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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부부 초고속 청산, 어쩌다 카페 사장

꿈을 이룬 게 맞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by 한고운

지난 1년은 역대급으로 파란만장했다. 아무 연고 없이 서울에서 강릉으로 주거지를 옮겼고, 안정적 직장인이던 남편이 회사를 화끈하게 그만두고 부부가 의기투합하여 자영업자가 되었으니까. 크고 작은 변화를 겪으며 단련되는 나날이었다. 혹독한 시련도 겪었고, 수많은 결정장애로 골머리를 앓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뿌듯함과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강릉에 정착한 후 초반에는 주말부부로 지냈다. 우리에게는 비장의 무기 KTX가 있기에 최소한 출퇴근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2시간이면 서울땅에 닿을 수 있으니, 주중에는 남편이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회사를 다녔다. 금요일이면 업무 종료와 동시에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강릉으로 복귀하여 네 식구가 온전히 주말을 함께 보냈다. 마당의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한적한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경포호수와 바닷길을 신나게 달렸다. 물론 월요일마다 이른 아침 KTX역에 남편을 내려주고 와서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하는 게 신없긴 했지만 그래도 감당할만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은 아이들이었다. 서울에 있는 아빠를 애타게 그리워할 줄이야. 평소에도 워낙 야근이 일상이라 밤늦은 퇴근이 대다수였기에 주중에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완전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아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나 보다. 네 식구 온전체가 함께 지낸다는 게 그동안 당연한 줄 알았는데, 이토록 소중한 것인 줄 몰랐다.


최종적으로 남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엉뚱하게도 동물들의 활약이다. 언젠가 야심한 밤에 인기척이 들려 도둑인 줄 알고 촉각을 곤두세우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알고 보니 고양이 식구들의 만행이었던 것으로 밝혀지며 김이 빠지긴 했지만 당시로서 나는 너무 공포스러웠다.


마당에서는 죽은 쥐 그리고 연이어 죽은 새까지...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주중에 발생할 때마다 남편의 존재가 절실했다. 그가 있었더라면 앞장서서 척척 처리해 줬을 텐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종이 박스로 덮어놓는, 그야말로 임시방편에 불과한 액션이 최선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남편 역시 위기 상황에서는 더더욱 본인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내지는 경각심이 들었나 보다. 결국은 예정보다도 훨씬 빠르게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과감히 청산했다.

퇴사 축하 파티의 현장. 핸드 메이드 사탕 목걸이와 현수막, 케이크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독주택에 1년을 거주하는 동안 동물 사체들이 발견되는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여전히 주말부부로 지냈을 테니. 아무튼 당장 새로운 사업을 할 자신도, 여력도 없던 터라 얼마 안 되어 강릉의 한 회사로 취업을 했다.


나름 규모 있는 한 호텔의 홍보팀 팀장으로 근무하게 되어 한시름 놓겠구나 싶었는데, 이 또한 순탄치 않았다. 호텔의 특성상 주말과 휴일에 도통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갖은 행사가 줄줄이 이어졌고, 아이들이 아빠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일방통행 의사소통 방식과 강압적인 분위기도 한몫했다. 스트레스로 이명 현상과 어지럼증이 재발하며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어딜 가나 일 벌이기 좋아하고, 업무 성과로 인정받는 남편도 이쯤 되니 사기가 제대로 꺾였다. 서울에 비해 급여는 택도 없이 낮은 데다가, 업무 강도는 훨씬 높은 상황이라니,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우리 가족, 이러려고 강릉에 온 게 아닌데...'


더 이상 직장에 매여있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회사에 투입되는 에너지의 절반만 써도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 초대형 행사들이 밀려오고 있었던 터라, 비겁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안 그랬다가는 책임자로서 옴팡 뒤 짚어 쓰고 된통 당할 일만 남았으니.


제삼자인 내가 보더라도, 대행사 없이 소수의 홍보팀 인원으로만 감당할 수준의 행사 규모가 아니었다. 결국 팀장인 남편을 비롯해 급기야 팀원들까지 대대적으로 사표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로 당시 홍보팀 규모의 약 3배 정도 되는 인원을 충원해서 겨우 사업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몇 달 사이에 서울의 직장인에서, 강릉 현지의 직장인으로, 그리고 자영업자로 무려 3단 변신을 거쳤다. 다양한 삶을 겪어봤기에 더 이상 조직에 소속되지 않음에 미련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면 분명 후회가 남았을 텐데, 이런 실패의 경험도 어쩌면 꼭 필요했는지 모른다.


