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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고운 Apr 04. 2023

남편으로 인한 분노 다스리기, 이런 행동은 금물

문제 해결은 커녕 상황이 더욱 악화 돼버린 실패사례 편

남편과 한바탕 싸우고 난 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갈등을 해결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꼭 성공한 경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참하게 대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본인의 전공분야인 마케팅(marketing)을 보더라도 꼭 성공사례만 다루지 않는다. 실패사례 분석을 통해 얻게 되는 시사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면교사(反面敎師) 차원에서 한 번쯤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비록 흑역사일지라도 지난 기억을 더듬어서 대표적인 실패 사례를 적나라하게 공개해본다.




내 기준으로 생각하기


사람은 참 자기중심적이다. 본인이 겪은 경험치와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상황을 해석하려 든다. 그렇기에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할 때가 많다. 나의 경우 빛과 소리에 예민하다. 특히 해가 일찍 뜨는 여름이면 잘 때 햇빛으로 방해받는 걸 극혐 하고,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불쾌한 감정이 든다. 반대로 남편은 결혼 후 에야 ‘암막커튼’이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다. 자연채광을 받으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의 모닝 루틴은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활짝 걷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뉴스를 크게 튼다. 더 할 나위 없이 활기차기 짝이 없는 아침이다. 당연히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게 스트레스 요소이다. 아침부터 짜증이 폭발한다. 알람 소리도 최대한 얌전한 것을 설정할 정도로 정적인 아침 분위기를 선호하는 걸 왜 여전히 모를까? 


하지만 이러한 갈등의 원인이 결국 내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 입장에서는 얼마나 내가 느리고 답답하고 속이 터질까 싶었다. 초반에는 "커튼 걷지 말라고!", "뉴스 좀 끕시다!"라며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버럭 냈다면, 어느 날 남편에게 차분하게 부탁해보았다. "여보, 나는 갑자기 밝은 햇빛을 받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 그러니까 한 5분만 있다가 내가 커튼 열게. 그리고 뉴스는 이따 식사시간에 듣자." 


당연한 소리지만 '남편'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가족, 배우자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지만 어쨌거나 나와는 다른 독립된 개체이다. 게다가 나보다 5년이나 삶의 경험이 있는 인생선배 이기도한데, 내 기준과 다르다고 길길이 날뛰어 봤자 내 손해임을 깨달았다.

 

 


인신공격


비단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남편 또한 조심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말'이다. 비꼬는 말투, 업신여기는 태도 등 특히 화가 났을 때는 더더욱 금물이다. 불 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행동이니까. 하지만 어디 실천하기가 쉬운 일이란 말인가? 홧김에 아무 말이나 뱉고 다시 주워 담고 싶을 때가 있다. 굳이 심장에 비수를 내리꽂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 뒤늦게 늘 후회가 된다. 아무튼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가 되는 인신공격은 어떠한 이유라도 참아야 한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면


"어휴, 답답해! 그러니까 삼수를 했지"

그렇다, 남편은 지지리도 대학 입시 시험 운이 없었다. 수능 시험 때마다 폭망한 케이스다. 반면 나는 수능시험을 평소 실력보다 훨씬 잘 본 사람이다. 나중에 이야기해 보니 본인은 삼수를 했다는 사실이 꽤나 스트레스이고 상처라고 했다. 


"그러니까 맨날 회사에서 사람들과 부딪치는 거야. 소통이 돼야 말이지! 괜히 이직 여러 번 한 게 아니구만"

훨씬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변수로 직장을 옮겨야 했던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n차 이직을 했다. 지인들에게는 '이직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직을 통해 한 직장에만 쭉 있었다면 꿈도 못 꿨을 연봉 상승과 다양한 복리후생 등의 쏠쏠한 혜택도 많았다. 이직을 부정적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당신 성격이 나빠서"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다.


반대로 남편이 최근에 말다툼 끝에 나를 자극했던 말도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느림보 운전이나 하는 주제에"

똑같은 길을 가도 안전제일주의인 나는 남편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다. 남편처럼 요리조리 차선을 바꾸거나, 교통질서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기에. 게다가 끼어들기 차량도 너그럽게 받아주기 때문이다(나의 햇병아리 초보운전 시절을 떠올리며 무조건 양보).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은 내가 마냥 답답한가 보다. 그렇다고 느림보 운전이라니? 잊을 만하면 속도위반, 주차 위반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오는 당신은 잘한 거고?


"옷도 못 입으면서"

패션테러 정도는 아니지만, 내 모습이 영 거슬리나 보다. 나는 있는 옷조차도 계속 정리해서 버리고, 유행이고 뭐고 내 체형과 개인 취향을 충족하는 극 실용주의를 고집하는 편이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디자인과 색상의 옷이다. 반면 남편은 옷도 신발도 나보다 훨씬 많다. 경악스러울 만큼 다양한 색상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 최신 트렌드를 잘 따라가는 편이다. 


