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고운 Feb 02. 2023

우리 집에는 빨래 요정이 산다

집안일 분배, ‘잔소리’ 말고 ‘칭찬’으로 남편 구슬리는 방법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 그 중에서도 하루만 쉬어도 산더미같이 쌓여 버리는 빨랫감들을 볼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도 건조기가 있어서 천만다행이고, 한꺼번에 몰아서 빨래하기 편하게(라고 써보지만, 사실은 무식하게) 21kg짜리 대용량 세탁기도 구비해서 최대한 빨래에 덜 스트레스를 받으려 한다. 게다가 요새는 잔머리를 굴려서 어두운 색 밝은 색 구분 없이 한번에 돌려버릴 수 있게 이염 방지 세탁 티슈도 넉넉히 사뒀다. 표면적으로는 “물 사용을 줄여 환경을 살리겠다.”라는 거창하고도 궁색한 변명을 동반하지만, 실제적인 이유로는 딱 하나, "너~~~ 무 귀찮아서".


여행이라도 다녀올라 치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빨래를 몇 탕 돌리고 급한 불을 꺼야만 한숨 돌릴 수가 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어김없이 이 말을 듣게 될테니. "엄마 팬티가 없어요. 잠옷도 없는데 나 뭐 입고 자요?" 빨래는 엄마의 숙명이자 운명이란 말인가! 하여튼 빨래는 참으로 귀찮고도 하기 싫은 데일리 업무다. 오죽하면 셔츠나 정장바지처럼 다림질이 필요한 옷은 웬만하면 반입 금지 품목이다. 정 입고 싶으면 셀프 다림질을 하거나, 링클 프리 셔츠 같이 손이 가지 않는 아이템에 한해 허용한다.


그리고 단독 세탁이 필요한 니트류나 고급 소재의 옷도 가능한 사절한다. 몇 개 없지만 이런 옷들의 경우 차곡차곡 모아서 한참 후에나 세탁을 한다. 언젠가는 눈치 없는 남편이 "어제 내놓은 그 정장바지 아직도 빨래 안 했어?"라고 채근하듯이 물어봤다가 내 눈의 강렬한 레이저 빔을 보고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그렇게 중요하고 급하면 당신이 직접 하라고!!!'라는 무언의 압박을 느껴서일까? 아무튼 그 후로는 세탁을 요청할 때 절대로 보채지 않는다. "저기, 미안한데 이 바지는 다음 주 월요일에 중요한 미팅할 때 입어야 하니, 그전까지는 좀 부탁해."라며 빨래 일정에 긴급하게 하나 끼워 넣어 달라며 정중하게 부탁한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게으른 주부 같이 보이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최대한 집안일에 에너지도 시간도 덜 뺏기고 싶어서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늘 꼼수를 부리고 머리를 쥐어짜는 건 사실이다. 어떻게든 가사 노동을 피하거나 줄여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어쨌거나 칼같이 해내고 있고 집이 깨끗하다는 말을 꽤나 듣는 편이다. 알고 보면 미니멀리스트 꿈나무라는 사실. 의외로 본인의 특기는 버리기, 취미는 정리하기이며, 말끔하게 정돈된 집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집안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해야 할 역할이기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해오고 있을 뿐이다.


"라떼는 말이야, '건조기'라는 신박한 가전제품도 없었어."라고 말한다면 물론 할 말은 없다. 나 또한 건조기 영접 전 후의 삶의 질이 확 변하는 것(마치 하늘과 땅 차이 못지 않는)을 경험했으니까. 그렇게 치면 세탁기 자체가 없던 시절에는? 보일러가 없던 시절에는? 고무장갑도, 세탁 세제조차 없던 더 옛날에는? 매서운 겨울에 꼴랑 목화 솜 든 한복을 입고 살얼음 낀 개울가에서 등에는 포대기로 애를 들쳐 엎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나무로 된 빨래 방망이를 두드렸을 거라 생각하니 급 숙연해진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좋은 세상에서, 팔자 좋게 살고 있는 건 맞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우리 시대에서 빨래가 하기 싫다고, 힘들다고 하는 건 배가 부른 투정이야." 이렇게 결론을 내고 지금의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것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민망하게도 정신교육의 효과는 잠시뿐. 분명 감사하며 자족하면서 살아야 함은 팩트로는 알겠는데, 어디 집안일의 범주가 비단 빨래뿐이냐고! 생활용품에, 먹거리에 각각 적정 수준으로 재고를 유지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중대 업무 중 하나이다. 자칫 정신줄을 놓아 펑크라도 나면 금세 타격이 오는 치명적이다. "엄마, 치약이 없어.", "여보, 휴지 다 썼는데? 또 없어?"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하게도 그동안 잘해 왔던 것은 하나도 티가 안 났던 게 내심 억울하기까지 하다.