주말부부를 하던 시절, 남편이 시댁에서 지내면서 시부모님과 헤어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특히 시어머니께서 아들과 멀리 떨어지는 것에 상실감이 크셨는데, 잠시나마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값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강릉에서의 직장 생활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루두루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릉 생활에 필요한 알짜 정보를 알려준 덕분에 실질적인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사업을 시작하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는 지원군이 되어주셨다.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당장은 실패로 보여도 돌아보면 어느 하나 허투루 낭비되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제 또 다른 길을 개척해야 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살 길을 찾아보았다. 그동안 개인 사업으로 염두했던 다양한 일들(공유숙박 운영, 컨텐츠 사업, 영상 촬영 및 편집 등)을 냉철하게 분석해 보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후보들이 다 탈락했다. 결국 제일 마지막 선택지였던 카페 운영이 남았고, 어쩌다 보니 창업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남편은 유명 프랜차이즈와 식품 대기업에서 홍보와 마케팅 업무를 20여 년 해왔던 전문가. 심지어 메이저 커피 회사에서 꽤 오래 근무했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고, 기업이나 유관 기관들과 협업하는 등 획기적이고 언론의 주목을 끌만한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하지만 정작 직접 카페 실무는 물론이고 아르바이트 경험조차 전무했다. 그나마 입사 후 사내 바리스타 교육을 잠시나마 받은 게 경력의 전부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사생활은 일찌감치 아이들 키우느라 접었고, 그 후로 마케팅 석사 학위를 취득한들 카페 운영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경력일 뿐이었다. 단지 평소에 요리와 베이킹을 즐겨했고,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디저트와 이색 음료로 홈카페를 선보이는 정도였다. 종종 "이 재능을 좀 살려야 할 텐데, 우리 가족만 엄마표 요리 찬스를 누리기 아깝잖아?"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하긴 했지만.




부모님도, 우리도 자영업을 해 본 적이 없으니 권리금의 개념도 없었다. 당연히 각종 세금이며 노무 지식도 거의 바닥에 가까웠다. 이런 초보중의 초보인 우리 부부가 급기야 일을 벌이고 만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다시금 우리가 증명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승부수를 띄울만한 특급 아이템은 있었다. 강릉의 대표적인 특산음식 '두부'와 커피의 도시답게 '에스프레소'를 활용한 디저트, 바로 두부 티라미수가 그 주인공. 한식에만 국한되던 두부의 지평을 넓히고, 맛도 건강도 비주얼도 갖춘 디저트로 젊은층의 관광객들을 공략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쯤에서 두부 티라미수의 탄생 배경을 언급해야겠다. 먹성 좋은 남매를 둔 덕분에 집밥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간식도 직접 만들어 줬는데, 이때 두부 티라미수의 내공을 쌓게 되었다. 티라미수는 사 먹자니 작은 용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격이 높았고, 에스프레소가 들어가니 카페인 걱정에 아이들 간식으로 마음 놓고 먹일 수도 없었다. 이럴 바에 내가 집에서 대량생산을 해서 넉넉하게, 마음편히 먹겠다는 일념으로 티라미수를 만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피가 아닌 초코우유로 대체해서 안심하고 먹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정통 레시피대로 마스카포네 치즈와 생크림을 주 재료로 만들었으나, 이왕이면 건강에도 좋고 단백질도 채우고 싶다는 엄마의 욕심으로 생크림을 두부로 대체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큰 이질감이 없으면서 오히려 더 담백하고 맛있었다. 가족들은 물론 지인들에게도 두부티라미수를 선보였는데, 먹는 사람들 마다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주었다. "이건 팔아도 되는 맛이야!"라며 힘을 보태줬다. 때 마침 미디어에서도 두부 티라미수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다이어터들에게도두부는 선호도 높은 식재료였던 탓에 그 인기는 날로 더해갔다.

지금과는 모습이 한참 다르지만 초창기 두부티라미수




그에 반해 주목할만한 티라미수 전문점은 딱히 생겨나지 않았다. 즉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뒤쳐지는 상황, 아 이거는 기회구나 싶었다.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강릉에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룰 핑계가 생긴 것일까? 그때만 해도 '언젠가는 기회가 되면 한번 강릉에서 두부 티라미수를 팔아도 되겠다.'라며 막연하게 꿈꾸는 정도였다.


그렇게 초짜 사장은 먼 미래의 희미한 기약을 당겨와서, 앞 뒤 재지 않고 경쟁이 치열한 카페 시장에 입성했다. 머리를 맞대고 메뉴 가짓수를 정하고, 생산 방법을 연구하고, 비주얼을 고안하는 등 두뇌를 풀가동 했다.


비록 작은 카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거창하게 브랜드 컨셉과 네이밍, 로고, 키 컬러, 사업 비전, 핵심 가치 등을 정했다.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각오로 우리 부부는 매일 같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업무를 분담해서 실행했다. 술술 잘 풀리는 날 보다 생각처럼 쭉쭉 진행되지 않은 날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매물을 보러 다니고, 험난한 셀프 인테리어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2024년 7월의 마지막 날, 카페를 오픈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과연 이렇게 꿈을 이룬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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