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의 우려처럼 "이제 공산주의가 아니라 전근대 전통 복고주의의 이름으로 우리의 반미투쟁을 이어나가자. 푸틴 두긴 만세!" 하는 책은 아니다. 작가가 생각보다 온건한 사람이었건, 혹은 '그런 걸' 내심 원했지만 문화계의 각종 검열들을 우회하기 위한 전략을 편 것이건, 쨋든 책은 꽤 객관적인 관점에서 작금의 러시아와 제3세계의 새로운(?) 전통보수주의의 기류에 대해 논평한다.
(전통보수주의의 범 세계적 재창궐은 현재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는 입장인데 이는 필자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2. 문장도 매우 훌륭하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아 문해력이 처참한 수준인 필자가 글을 순조롭게 읽을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문장이 매끄럽고 깔끔하다는 의미이다.
3. 다만 아쉬운 점은, 필자처럼 '러시아와 전통보수주의의 범 세계적 재창궐'문제에 평소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 입장에서 달리 새롭다 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두긴, 블라디미르 푸틴, 에르도안, 모디, 오르반 등등 대부분 이야기가 이미 알고 있었을 법한 선에서 전개된다.
'전통보수주의의 범세계적 재창궐' 문제에 대해 전혀 일면식이 없었던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로는 썩 괜찮을 듯싶다.
4. 아마도 상술한 '검열' 때문이었겠지만, 전통보수주의 재창궐 문제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빠져선 안 되는 '페미 피씨에 대한 범 세계적 반감 확산'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건 아쉬운 부분이다. 저자는 거의 대부분의 장에서 '페미/피씨'가 아니라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라는, 다소 온건한(그래서 이미 손쉽게 수도 없이 물어뜯겨온..) 어휘를 사용할 뿐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너무나 모호하기 때문에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가 문제"라고 말할 경우 대부분 사람들 입장에선 너무 상투적이고도 피상적이라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부분을 저자 스스로 지적한듯한 대목도 있다. '서구식 자유주의'라는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해서 그 의미가 불투명하다고..)
어서 세상이 바뀌어 출판 문화계에서 페미 피씨 문제를 더욱 적극적이고도 노골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