아무튼 다시 빨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쓰리이에게 백 번을 말해도 기어코 뒤집어 내놓은 옷을 보며 분노하고, 속옷 빨래통에 냄새나는 양말을 아무 생각 없이 냅다 던져 넣는 범죄 행위를 단속하거나(일명 현장검거), 종이 쪼가리로 난장판이 된 빨래를 보며 탐정 모드로 빙의하여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져서 기어코 범인을 잡아내고야 만다. 


"내가 제발 주머니에 영수증 좀 넣지 말랬지!! 도대체 몇 번째야? 가뜩이나 집안일도 많은데, 아 진짜 나 한테 왜 이러는데!!!!! " (이때 본인의 표정이나 말투, 어조는 뭐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되시리라...)

도움은 고사하고 매번 딥빡(깊은 화남)은 내 몫이요, 분노를 발산하며 길길이 날뛰는 건 왜 항상 나일까? 분명 결혼 전에는 이렇게까지 성격이 더럽지 않았는데, 남편과 아이 덕분에 전투력은 매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중이다. 나도 티비에 나오는 우아한 엄마처럼 살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쓰리이가 도통 협조를 안 해준다는 사실. 어쨌거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참 꾸준하게도 집안일 배분으로 자주 다툼을 벌인다. 한 때는 아예 남편에게 빨래를 전담시키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야심 찬 계획은 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A부터 Z까지 세탁과 다림질, 바느질까지 모든 빨래에 관련된 업무는 홀로 다 감당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남편의 빨래에 관한 만행을 고발해 보자면,


-수건부터 걸레까지 아주 사이좋게 한 번에 돌린다던가 

(이런 편견이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그래도 속옷, 겉옷, 수건은 따로 세탁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던가!)


-어마어마하게 밀린 빨래를 오늘은 다 처리하겠다며 큰소리쳐 고 먼저 잠들어 버리거나

(또 다음날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듣는 말, "엄마 팬티가 없어!" 아이고 머리야...)


-세제를 아낌없이 듬뿍 넣어 10번 헹굼을 해도 거품이 사라지지 않는다거나 

(이 날 분노의 헹굼을 도대체 몇 번을 반복했는지, 한참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


-빨래 후 건조까지 다 해서 빨래를 개고 있는 현장을 급습해 보니 뭔가 싸한 느낌이 듦, 알고 보니 세제를 깜빡하고 안 넣었다고 자백 

(어쩐지 세탁기에 들어갔다 온 것 치고는 옷 상태가 꼬질꼬질 더라니)  


이 외에도 수많은 빨래 에피소드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혹시 일부러 그런 건가?' 싶을 정도로 왠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생각보다 똑똑한 건지도...). 아니, 왜 이렇게 남편은 빨래의 기본원칙도 상식도 없을까? 그렇다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가사노동 전담 도우미가 있는 금수저로 자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냥 위생 관념이 달라서 그런가? 내가 지나치게 간섭을 한 걸까? 하여튼 지금도 모든 게 미스터리다. 


어디부터 집안일의 기초를 가르쳐야 할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빨래 개는 것은 꽤 솜씨가 있는 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남편피셜, 대학시절 의류 매장에서 알바를 하며 배운 고급 기술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일 해야 하는, 일상에서 꽤나 비중을 차지하는 '빨래'라는 귀찮은 녀석을 나 혼자만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나마 남편이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맡겨 봐야 겠다 싶었다. 일단 빨래 업무의 절차를 세분화해 보았다. 생각보다 여러 단계가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중에 이제 남은 건 내가 할 일과 남편의 할 일을 나누고 담당을 정하는 것.



