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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Nov 17. 2022

감정이 틀어진 이유, 그 출발점을 찾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소한 원인이 대부분이라는 불편한 진실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거리며 잠이 들었건만, 하룻밤이 지나면 싱겁게도 기억의 대부분이 잊혀진다. 왜 남편이랑 싸웠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진 사소한 일이거나, 주변 사람에게 말을 꺼내기도 민망할 정도로 별 일 아닌 것들이다. 그래서 '적당한 망각의 은사는 신이 내려준 은혜이구나.' 싶다.


얼마 전 쓰레기통 문이 잘 안 닫혀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새로 사기에는 좀 아깝고, 이대로 쓰기에는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으니 영 불편하고...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몇 주를 방치한 채로 지냈다. 종종 거슬리긴 했으나 사용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러다가 쓰레기통 안에 끈끈한 액체류가 묻어서 할 수 없이 쓰레기통 안팎을 대대적으로 닦게 되었다. 우연히 이음새 부분에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하나 낀 것을 발견했는데, 이게 바로 쓰레기통 문이 안 닫히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새끼 손톱의 절반도 되지 않은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게다가 하필 쓰레기통도, 플라스틱 조각도 둘 다 흰색이라 더더욱 눈에 띄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때 깨달은 바가 컸다. 우리 부부 사이가 삐걱거리는 것은 엄청나게 큰 문제가 아닌, 쓰레기통의 작은 플라스틱 조각처럼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말투, 행동, 표정과 같이 아주 작은 걸로 인해 서로의 감정이 틀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비록 겉으로 볼 때는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상대를 비난하고 미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간 들 당장에 우리 가정이 파탄이 나는 등 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하지 않은 채로 대수롭지 않게 방치 했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질 것이고, 이러다가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분명 개선해야 할 일 인 것이다. 하다못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남편을 혹은 아내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한다 한들 해결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즉, 서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개과천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 지금부터 실천할 수 있는 가볍고 작은 것부터 생활 속에 변화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방법을 부부 사이에 적용해보았다.



1. "고마워" 남발하기

사실 서로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싶다. 평소 우리 가정의 모습을 살펴보면 나는 아침밥을 차리고, 아이들 등교 준비를 도와준다. 그동안 남편은 이불을 정리하고 각종 영양제를 챙긴다. 암묵적으로 역할분담을 한 거였기에 서로의 수고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기계적으로 해왔던 일에도 서로 고마움을 표현하기로 했다. 


나: "여보 당신이 매일 이불 정리해줘서 고마워. 내가 혼자 했더라면 아침에 정신이 없었을 거야."
 남편: "매일 아침 맛있는 밥을 정성껏 준비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애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잘 크는 것 같아." 


조금 오글거리지만, 칭찬과 격려의 말로 하루를 시작하니 서로 기분이 좋아졌다. 뿐만 아니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온 사람에게 "수고했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또한 분리수거, 빨래 널기, 설거지하기 등 일상에서 반복되는 뻔한 집안일을 할 때도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수시로 표현했다. 



2. 명령 대신 정중하게 부탁하기

남편은 유독 나의 명령하는 말투에서 심보가 틀어진다. "쓰레기 좀 버려줘."라고 말할 때 <지금 당장 신속하게>가 전제되어 있으나 남편은 항상, "응 이따가. 나중에."라는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참을성 없는 나는 결국 기다리지 못하고 짜증을 한바탕 부리면서 직접 버리고 온다. 그래서 어떻게 바꿔봤느냐? "여보 혹시 지금 귀찮겠지만, 쓰레기 버리러 나가줄 수 있어? 지금이 어려우면 그냥 내가 후딱 다녀오든가."라고 정중한 말투로 부탁해보았다. "어어, 그 정도쯤이야~ 내가 나갔다 올게, 이리 줘봐"라며 기분 좋게 응답하는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단순한 사람 같으니라고...) 같은 말이지만 명령조가 아닌 부탁하는 어조로 바꿔보니 결과는 꽤 괜찮았다.


또한 가족 행사가 있는 경우, "곧 아버님 생신이니까 당신이 식사 장소 알아보고 예약 좀 해봐."라는 말 대신, "주말에 아버님 생신이니까 한번 모여야지? 우리가 밥이라도 한 끼 대접했으면 하는데, 삼계탕이나 쌈밥 중에 어떤 메뉴를 더 선호하시는지는 당신이 한번 부모님께 연락드려볼래? 그럼 내가 적당한 장소는 한번 찾아볼테니."라며 최대한 부드럽게 부탁했다. 또한 상대방에게 떠 넘기기 식이 아닌 서로 힘을 모으고 분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3. 출근, 퇴근 때 반갑게 인사하기

아이들 등교에, 식사 준비에 아침에는 늘 분주하고, 저녁에는 밥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서 남편을 제대로 배웅하거나 맞이하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이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멀찍이 서서 얼버무릴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미친척하고 남편을 깍듯이 모셔야 하는 대표님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 어떠한 핑계가 있다 한들 인사를 생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하던 일이 급하고 분주해도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가까이 가서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다. 퇴근하는 남편이 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즉시 방에 있던 아이들도 긴급 소집시켰다. "얘들아, 아빠 오셨다. 얼른 나가서 인사드리자!" 


