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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엠 Jun 19. 2020

(20) 프로메테우스의 불꽃

기술과 윤리, 그리고 인문학

기술과 윤리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인문학도의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화적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불꽃입니다. 


Gustave Moreau: Prometheus (1868)


프로메테우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티탄족 출신인 프로메테우스는 어느날 신들의 왕 제우스로부터 지상에 생물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 여러 동물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모습을 닮은 생물을 빚는 데 오랜 시간 공들여서 열중했지만,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빠른 속도로 여러 형태의 동물을 만들어갔습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 제우스는 형제가 만든 생물에게 줄 선물을 챙겨줬습니다. 에피메테우스는 생물을 만드는 족족 제우스의 선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호랑이에게는 날카로운 이빨을, 코끼리에게는 튼튼한 상아와 긴 코를……. 그렇게 하다보니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형상을 닮은 생물을 완성하고 ‘인간'이란 이름을 붙여줄 때 쯤, 제우스의 선물은 모두 다 동이 나버렸습니다. 인간에게 줄 선물이 없자 고민하던 끝에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세계에서 가장 유용하게 쓰이는 ‘불’을 인간에게 주기로 결심합니다. 불이 있으면 두꺼운 가죽이나 털이 없어도 추위를 피할 수 있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없어도 무서운 동물들을 쫓을 수 있을테니까요. 


프로메테우스는 즉시 신들의 세계로 가 제우스에게 인간에게 불을 선물해주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제우스는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인간에게 쥐어주기엔 불은 너무나도 과분하고 위험하단 이유에서였지요.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불 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몰래 훔쳐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달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우스는 매우 노하여 프로메테우스에게 바위에 묶여 하루에 한 번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내리게 되죠.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으로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프로메테우스는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구해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프로메테우스와 불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재밌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도시다운 도시를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기술의 양면성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요. 불은 인간의 수명 연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기술입니다. 불이 없다면 지금쯤 우리는 아직도 정글에서 과일이나 따먹으면서 언제 호랑이나 아나콘다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생활을 이어나갔을지도 모릅니다. 불을 다룰 수 있었기에 인간은 추위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고, 음식을 조리하여 영양분 흡수가 수월해지니 수명과 체력, 지능이 갈 수록 발전했죠. 더 나아가 불을 이용해 소재를 가공하여 자연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도구와 공간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생활과 공간이 안정된 인간들은 점점 그 세력을 늘려나가고, 마침내 지금의 우리의 모습까지 도달했습니다. 불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불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불에 닿으면 다치는 건 당연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습니다. 불 앞에서 인간은 무력한 존재입니다. 런던 대화재와 같이 역사서에 기록된 끔찍한 규모의 화마가 얼마나 많은데요. 불에 의해 구원을 받은 인간 만큼 목숨을 빼앗긴 인간들도 수두룩합니다. 심지어 과학기술이 이렇게나 발전된 오늘날에도 불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걸요. 인간은 아직 불이라는 양면의 검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했습니다. 앗차 하는 순간 불은 도구에서 우리의 목숨을 빼앗는 악마로 변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는 불이 필요합니다. 위험하고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가스불을 켜서 저녁밥을 짓고, 물을 끓여 난방을 하고 전기를 만들어 이렇게 컴퓨터에 글을 씁니다. 


귀여운 캐스퍼 (하울의 움직이는 성)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그렇다면 불은 좋은 것인가요 아니면 나쁜 것인가요? 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이로울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불이 인류에게 이롭냐 해롭냐는 그 불이 붙여진 막대기의 끝을 쥐고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횃불을 캠프파이어 위에 두어 모두가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잠자리를 마련하면 그 불은 좋은 불이 되고, 누군가의 집 앞에 뿌린 석유 웅덩이에 던져버리면 그 불은 나쁜 불이 되겠죠. 기술의 윤리적 문제는 그 양날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합니다. 






하물며 인류 최초의 기술 중 하나라 말할 수 있는 불 마저 지금까지도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다른 기술은 어떻겠습니까? 모든 기술은 사용 여부에 따라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인간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술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들 뿐입니다. 기술이 최대한 인류와 지구에 해가 가지 않도록, 법을 만들고, 기술을 다룰 때 규칙을 준수하고, 모두가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기술을 사용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윤리의 모순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과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생각했던 뜻밖의 분야의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 하우스아르바이트때문에 기후변화와 지구 온난화에 대한 학술 텍스트를 읽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를 토대로 지구 온난화의 원인과 개념의 정의를 꽤 정확하게 제시하여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텍스트인데, 이 텍스트를 쓴 사람이 문학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수치와 데이터를 갖고 언어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이용해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그의 업적에 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과학이 이렇게 발전한 지금, 왜 여전히 대학에선 인문학을 가르칠까요? 왜 인문학은 그 계보가 계속 이어져야하고 보존되어야할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양면성의 칼을 예리하게 가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세를 보정하는 일 또한 우리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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