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서 연락 한 통 주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 이던가?
엉뚱하게도 남편 때문에 자주 화가 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저녁밥'이다. 시댁도, 술도, 담배도, 돈 문제도 아닌 고작 '밥' 때문이란 말이다. 이것 참 모양 빠지는 일이다. 남편의 몫을 챙겨 두는 날은 꼭 늦게 오고(결국 다음날 잔반 처리는 내 담당), 아무것도 안 남겨 놓는 날이면 꼭 무방비상태로 급습을 당한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늘 엇갈린다. 그렇기에 매번 요리하기 전, 3인분을 하느냐 4인분을 하느냐가 늘 고민이다. 남편이 먹을 만큼의 분량을 남겨놓아야 할지 아니면 싹 먹어 치워야 할지 결정장애가 온다. 아니, 저녁밥이 대체 뭐 길래, 이토록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첫 번째, 예측 불가능하다.
퇴근시간이 불규칙적이다. 집에 와서 밥을 먹는지 안 먹는지 여부가 늘 불투명하고, 그 의사결정 조차도 실시간으로 번복된다. 갑자기 회식 자리에 참여하게 되거나, 회의가 예상보다 길어지거나, 하다못해 최근에는 퇴근길에 무례한 운전자를 만나서 보복운전과 협박을 당하는 일로 경찰서까지 다녀오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있었다. 아무리 차가 막혀도 50분이면 집에 왔을텐데, 1시간이 훌쩍 넘어도 아무런 연락 없으면 누구라도 답답하지 않을까? 아무튼 이런 변수가 한둘이 아니다.
물론 직장인으로서 부득이하게 겪는 고충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매번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면 머리가 아프다. 밥을 차리다가 못 온다는 소식을 듣고(그래도 연락이라도 주는 날은 어쩌면 다행이다) 도로 그릇에 넣는 일도 있다. 새로 생선이라도 굽고 있던 순간은 더 짜증이 난다. 그렇다면 평소에는 제 때 연락을 주느냐?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아무 연락 없이 집에 오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오는 길에 중요한 통화를 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해서, 저녁밥 먹을 생각이 없어서 등등... 아무튼 정신없이 또 한 번 냉장고를 뒤져서 저녁밥을 꾸역꾸역 차리는 일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두 번째, 정성스러운 집밥의 수고와 가치를 모른다.
재료 준비를 위해 장을 보고, 야채를 다듬고, 요리하는 과정은 꽤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손도 많이 간다. 뒷정리는 또 어떤가? 난리 난 식탁 정리와 한가득 쌓인 설거지를 해치우려면 30분은 우습다. 이런 수고가 힘들기도 하지만 주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이왕 하는 거 기쁨으로 하고 있다. "한 그릇 더!"를 외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보람도 느끼고, 또래보다 큰 키와 토실토실한 허벅지를 볼 때면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니까. 하지만 남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아내가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해서 그렇지" 라고는 하지만 비겁한 변명 같다. 그 보다 “수고해 줘서 고마워."라고 말해주면 훨씬 기분이 좋을 텐데 말이다. 오히려 종종 이렇게 딴지를 건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느냐, 그냥 사 먹자, 나는 시리얼을 먹겠다 등등.... 아침도 아닌 저녁에 시리얼이 웬 말이냐고! 사람 김 빠지게 만드는 데는 전 세계 1등이다. 본인이 배부른 투정을 하는 걸 알고 있으려나?
정성껏 끓인 된장찌개 보다 라면에 환호하는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일찍 퇴근한 날, 냉동밥도 떡국떡도 하필 그날따라 갖은 비상식량이 똑 떨어진 비상 상황이라 부라 부득이 미안한 마음으로 라면을 끓여준 적이 있다. 얼마나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맛있게 먹던지, 그 모습을 보면서 실소가 절로 나왔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던 걸까? 라면 따위에 완패 당한 그 기분은, 마치 키 작고 못생기고 성격도 거지 같은 소개팅남에게 까인 착잡한 기분이었다.
