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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엠 Jan 16. 2020

(6) 예술의 자율성

하이데거 이야기를 꺼내니 필연적으로 장소와 공간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었습니다. 공간과 장소 중 어느 쪽이 선행하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뭐랄까, 이 두 개념 자체가 설명하기 복잡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개념 말고 뭔가가 더 있는 것 같단 말이죠. 인간과의 관계로 설정되는 장소와 추상화된 개념의 공간. 정말 이걸로 끝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설정한 인과관계가 없는 공간은 장소가 아닐까요? 또는 장소가 가져다주는 느낌이나 인상이 정말 100% 인간이 설정한 인과관계의 매커니즘에 따라 작동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를 알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전까지 해왔던 다양한 논의와 같이 수많은 철학적, 과학적, 수학적 접근들이 지금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예술철학에선 다소 고전일 수 있는 매우 문과적인(?) 접근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좀 전까지 계속되었던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한 공간이 건축가에게 주어집니다. 건축가는 이 공간을 장소로 바꾸기 위해 추상화 된 가상의 공간을 보며 고민합니다. 재질, 높이, 구조, 배치... 자신이 의도한 인상을 모두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장소를 설계합니다. 그리고 설계대로 장소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이 장소는 건축가의 상상을 현실에 재현한 레플리카로 모두에게 각인이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든 사람은 건축가지만, 이 예술로 승화된 장소는 건축가가 의도하지 않은 별개의 독자적인 의미와 영향을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예술의 자율성(Autonomy)라고 합니다. 



‘예술의 자율성’ 개념은 한 마디로 “예술의 자유”입니다. 예술을 모방의 개념으로 보았던 이전의 견해와는 달리 예술작품 그 자체가 인간의 도덕적, 미적 판단의 대상에서 벗어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바로 예술의 자율성입니다. 이 예술의 자율성 덕분에 예술 자체는 물론이고 창작자와 감상자 또한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얻었죠. 도덕적, 사회적 잣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예술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하려는 시도가 예술의 자율성이란 이름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방가르드,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 그리고 더 나아가 현대의 실험적인 예술작품들이 이러한 예술의 예에 해당한다 볼 수 있습니다. ‘예술가’라는 직업의 종류가 생긴 것도 바로 예술의 자율성의 비호 아래였죠. 지금은 이 개념이 확대되어 이러한 창작물을 만드는 예술가 직업군이 음악가와 화가에 그치지 않고 지금은 건축가, 재봉사와 같은 과거 장인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업군까지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Wassily Kandinsky: Ohne Titel (1923), Sotheby's



이 개념은 또한 창작자 뿐 만이 아니라 감상자에게도 예술의 자유를 선사하였습니다. 이전에는 사회가 규정한 도덕적 규범에 따라서만 예술작품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해석할 수 있었지만 예술의 자율성 개념이 나타난 후 부터는 감상자의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해졌죠. 만약 이러한 예술의 자율성이 없었다면 벤야민이나 아도르노의 미학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오르세 기차역이 미술관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감상의 자유가 없었다면 감상자를 위해 모두에게 개방된 박물관 또한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루벤스가 그린 예수님을 보고 얼굴이 참 섹시하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어디 감히 신성한 예수님의 형상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예수님의 얼굴 따위나 뜯어먹고 있나요.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독실한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Peter Paul Rubens: Ecce Homo (1612), Hermitage Museum






무엇보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 작품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술작품이 도덕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추상적, 상징적 모방이 아닌 “예술”이 될 자유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창작자가 만들어 낸 예술작품들은 그 종류만큼 다양한 감상을 부여받으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나갔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예술작품의 가치의 원인이 단순히 창작자의 의도와 인과관계 또는 감상자의 경향이라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가 예술이 된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가치를 갖는 무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다시 예술에 돌아옵니다: “왜 저게 예술이지?” 자, 이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찾는 역학조사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 해답을 찾는 날이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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