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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Jun 17. 2024

너는 꼭 필요하지만 드러나지마

천운영의 장편소설 생강

도서관에 책 반납하는 날이다.

그렇게 바쁘지 않았는데도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안 읽히는 글을 입으로라도 읽어본다.

그렇게 읽은 글이 엄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읽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반납하고 재대출 하기로 했다.

그 책은 바로 천운영 작가님의 [반의 반의 반]이었다.

다시 보게 되니 작가님의 이름이 눈에 걸렸다.

그래서 작가님의 다른 소설. [생강]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생강.

향긋하고 몸에도 좋다.

왜 소설이름이 생강일까.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펼쳤다.


1970년대부터 1988년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작가의 필력에 금방 소설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아름다워야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결과물을 가져와야 한다.

고문기술자는 정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사람의 신의라는 것은 자신의 눈을 가릴 만큼 강력한 것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윗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 그뿐이다.

안 잠적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의 고문기술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아버지는 참새를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참새를 잡는 방법은 상대를 안심시키면서 찰나의 순간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배운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으로 또 다른 아버지인 권력자. 박에게 충성심을 보여줄 기회를 얻고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낸다.

덕분에 조직 안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고, 나의 별명은 장의사집 둘째 사장이 된다.

조직 내에서 내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내 집 울타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아내는 예쁜 손으로 초원미용실을 꾸려 사람들의 머리를 말아주는 일을 한다.

어여쁜 딸은 고명딸로서 똑똑하고 당당하게 잘 자란다.

시간이 흘러 딸이 대학생이 될 무렵, 정권 역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나는 단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도망자가 되어 조직의 다른 명을 기다리라는 지령을 받았다.

손에 쥐어진 것은 단돈 3백만 원. 그리고 그의 도망이 시작된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딸은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하다.

엄마는 의연해 보이면서도 불안해 보였다.

집 앞에는 모르는 남자들이 기웃대며 아버지를 찾아대고, 어머니는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대학가는 전체가 민주화 운동 중에 있었다.

아버지 얼굴이 나온 사진이 신문에 도배되어 있다.

딸은 아버지가 고문전문가로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갑작스레 멀어진다.

호감을 가졌던 남자에게 아빠가 잠적중인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을 말한다.

사랑이 시작되려다 식어버렸다.

딸은 겉잡을 수없이 강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집 앞을 배회한다.

학교도 싫다. 사람도 싫다.

황망히 사라졌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망자인지, 고문기술자인지, 아버지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환영한다.

딸의 다락방에 아버지가 숨어 지내면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 기반해 작가가 그려낸 한 사람, 아니 한 가족의 삶이 글에서 보였다.

나쁜 일의 시작.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네가 했어야만 했을까.

누구나 마음속에 불씨를 품고 살 것이다.

그것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일 수도 있고, 정직하고자 하는 마음일 수도 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는 사람들이 이런 안 좋은 일을 만들어낸다.

조직에 충성할만한, 뒷배경이 없는 철저한 외톨이들이 표적이 된다.

적당한 칭찬과 두둑한 뒷주머니로 외톨이들이 만든 아름다운 결과물에 충분한 보상을 한다.

조직과 한 몸이 되었다고 생각한 외톨이들은 상사를 아버지로 받들어 모신다.

썩으면 잘라내는 불가사리의 다리처럼 한순간에 잘릴 거라는 상상은 절대 하지 않은 것처럼.

처절하게 버려진다.

모든 잘못을 한정된 외톨이들에게 지어버리고 다시 싱싱한 불가사리로 거듭난다.

버려진 외톨이들에게만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연좌제.

분명 공직생활을 하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사라지기 전까지, 신문에서 아버지 얼굴을 만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외면할 뿐이다.

외톨이의 가족도 같이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절대적인 내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처절한 현실은 직접 겪어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

딸의 이름은 바로 선이었다.

그러나 마냥 선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연락을 끊은 친구를 끊임없이 찾아가 헤어짐의 이유를 들으려 했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진실을 말했다.

올바르고 착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도덕적 관념을 가진 선이었다.

아버지의 도피생활에 끝까지 책임을 진 사람은 바로 선이었으니까.

천륜과 윤리.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한 선택을 할 사람이 있을까.

피해자의 삶도 가엾고, 죄인처럼 살아야 하는 자신도 가엾다.

그저 아버지가 마법처럼 사라져 버리길 바랄 뿐이었다.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이다.

이근안.

박정희 시대를 거쳐 전두환 정권까지 고문전문가로서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학생, 북으로 강제피랍되었다가 돌아온 예비역까지 고문으로 척추가 녹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린 악명 높은 악당이었다.

1988년 3월 돌연 사직서를 내고 10년 10개월간의 도주생활을 한다.

관련자들의 판결이 끝나는 1999년 9월에서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스스로 자수한다.

법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혹은 그의 조력자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공소시효라는 법의 혜택을 받아 하나의 혐의로 징역 7년의 형을 받고, 2006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그는 뻔뻔하게도 출소 후 스스로 회개하였다 말하고 다니며 목사안수를 받는다.

목사로 강연을 다니면서 당시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끊임없는 논란을 양성하면서 다니다가 결국 목사자리도 면직당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람이다.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정의롭지 못한 판결과 그러한 결과가 양산해 낸 사실이 퍽 슬프게 다가왔다.

피해자만 억울하고 힘들다.

내가 직접 당한 일은 아니라도 나쁜 사람은 엄한 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그래서 나쁜 악당을 처치하는 슈퍼맨과 비질란테를 사람들이 응원하는지도 모른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바른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낸다면 억울한 일이 좀 더 줄어들지 않을까.

요즘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바로 업보다.

자신이 행한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운명.

그렇게 법의 가벼운 판결을 받은 이근안의 가족은 처와 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교통사고가 나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막내아들은 지병인 당뇨로 일찍 삶을 마감한다.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아내의 수입에 기대어 살다가 지금은 아내가 요양원에 있어 수입이 없는 이근안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것이 바로 업보인 듯하다.

내가 지은 죄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사람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고, 남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억울한 사람 없는 세상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

김치에 꼭 필요한 재료지만 씹으면 맵고 써서 바로 뱉게 되는 생강처럼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들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생강의 의미를 톺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의 엄청난 필력에 감탄했다.

책을 덮고 한동안 여운에 잠겼다.

씁쓸한 현실을 마주했지만, 작은 소망 또한 가져본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영원하니까.

또 좋은 것을 함께하는 것은 더 좋으니까.

당신에게도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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