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취향 발견
얼마 전 부모님을 모시고 코타키나발루를 다녀왔다.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어쩐지 아직도 여독이 남아 있는 느낌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괜히 멍해질 때가 많고 현지에서 먹었던 싱싱했던 새우가 생각나면서 절로 입맛이 다셔진다. 작은 새우가 아닌 큰 새우를 prawn이라고 한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확실히 그동안 보았던 쉬림프와 달리 크고 유난히 오동통통했던 새우. 이렇게 생각날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먹을걸ㅜㅜ 1일 1씨푸드를 한 것 같은데 1일 2씨푸드를 하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쉽다.
이번 여행에서 새롭게 발견한 건 프론이라는 큰 새우뿐만이 아니다. 새삼 평소에는 몰랐던 부모님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빠의 청바지다.
아빠의 옷에 있어 내 지분은 상당하다. 성인이 되고부터 아빠의 옷을 주기적으로 사다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사 오는 옷을 아빠 역시 꽤 좋아하시는 눈치셨다. 보통 입는 스타일이 정해져 있다 보니 분위기가 비슷한 웰메이*, 인디*, 닥*와 같은 브랜드에서 옷을 사다 드리면 대부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중후하고 점잖은 스타일. 색상은 보통 녹색 아니면 남색. 이 범위에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빠의 옷 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내심 변화를 주고 싶었던 아빠의 속마음을 내가 그동안 읽지 못했던 것일까.
코타키나발루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형 쇼핑몰을 갔을 때의 일이다. 웬만해선 엄마와 내 옆에 딱 붙어서 다른 방향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던 아빠가 갑자기 보이질 않았다. 담배 피우러 나가셨나? 싶어 전화를 해보려던 찰나 저 멀리 남성복 코너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아빠였다. 아빠가 남성복 코너에서 보고 계신 것은 다름 아닌 청바지였다. 검은색의 수수한 청바지도 아닌 청색기가 아주 낭랑한 청바지 말이다.
'아빠가 왜 저걸 보고 계시지?'
의아해하며 다가가는 내게 아빠가 물었다.
"이거 사면 물 많이 빠지겠지?"
"보통 청바지들이 처음 빨면 다 그렇긴 하지. 근데 왜? 입어보게?"
"한 번 입어 볼까?"
"O-O?!"
아빠는 못 이기는 척하시며 내게 사이즈를 좀 봐달라고 했다. 한국과는 다른 기준으로 사이즈가 적혀 있던터라 어떤 바지를 골라야 할지 망설이고 계셨던 것이다. 본인의 사이즈를 듣고 나서 연한 색 하나, 진한 색 하나 청바지를 집어든 아빠. 양손에 청바지를 들고 자진해서 피팅룸에 들어가는 아빠를 나는 신기해서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중년층에서 저렇게 파란 청바지를 입은 건 소위 '멋쟁이들'이나 그런 줄만 알았다. 시니어 모델이거나 음악을 하시는 분들 아니면 적어도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말이다. 우리 아빠는 이러한 부류와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평소 엄마와 내가 온갖 성화를 하면 그때서야 마지못해 백화점에 따라 나왔지, 자발적으로 옷을 사는 일은 제로에 수렴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빠가 면바지도 아니고 청바지에 관심을 보일 줄이야!
처음에 피팅룸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냥 호기심에 입어 보시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피팅룸에 들어갔다가 나온 아빠의 양손에는 여전히 청바지가 들려 있었다. 반납을 도와드릴지 물어보는 점원에게 손으로 서투르게나마 사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내비치며 말이다.
그렇게 아빠는 한 벌에 이만 원짜리 청바지를 두 개나 득템 하셨다. 단순히 저렴해서 청바지를 구입하신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 곧바로 바지의 기장을 줄이시곤 어울리는 벨트를 찾아 추가 쇼핑까지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언제부터일까? 아빠의 마음속에 청바지가 들어온 시점이. 사뭇 궁금해진다.
처음엔 어색해 보였던 청바지. 하지만 자꾸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시는 것 같기도 하다. 입으면 대략 5년은 젊어지신 것 같은 모습이랄까. 코타키나발루에서 신발이며 지갑, 가방 등 많은 것들을 사 왔다. 하지만 가장 잘 쓴 소비가 뭐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아빠의 청바지라고 말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