아무튼 운동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의 남편에 비해 여기저기 나이살이 붙은 나는 일단 옷걸이가 하찮음을 물론 인정한다. 하지만 엄마로서 멋을 낼 시간도 없을뿐더러 패션 아이템을 척척 살 만큼 경제적 여유도 없다는 건 알고 있을까? 이렇게 루저 취급을 받으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자꾸 나를 자극하면 확 삐뚤어져서 백화점 가서 풀 착장으로 시원하게 질러 버릴 테다!




장문의 편지 쓰기


내 맘이 니 맘 같지 않다. 구구절절 말해본들, 상대방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언젠가 남편에게 새벽 내내 장문의 이메일을 써서 보낸 적이 있다. 결과는? 당연히 참패. 분명 수신확인은 되어있었지만 며칠째 영 언급이 없었다. 대충 읽었을 게 뻔하다. 메일을 열어보고 '헉 왜 이렇게 길어?"하고 바로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은 활자 공포증이 있는 데다가 타이밍 공략 또한 완전히 실패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남편은 회사에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편이다. 이렇게 출근 후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사람인데 내가 왜 이메일이라는 방법을 택했을까?


"내가 당신 마음을 몰랐네, 정말 미안해."라고 이야기해 줄 것이라고 귀엽게 착각했던 내 모습에 그저 실소가 나왔다. 남편 때문에 화가 났던 마음은 더욱 분노로 가득 찼다. 내 아까운 새벽시간! 그 시간에 잠이나 자는 게 나았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본인의 마음을 추스르며 글을 쓰는 용도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내용이 긴 이메일은 영 아니올시다. 점심시간에 짧게 카톡을 보내는 방법이 백배 나았을 것이다. 결론은,


일기는 반드시 일기장에!

편지는 최대한 간결하게!




5분간 눈 마주치고 손잡고 대화하기


하도 남편과 싸운다고 하니까 교회 언니가 알려준 방법이다. 이 방법대로 라면 분명 100% 성공이라면서. 둘 중 한 명이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결국은 화해로 마무리되는 아주 극적인 방법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물론 내 속을 박박 긁어 놓은 미운 사람의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 딱 5분이니까, 드라마틱한 결과를 기대하며 5분만 참아 보기로 했다. 그날 밤 당장 실행에 옮겼다. 일단 소파에 앉아서 남편의 참여를 설득시키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뭐 라도 시도해 보려는 나와는 달리 할 마음이 전혀 없었나 보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도 벌써 기운이 반쯤 빠졌다. 어쨌거나 겨우 억지로 동참시켰다. 타이머로 시간을 재고, 손을 잡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남편은 분명 나를 보고 있었지만,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가 공부하라는 잔소리에 억지로 책상에 앉아있는 10대 청소년 같았다.   


"나를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야?

"딴생각하는 거 같은데?"

"왜 하기 싫어?"


해피엔딩 일 줄 알았으나 웬걸, 내 쪽에서 연이어 잔소리만 쏟아내고, 결국 화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5분이라는 시간은 성격 급한 나에게는 인내심을 테스트하기에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애석하게도 우리 부부에게는 안 먹히는 방법이었다. 그 후로 이 방법은 단 한 번도 재 시도되지 않았다. 남들이 다 성공하는 화해의 방법이라고 한들 우리 부부에게 성공을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버지학교 강제 등록


‘두란노’라는 기독교 복음주의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아버지학교'라는 것이 있다. 가정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키고, 아버지의 올바른 정체성과 역할을 제시한다는데 목적이 있다는데, 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하단 말인가! 가정 불화의 원인이 모두 남편 탓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남편의 변화를 꿈꾸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장 남편을 이 과정에 등록시켰다. 다행히 집 바로 근처의 교회에서 프로그램이 개설되었고 개강일도 얼마 안 남았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실제로 아무리 가부장적이고 연세가 꽤나 지긋하신 분들도 아버지학교를 통해 180도 바뀐 사례를 여러 번 목격해 왔기에 더욱 기대감은 컸다. 분명 우리 남편도 달라질 거고, 본인의 문제를 자각하고 반성할 거라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 무한 반복되는 부부싸움도 이제는 종말이 오는구나 싶어서 내적 춤바람이 절로 났다. 하지만 남편은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아내에게 편지를 최근에 써본 적이 있으신 분?" 

(나는 생일 때 꼭 손 편지를 요청하곤 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자녀의 요청에 같이 놀아 주시는 분?"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비록 좋은 남편은 아닐지라도 좋은 아빠는 맞다. 완전 딸바보 아들바보니까.)


목사님의 이러한 질문에 손을 번쩍 든 사람은 오직 남편 밖에 없었다고 한다. 주변에서도 "아니 이렇게 이미 훌륭한 아빠가 왜 여길 오셨나요?"라며 의아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자신은 이미 우월한 아빠였다며, 자뻑으로 마무리되는 어이없는 결론일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대 참사에 한동안 나는 말을 잃었다. 뒤통수도 이런 뒤통수가 어디 있을까?


