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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Jun 21. 2022

영국인들의 패션 스타일

그리고 나의 꽃무늬 혼란 증후군 극복기

런던의 평범한 주거지역에 살면서 평범한 영국인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들의 패션이 유난히 지루하고 뻔하다는 사실과, 남성 – 여성의 스타일이 매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영국 사람들은 기능적이며 대체로 예외 없이 예측 가능한 정형화된 옷차림을 한다. 실용적이면서 단정하며, 카테고리가 확실한 기본 아이템들이다. 새로운 실루엣은 거의 없고, 옷을 잘 입는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도 보기 어렵다.

그리고 남녀의 차이가 아주 확실하다. 남자들은 매일 같은 걸 입어도 눈치를 못 챌 것 같은 비슷한 셔츠, 바지, 재킷 같은 것을 입고 다니며, 가끔 목적에 따라 축구, 테니스, 조깅 등 운동복을 입는다. 색상도 아주 단조롭다. 대체로 어두운 톤의 검정, 회색, 네이비, 초록, 흰색 정도? 옷이나 외모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마초 느낌이 물씬 난다.

여자들은 (비슷한 소득 수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원피스나 스커트를 많이 입는다. 컬러도 쨍하거나 밝은 색이 많다. 핑크와 오렌지, 노랑, 연보라색, 혹은 정말 쨍하고 선명한 그린이나 블루 같은 색상들. 그게 아니면 레깅스에 운동복 차림인데, 이건 또 너무 기능적인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남녀 차이는 아이들 때부터 너무 확실하고 극단적이어서, 남자아이들 옷이나 물건 중에선 밝은 컬러를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고 여자아이들 것들 중에서는 차분한 컬러를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Boy 코너는 색상뿐 아니라 무늬나 프린트도 사실적으로 그려진 공룡, 스파이더맨, 닌자 이런 것들로서 하나같이 어둡고 굵고 거칠고 남성스럽다. 반면 공주, 유니콘, 레이스, 리본 같은 것들로 채워진 Girls 코너는 너무 현란하고 가볍고 샤랄라 해서 정신 사납다.

그러다가 모든 컬러가 갑자기 확 죽어버리는 아동복 코너가 있으니, 그건 바로 교복 코너이다. 교복은 검정, 네이비, 짙은 초록, 회색 같은 색상이 대부분이다. 교복 중 밝은 색은 흰 셔츠와, 여자아이들의 서머 드레스(하복), 운동복뿐이다.

이런 ‘교복’으로 대표되는 규율에 대한 반항심인지, 10대 후반~20대 초반 청년(대체로 여성)들의 패션 중 극도로 펑키한 부류가 또 있다. 여기저기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하거나 머리를 현란하게 물들이고, 스모키 메이크업에 징이 박힌 검은 가죽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패션도 개성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반항’이라는 정형화된 범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지극히 영국다운 또 하나의 패션 카테고리랄까? 그만큼 꽤 흔하다.


 

영국 여자들의 패션 중 내 눈에 특히 신기해 보이는 것은 바로 ‘꽃무늬 드레스’의 범람이다. (참고로, 다들 아시겠지만 여기서는 우리나라에서 ‘원피스’라 부르는 것들을 죄다 ‘드레스’라고 말한다.)

내게는 이 플로럴 패턴이라는 것이 참 어려운 아이템이다. 웬만해선 세련되게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세련된 꽃무늬를 만난다면 멋진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자주 써먹을 수는 없는 아이템이다. 아주 가끔씩, 절제해서 써야만 멋질 수 있는 까다로운 것. 그것이 내게 꽃무늬의 이미지이다.

아, 그런데 영국 여자들은 꽃무늬를 정말 많이 입는다. 저것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내가 촌스러운 건가? 촌스러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촌스러운 건가? 꽃무늬 원피스를 너무 많이 마주치다 보니 사십여 년 간 형성된 미적 기준(?)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영국적인’ 꽃무늬를 혹시나 베르사체 혹은 돌체&가바나 류의 원색적인 남부 이탈리아 느낌과 헷갈리면 안 된다. 캐스 키드슨의 현란한 꽃무늬를 상상하면 된다. 한국에서 캐스 키드슨은 예외적이고 유난스러운 꽃무늬 브랜드라고 생각했는데, 영국에서 그런 꽃무늬는 브랜드를 불문하고 출시하는 흔한 것이었고 영국 여자들은 그런 옷을 사서 입고 다니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꽃무늬가 침구류, 앞치마, 식탁보나 티 타월 등 테이블웨어, 커튼이나 벽지 정도에 활용된다면 영국의 전원 선호 취향과 맞물려 자연스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하지만, 옷이라면?