정확히 반반씩 나눈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빨래에 동참시키는 것이 목적이기에 이 정도만 업무 분담이 되어도 한시름 덜어낸 기분이었다. 남편도 아이들도 항상 깨끗한 옷이 서랍장과 옷장에 척척 제 때 쌓여 있다면 나의 보이지 않는 수고로움을 조금도 몰랐을 테니. 그리고 얼마전에 겪은 재미있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우리 언니가 형부에게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이렇게 별명을 부르던 장면을 목격한 사건이다. (그렇다, 우리 언니네 부부도 평소에 우리 집처럼 그다지 평화롭진 않다.)


"빨래요정, 오늘도 잘 부탁해! 여기 당신이 티비 보면서 개야 할 옷들, 자 여기~" 

이 단어에 현웃이 터졌다. 아이돌의 '엔딩 요정'은 들어봤어도 빨래 요정이라니. 그것도 키도 덩치도 큰 우리 형부가 요정이라고? 근데 더 웃긴 건 의외로 순순히 형부가 빨래 요정으로 기꺼이 대활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언니에게 물어보니 답은 명쾌했다.


"응 너희 형부가 딴 건 잘 안 하고, 한다 하더라도 영 마음에 안 드는데, 빨래 개는 거 하나는 진짜 잘 더라고. 내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티비를 볼 수 있는 명분도 생긴 거고."


오호라, 이거 나쁘지 않네. 아니, 너무 좋은데? 그렇다면 나도 당장 써먹어야겠다 싶었다. 좋은 건 곧바로 발 빠르게 실행에 옮기는 게 바로 내 스타일! 얼른 우리 집에도 동일한 시스템을 도입해서 남편을' 빨래요정’이라고 명명했다. 평소 같았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부탁하기 싫다 보니 툴툴대면서 내가 빨래를 널고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남편에게 명령 어조로 지금 당장 빨래를 널라고 지시했을 텐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에게 상냥하고 유머러스하게 부탁하면 되는 거란 사실.


"빨래요정! 지금 당신이 활약할 때가 왔어요. 요정님 어서 출동해 줘요!"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이 단어가 재미있는지, 남편도 결국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내가 먼저 부탁하지 않아도 "여보, 빨래요정 언제쯤 투입되면 될까? 이제 빨래 한 30분 남았나?"라며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으로 대기 준비 중인 매우 바람직한 모습을 보였다. 이 남자가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하다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어 감개무량했다.


집안일을 부부가 함께 하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확하게 반 씩 나눌 수는 없다. 집집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내가 시간 여유가 더 많고, 집안일 스킬도 남편보다 한 수 위에 있으니까. 그보다 함께 동참하는 것, 좀 부족하고 서툴러도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서로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물론 “수고했다.”, “당신 덕분에 훨씬 수월했다.”라는 아낌없는 격려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마음에는 없어도 이렇게 칭찬해 줘야 우리 집 공식 '빨래 요정'으로 결근 없이 장기간 활약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할 수 있다.)


16년의 가정생활을 통해 또 하나 얻은 결론이 있다면, 집안일은 배우자와 둘이서만 해결할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돌이표처럼 맨날 똑같은 주제로 싸우느니 아웃소싱으로 차라리 비용을 지불해서 해결하는 개 때로는 더 현명하다. 정리 전문 업체 같은 외부 도움을 받거나, 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 같은 똑똑한 전자기기를 들여놓는 것 또한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사항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바로, 온 가족이 집안일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크면 클수록 부모를 도울 수 있는 일은 많아진다. 식사 시간을 떠올려봐도 수저 놓기, 물 컵 놓기 등과 같이 소소한 일에 참여가 가능하다. 빨래와 관련된 집안일에는 수건 개기나 양말 널기와 같이 어렵지 않은 일은 어린 아이들도 함께 할 수 있다.


그토록 하기 싫었던 집안일을 가족 모두 함께 동참하는 축제로 바꿀 수 있는 힘은 바로 '관점의 변화'였다. 매일 마주해야 하고, 처리해야 하는 집안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존재한다. 이처럼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오늘도 빨래 요정의 맹활약을 기대하며, 남편의 퇴근 시간쯤 빨래가 종료되도록 세팅해 놓아야겠다. 빨래 종합 선물 세트를 한가득 안겨줘야지.

 

"빨래요정님, 오늘도 잘 부탁해요!"

 

이전 08화 이래서 우리가 안 맞는 거였구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