세 번째, 맛없게 먹는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남편은 회사에서 내내 시달리고 온 저녁시간에는 특히 더 예민해진다. 제 아무리 화려한 음식이라도, 심지어 제일 좋아하는 고기 반찬도 인상을 빡 쓰고 입은 굳게 닫은 채로(일명 음소거 상태) 식사를 한다. 귀가 의심스럽게도 가끔은 이런 말도 한다. "아~ 체할 것 같아." 물론 정신적으로 오죽 힘들어서 그랬을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잠시나마 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짜증이 더 먼저 난다.
그렇다면 맛있게 먹는 날이 전혀 없느냐? 물론 즐겁게 먹고,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인증샷을 찍느라 바빠 골든 타임을 놓친다. 자고로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제 맛이거늘, 사진이고 동영상이고 한참을 찍어대는 모습을 보면 답답해진다. sns에는 #금손아내 라는 해시태그를 올리며 착한 남편 코스프레를 한다.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제발 빨리 맛있게 먹어주면 안 될까?
그렇다면 본인의 요리 실력이 부족하냐고 의심을 하신다면, 그래도 상위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다. 매번 엄청난 집밥을 차리는 것은 아니지만, 영양적 측면/ 플레이팅/ 맛으로 봤을 때 이만하면 훌륭하다 싶다. 한식은 기본이요, 다국적 요리는 물론, 베이킹도 어지간히 섭렵하고 있으니까. 주변에서는 “진심으로 내가 네 딸이면 좋겠다.”고 말하는 지인도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와, 이 음식 정말 맛있다!"라는 소리를 듣는 건 매우 드물다. 10년 넘게 살다 보니 안타깝게도 남편은 타고나기를 먹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아, 슬프도다.
네 번째, 저녁 피크타임이 더 분주해진다.
오후 시간에는 밥 말고도 챙길 일이 많다. 두 아이들 학교 숙제 봐주랴, 공부시키랴, 준비물을 챙기랴 정신이 혼미하다. 여기에 저녁밥을 두 번 차리게 되면 당연히 더욱 분주하다. 먼저 아이들과 내가 1차로 식사를 한다. 연이어 후식 타령하는 먹성 좋은 남매의 뒷수발이 시작된다. 충분히 배불리 밥을 먹고도 과일이며, 간식거리며 한참을 먹어 댄다. 심지어 라면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무튼 연이어 남편 밥상을 준비하고 그릇을 치우고 정리하다 보면 2시간은 족히 걸린다.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면 9시가 되기 십상이다. 부랴부랴 나머지 집안일도 해 가며 하루를 마무리하다 보면 지칠 대로 지친다. 물론 남편은 9시 전후로 꼭 한번은 쇼파에서 쪽잠을 잔다. 본인 말로는 회사에서 화장실 갈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린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할 것 같다. 긴장도 풀렸을 테고, 피곤함이 몰려왔을 테니 속은 부글부글거려도 차마 깨우지 못하고 잠시 충전할 시간을 갖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다 보면 결국 과부하가 걸리는 건 항상 내 쪽이다. 애들은 말을 잘 들을 리가 없고, 혼자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다 보면 진이 빠진다. 이럴 때면 차라리 남편이 저녁밥을 먹고 늦게 오는 편이 더 편하기도 하다. 아무튼, 코로나가 한참 심했을 때는 재택근무를 꽤 오래 했을 당시에는 네 식구가 저녁밥을 한 번에 먹고, 끝낼 수 있었던 게 참 편했다. 아, 문득 그때가 그립다.
이렇게 매번 저녁밥으로 부딪치다 보니 해결책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의 내부적인 규칙을 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상황이 유동적이다 보니 매번 엄격하게 칼 같이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이드라인을 확립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너도 나도 행복할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 집 저녁밥 운영 규칙 3가지>
1. 식당문 닫아요!
마감시간을 대략적으로 정했다. 7시를 기준으로 그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을 경우, 그날 주방 심야 영업은 문을 닫는다. 아니, 나도 부엌데기 퇴근을 해야지 손님이 올지 말지도, 그것도 언제 올지도 모른 채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식당이라고 생각해 보니 이런 운영 시스템의 도입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결론이었다.
또 하나, '밥의 가치'를 모르는 상대에게 굳이 나의 정성과 에너지를 쏟을 이유가 없었다. 그전까지는 "그래도 하루 종일 고생하고 온 사람인데 그래도 집밥은 챙겨줘야지."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전혀 딴판이었다. 더 이상 남편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나 이제 퇴근 하려는데 어떻게 할까?"