그리고 출근때도 역시 동일했다. 이왕이면 힘이 불끈 나는 멘트도 한 마디 건넸다. "잘 다녀와. 오~ 누가 보면 30대인 줄 알겠네!". 혹은 "이번주도 출근하느라 애썼어. 오늘만 지나면 주말이니 힘내고, 이따 불금 특별 메뉴 준비할께." 와 같이 진심을 담은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꽤나 좋아하는 눈치다. 또한 출근룩의 완성인 신발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을 때(여전히 세상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생각하지만) 남편을 위해 같이 어울리는 신발을 열심히 골라줬다. 착장샷을 종종 찍어 주기도 하고, 역시 패션 피플이라며 엄치척도 아낌없이 날려줬다. 어린아이와 같이 신나 하는 남편의 표정을 보며, '행복은 별게 아니구나'를 느꼈다.



4. 중요시 여기는 가치 존중해주기

남편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걸 좋아한다. 예를 들어 서울 근교 관광지를 다녀 온다던가, 요새 뜨는 동네를 다녀오는 등 평소에 할 수 없는 소소한 일탈을 꽤나 즐긴다. 그냥 집에서 푹 쉬거나 소소하게 집 가까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최대한 남편의 취향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출퇴근하고 일에 파묻히고, 사람들에게 치이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클 테니까. 


물론 일정을 짜고 어디를 방문할지를 일일이 알아보는 건 대부분 내 몫이다. 유류비에 식비에 지갑에서 돈이 술술 새어 나가지만 하지만 아이들도 즐거워하고, 차곡차곡 좋은 기억이 쌓이기도 하니까. 그래, 까짓 것 적정선에서는 지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애들이 크면 이제 같이 따라나서지도 않을 테고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영종도, 남산공원, 용인 호수공원, 성수동 카페거리, 어린이대공원... 최근 3주 동안 주말에 다녀온 장소 리스트다. 날씨만 좋으면 부지런히 그리고 기꺼이 함께 나들이를 기쁘게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또 하나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신발장과 옷장을 볼 때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이 둘과 내 신발을 다 합쳐도 남편의 신발 개수에 턱없이 못 미치고, 옷장의 한 칸은 내 옷이고(사계절 합쳐서), 두 칸은 남편 옷이(현시점에 맞는 특정 계절의 옷만) 있다고 하면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주로 입는 옷이나 자주 신는 신발만 남기고 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몇 번 이야기도 했지만, 대충 정리하는 시늉만 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런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니 남편에게 있어 패션이란 본인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수단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치 나보고 "베이킹 도구 좀 싹 비워."라고 기분 나쁘게 말하는 것과 똑같겠구나 싶었다. (나는 지독한 빵순이라 홈베이킹이 취미이다.) 그래, 대신 내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옷도, 화장품도, 각종 액세서리도 적은 편이라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다고 비싼 명품을 구매하는 것도 아닌데 쇼핑할 때 마다 너무 타박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마음을 더 비우기로 했다. 남편에게 있어 삶의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요소로 인정해주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5. 서로의 일상에 관심을 갖기

우리 부부의 대화 주제를 생각해보면, 절반 이상은 자녀이다. 아이들이 너무 소중하고, 관련된 정보나 에피소드를 공유할 필요는 충분히 있지만 그러다 보면 정작 배우자의 상태는 챙기지 못할 때가 있다. 어른이니까 알아서 결정하겠거니, 어련히 끼니는 챙겨 먹겠거니, 아프면 알아서 병원 가서 치료받겠거니 생각 했지만 이런 습관 또한 고치기로 했다. 


"오늘 점심에 기자 미팅 있다더니, 잘 만나고 왔어?"라고 물어보거나 "요새 어깨 불편하다더니, 이제 괜찮아? 전에 처방받은 약 다 먹은 거 같던데…" 라며 건강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뻔한 말인 "제 아무리 바빠도 밥은 제 때 챙겨 먹어."라던가,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니까 병원비 아까워하지 말고 빠른 시일 내에 검사 받고 치료받아."라며 메세지를 날려줬다. '저 사람이 나를 신경 쓰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한동안 불편했던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조금씩 사라지고,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방법은 매우 사소하고 주관적인 긴급 단기처방이다. 별거 아니지만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기에 여전히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떤 상황일 때 상대방에게 화가 나는지, 그동안 자라온 환경이나 문화의 차이가 무엇인지, 타고난 기질이나 성격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집안일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등등 앞으로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 할 숙제들이 한가득이다. 이처럼 장기적으로 고찰해보고 힘써 변화돼야 할 부분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단타성 프로젝트는 아니구나 싶다. 어쨌거나 시작이 반이라고, 첫 발을 뗀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고 큰 용기를 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부 사이의 변화는, 나와 남편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고 우리 가족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는 바람직한 선순환을 가져왔다. 이런 이유로 ‘사명감’ 내지는 ‘책임감’을 가지고 더욱 드라마틱한 변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결단해본다. 긴 호흡을 가지고, 꾸준히 인내하며 <부부 사이 회복하기> 프로젝트를 지속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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