘못된 줄 모르고 살았다. 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아이가 성적이 잘 나오고 규율에 대체로 잘 따르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중, 여고를 나오는 동안 스스로든 부모님이든 교사든 아이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만도 했을 텐데. 의사소통이나 인간관계, 리더십 같은 덕목은 하나도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내신과 수능성적만을 추구하는 경쟁 체제에서는 그냥 다들 원래 그렇거나,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인간관계, 사회생활, 의사소통과 관련한 거의 모든 부분들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르며 뭔가 덜그덕거린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시절과 회사생활 모두 참 힘들었다. 모든 것을 겪고 난 지금은 쉽게 말하지만 당시 20대의 나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때 내가 찾은 방법은 대상관계심리학과 정신분석학, 진화생물학 같은 것들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심리학이 유행하던 때도 아니어서 관련 책들이 많지는 않았다. 대중서도 봤고 대학교재 같은 것도 사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방식은 나름 도움이 되었다. 내가 왜 이런지 저 사람은 왜 저런지 과학적 인과관계로 상당 부분 설명이 되었으므로.


그때 ‘잘 쓰여진 소설’ 또한 인간 심리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소설은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대체로 상황 설정의 기발함이나 등장인물들의 특이성 같은 것으로 자극적인 재미와 신선함, 충격을 주려는 책이 많았고 과잉된 공감을 유도하는 책이 많았다. 그나마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한 편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성공 여부는 불확실하고 투입되는 시간은 많은 비효율적인 교재라 느껴져 가끔 부교재로 썼을 뿐 본격적으로 많이 보진 않았다.


그때도 여전히 드라마나 영화 등 콘텐츠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집에는 TV가 없었고 남들 다 보는 드라마도 아는 것이 없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배우라는데 나만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살짝, 경멸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TV에 현실 도피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보는 드라마/영화 또한 문학작품들처럼 (가끔) 웰메이드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 오감만을 자극하는 경우나 심지어 막장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책에 비해 영상콘텐츠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고 내가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었다. 모든 시간을 들인 후 결국 콘텐츠가 마음에 들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조급했는지) 그 시간이 아까워서 나는 대체로 책, 비문학을 봤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나 또한 세상의 모든 엄마 된 사람들이 하는 경험, 즉, 유년기를 다시 겪어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속도로,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바닥부터 시작하는 그것들을. 첫 번째 눈맞춤, 옹알이, 베이비 토크, 까꿍놀이, 잠자리 독서 같은 것들을 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엄마이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서, 이 이야기가 아이에게 어떤 의미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내 안의 빈 구석이 비로소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는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큰 도구이고 사회성을 획득하는 가장 큰 교과서이다. 언어를 다루고 상호작용을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선생님이다. 아이에게는 이야기책이 정말 중요하다. TV와 드라마와 영화 또한 (일부 유해한 콘텐츠도 있겠고 과도한 것은 나쁘겠지만) 중요하다.


막연하게나마 이런 깨달음을 갖고 있던 중 영국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 1학년에 다니는 아이를 통해 영국인들이 스토리에 대해 얼마나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하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낸 후 근대적인 형태의 교육이 시작된 지 겨우 70년 남짓 된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더 긴 세월 초강대국으로서 안정적인 국민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던 영국은 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는 나 같은 경험을 가진 성인으로 크지는 않겠구나 싶다.



한국은, 내가 컸던 90년대와는 좀 달라졌을까?

이제는 부모 된 입장에서, 내 아이가 20살까지만이 아니라 그 이후 인생까지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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