"7시 넘었으니까 자체해결 하십쇼. 식당에서 사 먹고 오든, 아니면 차 안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오든."
저녁밥 때문에 모든 일정이 늦어지고 분주해지는 편 보다 서둘러 정리를 마치고 하루를 일찍 마감하는 게 가족 모두에게 유익했다. 워라밸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단 직장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주부에게도 집안일을 적정 수준에서 끊어 낼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2. 비상용 아이템 구비로 힘 빼고 적당하게 밥 차리기
가족들의 밥상은 마땅히 가장 좋은 것으로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밥은 새로 한 밥에, 고기도 곁들이고, 갓 만든 따듯한 반찬, 그리고 바로 끓인 국까지 말이다. 친정 엄마에게 보고 배운 게 그러했기에 당연한 줄 알았다. 반조리 식품을 사용 한다거나 가공식품을 너무 많이 식탁에 올리는 등의 행위는 전업주부로서 책임감이 결여된 아마추어 같은 모습이라 생각했고, 동시에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를 구호로 삼고 적당히 하기로 했다. 평일에 너무 밥 차리느라 힘을 빼면 결국 나만 손해였다. 주말에 한두 번 정도 특식이면 족하다. 그래, 주말을 위해 에너지를 아끼겠노라 생각하며 찬밥, 간편식, 냉동식품 적극 활용한다. 그랬더니 후다닥 밥 차리기도 훨씬 수월해졌다. 예를 들어 에어 프라이어에 냉동 치킨 너겟을 굽고, 비상용으로 쟁여 둔 국을 데우거나 끓는 물을 부으면 완성되는 즉석국, 그리고 여기에 김치를 곁들이면 끝.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육개장 같은 국밥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녁밥 준비에 힘을 빼고 나니, 분노도 줄었다.
3. 정서적인 밥 듬뿍 주기
무엇을 먹는다는 행위 = 생명 유지를 위한 활동
남편에게는 이런 공식이 적용된다. 삶의 9할이 먹는 즐거움인 나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점심에 김밥을 먹었다 치면 저녁에도 똑같이 김밥을 먹어도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게 왜 상관이 없냐고! 세상에는 맛있는 음식들로 넘쳐나고, 매 한 끼 한 끼가 얼마나 소중한데...) 남편은 나와는 철저하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라고 인식하고 나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단순히 '물질적인 밥'이 아닌, '정서적인 밥'을 주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말이다.
그동안 내 딴 에는 집밥으로 남편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냥 말로 "오늘도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버티느라 수고했어, 고마워."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네고 허그라도 한번 더 하는 게 남편에게는 훨씬 가치 있는 일이었다. 고로 남편에게는 무엇을 먹느냐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다못해 라면에 야채 넣는 것도 싫어하는 스타일이니까. (오직 라면 그 자체 순수한 버전이 더 좋다나 뭐라나. 아무튼 먹잘알은 아님). 더 이상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 달기'는 하지 않기로, 이제 멈추기로 했다. 대신 있는 애정, 없는 애정을 영혼까지 끌어올려 배우자를 존중해 주고 더 사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유명한 석학이자 철학자인 김형석 교수는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결혼과 가정에 대해 언급하기를,
부부는 성격은 같을 수가 없다. 또 달라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같은 성격이라면 성장과 발전도 없고 새 것을 창출해내는 행복도 사라진다. 달라서 더 귀하고 행복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매일의 분노와 싸움의 원인이었던 '저녁밥'의 문제는 결국 '서로의 다름'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현상임을 받아들이고, 이런 갈등을 통해 성장과 발전의 계기로 삼겠노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돌이켜보면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사고방식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는 제법 많은 세월이 소요되었다. 이 정도 긴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어느 정도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새롭고 낯설다. 그러니 부단히 노력하는 수 밖에. 또한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항상 남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내가 문제의 원인일 때도 상당히 많았음을 깨닫는다. 상대방도 상대방이지만 나 역시도 개선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변화를 준다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결코 없다.
앞으로도 우리 부부에게는 넘어야 할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때마다 관용을 베푸는 태도로 임해 보겠노라 다짐해 본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맞춰가며 다듬어지는 중이다. 이렇게 점점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힘써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