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이 의제를 회피할 것인가?
2024년 미국 대선은 트럼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세상에 정말 많은 변화가 찾아올 예정이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한국은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울 것인데, 그만큼 우리도 격변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불확실한 시국 속에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 하나하나가 한국의 내일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 학계에선 우리가 앞으로 직면하게 될 외교적, 경제적 문제상황들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놓고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립외교, 내수경제 내지 핵무장과 같은 안건들을 놓고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못잖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해 보이지만 제도권이 애써 다루려 하지 않는 어떤 의제가 있다. 이번 미국 대선과 근래 유럽에서 열린 여러 선거를 거치며 드러나고 있는 PC(정치적 올바름)주의 리버럴의 한계점에 대한 논의 말이다.
PC와 페미니즘,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리버럴 이념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주장은 2016년 트럼프 당선 때부터 제기되었지만, 8년의 기간 동안 세상의 진보좌파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트럼피즘의 득세 속에서도 리버럴의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점들을 진지하게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이 현상을 경제불황 내지 SNS에 의한 일시적 부작용 즈음으로 치부해 넘기려 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 같은 우익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 '저학력 백인 빈민'이 문제라고 질책함으로써 자신의 불관용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오직 소수만이 기존 리버럴 세계관의 문제점들을 지적했는데,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소수이다.
그러나 기존 리버럴 노선이 이젠 한계에 봉착했음은, 아무리 두 눈을 가리고서 회피하고 싶다 해도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2016년 이후 리버럴은 계속해서 패배해 왔다. 2010년대 후반 유럽에서 네오나치의 약진, 퇴진 이후에도 계속됐던 트럼프의 영향력, 딥스테이트 음모론의 대중적 확산, 프랑스에서 마린 르펜의 지속적인 부상, 유럽의회 선거에서 진보좌파 진영의 고전, 국내에서 정의당의 참패 등등, PC주의를 앞세우던 리버럴이 선거에서 우익 포퓰리즘에게 밀린 사례들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
리버럴은 지금도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유일한 도덕적 진리로 자처하려 하지만 이제 세상을 이를 의심한다. 리버럴들은 자기들의 경직된 도덕관을 세상에 강요하면서 대중 다수의 관점은 무시하고 모멸했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을 명분으로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억압했으며 문화를 검열했다. 그들은 국가와 문명을 통합하는데 실패했고, 대자본의 힘에 편승하였다. 입으로는 항상 다양성을 떠들었지만 정작 많은 이들을 포용해내지 못했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악의 낙인을 찍어 공론장에서 배제시키느라 바빴다. 그 결과 민심을 잃었으며, 더 나아가 직간접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약화시켰다. 공론장에서 배제된 이들은 리버럴이 떠들던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극우가 번식할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그렇게 2016년 트럼프에게 패배한 이후 8년의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리버럴은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음으로써 또다시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야 말았다.
리버럴의 한계는 이제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리버럴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면 이제 누가 이들의 자리를 대체해야 하는가? 어떻게 시민 모두와 함께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시민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통합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해 낼 것인가? 초기 근대 계몽주의 이래로 무정부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마르크시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 무수한 이념이 나타났지만, 이들은 모두 위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리버럴을 대체할 새로운 가치체계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여기에 우리의 역할이 있다. 특히 기성 정치담론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며 나타난 우리 공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겐 기존 리버럴의 한계를 비판하고, 리버럴과 권위주의 모두를 넘어서 시민과 민주주의, 과학기술, 인본주의, 그리고 우리의 삶을 보호하고 발전시킬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이 트럼프가 당선되고 리버럴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상이다. 고로 우리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사색하며, 새 시대의 사상을 숙성시켜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한계에 봉착한 리버럴의 자리를 대신하여 전체주의에 맞서 싸울 다음 시대의 사상을 잉태하고자 하며, 적어도 거기에 일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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