 

글쎄, 그래도 어린아이들을 위한 원피스 정도는 귀엽거나 사랑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만 6세 딸아이에게 “이 원피스 어때?” 하고 의견을 물었다. 아이의 대답. “음… 나쁘진 않은데, 꽃이 ‘너~무’ 많아요. (대신 파스텔톤 컬러에 가는 흰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원피스를 고르며) 이 정도는 괜찮아요.”

취향도 유전이 되는 걸까? 아니면 엄마가 평소 입고 쓰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어디서 온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 딸도 페미닌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영국 남자들의 스타일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스포츠 머리와 우락부락한 체형이다. 수염은 깔끔하게 면도하는 사람, 짧은 길이로 다듬는 사람, 덥수룩하게 기르는 사람 다양하지만 머리만은 다들 빡빡 밀었다. 거기에 대체로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매이다. 물론 나이나 관리 상태에 따라 배 크기나 전체적인 쉐입은 다양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전형적인 미국 문화에서도(동부의 랄프로렌 스타일이든 서부의 아베크롬비 스타일이든) 근육질 남성을 선호하니 영미 문화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확실한 차이점은 영국인들의 피부는 (아무리 여름 한철 상의를 훌렁 벗고 공원에 누워 있어 본들) 창백하고 핑크색이지만 미국인들은 구릿빛으로 태닝 된 피부라는 것? 그리고 미국에 비하면 영국인들이 약간은 더 단정한(포멀한) 편이라는 것 정도이다.


 


 

영국에서 꽃무늬 드레스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어느덧 그것이 평범하게 느껴지려던 즈음, (심지어 한 벌 사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뱅크 홀리데이를 맞아 프랑스로 가족여행을 짧게 다녀왔다.

오! 이것이었다. 영국에서 느꼈던 어색함의 정체가 단번에 파악되었다.

영국에서 남녀의 스타일이 대체로 양 극단에 몰려 있는 것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남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프랑스 스타일을 한 마디로 하자면 ‘프렌치 시크’이다. 너무 페미닌하지도 매스큘린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스타일에 컬러마저도 뉴트럴한 것을 많이 쓴다.

여자들은 무채색의 재킷과 셔츠, 바지, 플랫슈즈나 로퍼를 신는다. 화장을 하더라도 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한두 군데만 힘을 주고 액세서리든 네일이든 슈즈든 디테일에서 여성스러움을 조금은 가미하더라도 개수를 제한하고 전체적으로는 시크함을 유지한다.

프랑스 남자들은 상대적으로 긴 머리가 많고, 영국에 비해 훨씬 호리호리한, ‘덜 근육질인’ 몸을 하고 있다. 영국에서 흔히 보는 짧은 머리의 우락부락한 근육질 남성은 흔치 않다. 프랑스 남자들은 영국에 비해 (좀 오래된 용어이긴 한 것 같지만) ‘꽃미남’ 혹은 ‘훈남’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선호 스타일과 훨씬 가깝다.

재미있는 사실은, 파리에서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놀러 온 영국 여성들 뿐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상남자’ 스타일의 남성과 함께 다닌다면(그리고 피부는 아주 희거나 핑크색이라면) 거의 100% 확률로 영국인이었다. (가까이에서 그들의 대화를 살짝 엿들어보면 영국식 영어를 들을 수 있다!)


 

파리에 다녀오고 나서, 그제야 나는 ‘플로랄 패턴 디스오더’ (내 눈에는 꽃무늬 드레스가 이상해 보이는데 모두가 그것을 입고 있어서 내 눈이 이상한 것인지를 의심하며 저 꽃무늬 드레스를 사 입어 볼까 말까 하는 심리적 갈등 상태 - 내가 지은 이름)에서 벗어났다.


 




(+) 노파심에 덧붙이는 말

하나. 패션과 스타일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은 (‘보그체’라고도 불리는) 수식적이며 과장된, 외국어를 과도하게 많이 섞어 쓰는 문체를 조금 흉내 낸 것 같다. 재미로 봐주시기를.

둘. 영국인, 프랑스인, 한국인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대체적인, 통계적인 ‘경향성’을 말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셋. 꽃무늬 드레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국에도 많다. 이런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취향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취향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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