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치며 해 본 다양한 시도들, 성공사례 편
"결혼을 하고 나니 미혼이 진리임을 깨닫고, 출산하고 나니 육아는 나와 안 맞음을 깨달았다."는 명언을 남긴 친구가 있다. 아, 이미 우린 망했구나, 이번생은 글렀다 싶어 한참을 같이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10대 시절은 대학만 가면, 20대 시절은 취업만 성공하면, 그리고 30대 시절은 결혼만 하면 자동으로 탄탄대로의 인생이 펼쳐지고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허나 모든 게 야무진 착각이었다. 이런 구질구질한 현실을 누가 귀띔이라도 해줬더라면... 아니 설마 나만 몰랐던 건 아니겠지?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남편과의 감정적 대립은 극에 달했다. 비로소 인생의 쓴맛을 맛보았다. '이 인간과 살아 말아?'를 수백 번 고민하며 여차 저차 버티다 보니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한 집에 살고 있다. 데뷔 23년 차인 가수 싸이의 앨범 9INTRO에서 "롱런의 비결을 내게 물어보신다면 딱 하나 존나 버텨 임마"라는 가사가 왜 이리도 마음에 콕 박히던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로 '버티기'야 말로 꼭 필요한 핵심 기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버티느냐? 그 방법에 대해 본인이 겪은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성공사례는 화의 상태에 따라 단계별 해법(긴급 진화-초기 진화-잔불 정리)을 살펴보겠다.
이 글에서는 게리 채프먼의 '5가지 사랑의 언어' 라던지, 최성애 박사가 말하는 '가트맨식 부부 감정코칭'의 정석 같은 지침을 기대하지 말기를 부탁한다. (물론 이 두 책은 너무 훌륭하다. 나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은 명작이니까. 다만 본인과 결이 다를 뿐. 아무튼 나중에 꼭 한번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저명한 학자들이 다루는 완벽한 이론으로는 남편으로 인해 활활 불타오르는 속을 재빨리 진화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급한불을 끄는데 초점을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보기를 바란다.
10초 참기
유독 화가 많은 본인의 경우, 외부 자극이 왔을 때(특히 남편의 언행을 통한 이상 신호 감지 시) 그걸 참지 못하고 기어코 욱 하고 터뜨리고 만다. 그리고 돌아서서 꼭 후회한다. '아, 그때 이성을 차리고 조금만 참았더라면!' 버럭을 발사하기 전에 더도 덜도 아닌 딱 10초만 참아 보기를. 그동안 무얼 하느냐? 바로 심호흡. 짧은 시간이라도 깊고 천천히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면서 숨 고르기를 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감정이 정리된다. 물론 그래도 분이 가라앉지 않을 때는 참지 말고 터뜨려야지 뭐. 하지만 본인의 경험상 10초 후에는 그리 화 낼 일이 없어진다. 마치 김 빠진 사이다처럼 말이다. 남편이 아무리 나를 자극해 오더라도 그 순간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결국 나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참지 못하고 격한 반응을 보인 후에 뒤따르는 결과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함을 잊지 말기를.
묵언 수행
사전적 의미를 보면 불교 용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는 참선. 말을 함으로써 짓는 온갖 죄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참아내지 못해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한바탕 쏟아내면 결국 남는 건 마음의 상처뿐이다. 그럴 때는 잠시 입을 닫아본다. 물론 상대방이(특히 눈치 없는 우리 집 어떤 사람의 경우) "왜 말을 안 해?", "그래서 이건 어쩌고 저쩌고..."라며 말을 계속 걸어올 것이다. 그럴 때는 "나 지금 마음이 어려우니, 말이 곱게 안 나갈 거 같아. 잠시 대화를 중단하자.”고 일러 두면 된다.
