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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백로 ; 백로의 눈물

by 차정률


백로(白露) ; 흰 이슬



2025.9.7.(일)

최저 온도 20도, 최고 온도 28도

흐린 날씨, 전국 곳곳에 비


떠나도 괜찮은 계절


백로는 흰 이슬이다. 풀잎에 알알이 물이 맺히는 것은 그만큼 밤이 서늘해져서이다. 아침 첫 공기가 불쑥 달라졌다. 올해는 참으로 더위가 더디떠나서 만나는 사람마다 찬공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아직 반팔을 입지만 이제 가을이라고 이야기 해도 마음 속에 걸리는 것이 없을 듯하다.


며칠간은 비가 내려서 아침공기가 더 깨끗하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에서 다른 계절의 기운을 마신다. 백로에 비가 오면 풍년의 징조라고 하던 옛사람들은 오늘의 날씨는 마음에 들어할까, 내가 있는 동네는 잔뜩 흐리지만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한다. 다만, 강바닥이 드러난 강릉은 여전히 비가 오지 않아 사람들이 생수를 보내 돕고 있다. 강릉의 가뭄이 걱정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가 오래 더위를 겪어서 이다. 우리가 문명의 편의로 잊었던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조건, 물과 쾌적한 환경 같은 것들이 현대인들의 만연한 부족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어린다.


백로는 대개 음력 8월 초순에 들지만 간혹 7월 말에 들기도 한다. 7월에 든 백로는 계절이 빨라 참외나 오이가 잘 된다고 한다. 한편 8월 백로에 비가 오면 대풍이라고 생각한다. 경남 섬지방에서는 “8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늘린다.”라는 말이 전하면서 비가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생각한다. 또 백로 무렵이면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시작하고, 고된 여름농사를 다 짓고 추수할 때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이므로 부녀자들은 근친을 가기도 한다.
_한국민속대백과사전 '백로'


서늘한 기운에 마음이 들떴을 어떤 여인들을 생각해본다. 허리 펼 수 없는 시댁 살이에 땡볕의 논밭에서 여름 내내 일하다가 잠시 쉴 수 있는 백로의 시간이 되면, 시집간 딸들은 허락을 구해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를 근친(覲親: 뵐 근·부모 친)혹은 귀녕(歸寧)이라고도 했다. 출가외인으로 죽어서도 시댁의 귀신으로 살아야 했던 과거의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절이다. 햇곡식으로 만든 떡이나 술을 든든히 들고 만난 얼굴들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흘렀을까. 어떤 이들은 외로움과 핍박에, 어떤 이들은 그리움에, 또 어떤 이들은 부모의 늙어가는 얼굴에, 아마도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이가 아무리 먹어도, 매일 엄마를 보고도 또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엄마고 집이 아닌가. 어서어서 이슬이 내려라, 밤이 깊도록 중얼거리는 나보다 어린 여인네들을 생각해본다.




백로의 슬픔


흐린 하늘이었다. 아이들이 문화센터에 가는 날이었다. 좋아하는 일들을 하고 잔뜩 기운이 오른 아이들과 산책을 다녀오는 길이기도 했다.


천천히 가자는 마음에 아무 길이나 들었는데, 하필이면 내가 아는 가장 나쁜 길로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주 짧은 초록불에 줄이 길어 신호를 3번을 받았는데도 넘지 못했다. 엑셀을 밟으려다 브레이크를 밟으니, 옆에 앉은 엄마는 잔소리를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도 들을 때마다 타격감이 있다. 아이는 덜컹거리는 차가 왜 그랬냐며 소리를 높이고, 그 사이 기차가 지나갔다. 아이들은 기차를 볼 때마다 큰 소리로 말해야하는 병을 가지고 있다.



오래기다리던 초록불에 엑셀을 밟았는데, 차가 뒤로 간다. 뒷차와 내 차가 부적절하게 만났다. 내 마음이 하늘 만큼 흐려진다. 나는 "죄송해요"를 몇번이나 말했을까. 다행히 뒷차의 운전석에 내리신 분이 웃으면서 나오신다.


엄마는 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한켠으로는 그래, 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고 그런 말을 왜해, 하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머리가 제법 굵어진 아이는 사고에 대해 묻고, 나의 사과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라고 말한다. 우리, 서로 참 많이 미안해하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이.


흰 이슬이라는 백로가 사실은 눈물이었던가. 맹글맹글 오늘은 물기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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