특히 차 안과 같이 물리적인 거리를 둘 수 없는 상황일 때는 이어폰을 꽂고 대화 차단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주변에서는 아예 남편의 문자와 카톡을 차단하는 고수도 봤다. 그래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때는, 최후의 수단으로 잠시 마음 속으로 욕하기를 추천한다. (그래 당신 잘났다, 너나 잘해라 등)
잠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팬하우어가 말하기를, “삶이 괴로우면 그냥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자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렇다, 가장 쉬우면서도 강력한 효과가 있는 방법이 바로 '잠'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일단 밤이고 낮이고 만사를 제체두고 잠시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회복진다. 다행히도 방금 전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잊혀진다. 왜 씩씩거리며 그토록 화가 났었는지 오히려 민망해지기도 하고, '너무 지나치게 분노를 폭발 시켰구나'라는 자기반성은 덤이다.
어떻게 보면 잠을 통해 현실을 도피하는 것 일 수도 있지만, 시간의 단절로 부정적인 감정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지난 언행까지도 소환시켜서 곱씹어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황을 부풀려 해석하게 되기도 한다. 당연히 마음은 더욱 요동친다. 그렇기에 수면을 통해 억지로라도 뇌를 좀 쉬게 해주는 것도 좋다.
또한 대개 몸이 피곤할 경우 감정적으로 더욱 예민해지기 쉽다. 가능하다면 저녁 시간에 일찍 잠들어서 푹 자고 일어나면 더욱 효과는 좋다. 어쨌거나 일단 자고 일어나야 한다. 다음날이 되면 별일 아닌 걸로 판명되며 상황은 자연스럽게 종료된다.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의외로 참 단순하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널뛰기하던 감정을 잠재우고 이성을 차릴 수 있게 해 준다.
단짠단짠 투입
생각만 해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다면? 한 입 입에 넣으면 그 어떤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잠시나마 마음이 사르르 녹을 것이다. 물론 매번 화가 날 때마다 먹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다. 화를 다스리는 것 못지않게 식욕을 다스리는 것 또한 중요하니까. 최악의 경우일 때 전투식량 혹은 비상식량으로 활용하라는 뜻이다. 집 근처 빵집으로 달려간다거가, 냉동실에 곱게 쟁여둔 마카롱을 하나 꺼내 입에 넣던가, 초콜렛이라도 한 조각 먹고 나면 한결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백해무익한 설탕과 밀가루도 때로는 쓸모 있는 법! 위급상황에 당 충천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지 않을까? 건강도 건강이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
본인의 경우 소울푸드는 단연 떡볶이이다. 역시나 단짠단짠의 대표주자이다. 여기에 매운맛까지 더해져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에 제격이다. 밀키트가 되었든, 직접 만들어 먹든, 사 먹든 접근성도 진입장벽도 가격대도 가장 만만한 메뉴이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선택이기도 하다. 빵이든 떡이든 건강이나 다이어트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살고 봐야지!
종교의 힘 빌리기
크리스천인 나로서는 종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잘 경험하고 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러니까 신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남편 흉을 보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뒷담화로 푼다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돌아서면 영 찝찝하다. 또한 말은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나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고로 사람을 의지하는 방법보다, 종교를 통해 자체 해결하는 방법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조건 없는 사랑, 관용, 아가페(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등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떠올려보면 상대방의 무례한 말과 태도를 용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뭐 그리 잘났다고 성을 내며 상대방을 공격했을까 싶은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참고로 본인은 마더와이즈(mother wise)라는 책도 꽤 도움이 되었고, 이를 꽉 깨물고 했던 분노의 성경필사도 분을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108배를 하든, 고해성사를 하든 뭐라도 종교에 의지하며 해결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고, 건설적인 방법이다.
가족사진 보기
경험상 남편으로 인한 화는 아이들로 다스리게 된다. 반대로 아이들로 인해 주체 없이 화가 날 때는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해결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가족이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해 주는 사이니까. 또한 '행복한 가족'이라는 공동 목표를 이뤄야 하는 동지로써, 남편과 힘을 합쳐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이든, 인쇄물인 포토북이든 최근 사진부터 과거의 사진까지 훑어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또 피식 웃음이 난다. 지긋지긋했던 육아 암흑기, 여행을 떠나 일상을 탈출했던 추억 등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래도 좋은 기억이 더 많이 생각난다. 부쩍 자란 아이들과, 반대로 팍삭 늙어버린 우리 부부 사진을 보며 '그래도 남편 덕분에, 우리가 이 세월을 버텨왔구나.'싶은 생각에 묘한 동지애도 피어난다. 사진을 한 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도 잘 살아보자!'라며 마음을 다잡게 되는 신기한 마법이 일어난다.
자녀를 주제로 말 꺼내기
모진 말을 내뱉고 냉랭한 사이가 유지되다 보면 쉽게 말을 꺼내기가 힘들다. 먼저 말을 거는 순간 유치하게도 지는 느낌이 든다. 또한 잘못한 사람이 먼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 좋겠다는 일종의 ‘보상심리’도 발동한다. 이럴 때는 가족사진에 이어 또 한 번 자녀 찬스를 쓰는 방법을 추천한다. 바로 대화의 주제를 아이들로 놓으면 한동안 교류가 없던 남편과도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일명 물타기 스킬이랄까. 학교에서 있던 던 일이나 가정에서 혼자만 알기 아까운 에피소드 등 일상을 나누다 보면 한동안 끊어졌던 대화가 다시 이어진다. 혹은 자녀의 일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앞두고 혼자 끙끙 앓기보다 같이 참여시켜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다 보면 어느새 적에서 동지로 바뀐다. 당연히 '왜 싸웠는지'라는 큰 문제는 슬금슬금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적절한 덕질
좋아하는 배우나 아이돌이 있다면? 당신은 성공한 인생이다. 유튜브로 동영상을 보며 눈과 귀를 잠시 정화하는 시간을 가지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걱정 근심이 훨훨 날아간다. 콘서트를 가거나 팬미팅을 간다는 등의 적극적인 방법도 있겠지만, 일단은 빠르고 손쉬운 힐링을 위해 스마트폰으로 해결해본다. 유일한 단점으로는 남편의 질투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A배우를 보며 눈에서 하트가 발사되는 나에게 남편이 툭 던지는 한 마디, "근데 저 사람 허우대는 멀쩡한데, 연기가 영... 어색한데?" 연기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된 배우이거늘, 아니 건드릴 걸 건드려야지 말도 안 되는 생 트집은! 그런 남편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여보 나한테는 당신이 최고야, 배우 A는 그냥 외모만 좋아하는 거지 뭐."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쥐어짜서 던졌다. 그랬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이어진 남편의 질문, "그렇다고 니가 나의 내면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어, 그건 그렇지." 미안하지만 빠르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 남편의 질투는 적당히 모른 척 무시하고 애정하는 덕질의 대상에 집중하기를.
마스크팩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찰떡같이 적용되는 예로써, 측은지심을 발휘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까칠한 나랑 살고 버텨오느라 부쩍 수척해진 남편을 위해 마스크팩을 선사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남편을 챙겨줄 수 있는 거고, 동시에 면상을 가릴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다. 자신에게도 팩을 하나 붙여주면서 남편 때문에 생긴 주름살을 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참고로 나한테는 비싼 마스크팩을 해도 아깝지 않지만, 남편에게는 사은품으로 받은 적당한 팩을 사용하기를. (직접적인 팩의 효능보다 아내가 본인을 챙겨주는 행위로 만족해할테니.) 잠시나마 팩을 붙여주며 눈을 마주치고, 스킨십을 하면서 별 일 아닌 일에 낄낄거리며 웃다 보면 서로에게 펀치를 날리던 과거의 나날을 자연스럽게 청산하게 된다.
마음에 불꽃이 일어날 때 분노를 다스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감정이 더욱 고조되어 화산이 폭발하는 것 마냥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기보다는 초기 진화를 통해 더 이상 마음의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 더 현명하다. 요약해보자면,
첫째,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둘째, 남편은 적이 아닌 동반자라는 것
셋째, 가족은 내가 책임져야 할 운명의 공동체라는 것
단순하지만 이 세 가지 원칙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란 없다. 비율은 다를지 언정 쌍방과실인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을 최대한 줄여서 부디 분노가 촉발되지 않기를 오늘도 두 손 모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