시사점을 찾아보자면, 현재의 모습에서 변화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내가 감히 관여할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데일카네기의 저서 <인간관계론>에서도 "배우자를 바꾸려 들지 마라(Don't try to make partner over.)"고 지적한다. 배우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도록 놓아두고, 나름대로의 방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편이 원하지도,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던 '아버지학교'에 등 떠밀어서 보냈던 나의 행동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아깝게 날려버린 등록비여! 그 돈으로 치킨이나 몇 번 사 먹을 껄.




가출


1박도 아닌, 당일 가출(오전에 나가서 애들 잠들고 저녁에 복귀)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사건이 있다. 대략의 개요는 이렇다. 외출을 앞두고 부지런히 움직였던 주말 아침, 왜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화가 나서 머리끝까지 나서 폭발 직전이었다. 결국 "나 안가! 당신이 애들 데리고 셋이서 나가."라며 선전포고를 날렸다. 그렇다고 날씨도 쾌청한 날, 집에만 있기는 싫었는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던 쓰리이는 결국 유유히 밖으로 사라졌다. 남편이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이 좀 다스려질 줄 알았는데, 쉽게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조용한 집에서 빨래를 개고 있다가 도저히 분이 안 풀려서 그 길로 빨래고 뭐고 내던지고 뛰쳐나갔다.


일단 휴대폰부터 전원을 껐다. 분명 호기롭게 집에서 나왔건만 막상 밖에 나오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카페에 가봤자 끽해야 한두 시간 때울 수 있고, 그렇다고 혼자 노래방을 갈 수도 없지 않겠는가? 뭔가 더 오래 짱 박혀 있을 곳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찜질방이라도, 혹은 쾌적하게 호텔 1박을 할 껄 그랬다.) 당시 대학원에 다니고 있을 때라 결국은 만만한 연구실로 발걸음이 향했다. 시험 기간도 끝났고, 주말이라 그런지 유독 텅 비어 있던 교정은 정적마저 느껴졌다. 물론 처음에는 가족들을 챙길 필요 없이 홀로 있다 보니 세상 편하고 좋았다.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 싶어 노룬산 시장으로 가서 애정하는 떡볶이도 한 그릇 했다. 역시나 먹고 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이 또한 지금 생각해보니 스테이크라도 썰 걸 그랬다.)


그렇다, 끽해야 연구실에 시장 떢볶이의 조합이 당시 나의 가출이었다. 세상 이런 건전한 일탈이 있나! 아무튼 꼴 보기 싫은 쓰리이 없이 신나게 내내 하이텐션을 유지할 줄 알았지만, 결국은 밤이 되자 누가 애 엄마 아니랄까 봐 아이들 걱정이 몰려왔다. 밥은 잘 챙겨 먹었으려나, 목욕은 제대로 했으려나, 기침은 좀 잦아졌으려나 등등… 결국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남편 걱정은 전혀 안 했지만. 잠들기 전 아이들은 "엄마가 빨리 다시 집에 돌아오게 해 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하며 울다 울다 지쳐 잠들었다고 한다. 내내 연락이 두절된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며 얼마나 불안했을까! 


남편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들에게까지 전이될 필요는 없었다. 어른 답게 성숙하게 둘이서 잘 해결했어야 했다. 굳이 애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 같아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다음 날 사죄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꼭 껴안아주며 다짐했다. 앞으로 절대로 엄마가 잠적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순간의 욱하는 감정으로 저질러버린 극단적인 행동은 결코 합리화될 수 없었다. 가족에게 상처를 남기는 방법은 더군다나 피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이 날의 가출은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이 되었다.




친정 엄마에게 하소연하기


평소에 시시콜콜 실시간으로 연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친정 엄마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다. 게다가 위로 언니도 있어서 우리 한자매와 엄마까지 세 모녀는 종종 모임을 가지곤 한다. 이때 충분히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남편'이다.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래서 싸웠고 등등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제가 해결이 되기보다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든다. 게다가 "어머 이서방 너무하네~"와 같은 반응이나 맞장구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냉랭하다, 


"그래도 너 같이 하자가 많은 아내 데리고 살아주는 게 어디야! 네가 잘해."라는 엄마의 반응,

"야, 그 정도면 양반이지, 우리 남편은 더해!"라며 공감 따위는 일절 없는 언니


내가 지금 누구에게 무얼 말한 거지? 현타가 온다. 아, 그냥 말을 안 하는 게 낫다 싶다. 한마디로 본전도 못 찾는다. 의미도 없고, 별 소득이 없어서 남편 험담하기를 멈추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굳이 친정식구들에게 남편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듯하다. 차라리 좋은 점을 칭찬하거나, 같이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나누는 걸 추천한다.




화났을 때 대처방안 실패사례는 아니지만, 번외로 <남편과 관계 회복을 위해 시도했던 행동> 중 실패사례 세 가지도 잠시 언급해 본다.  



1. 커플 아이템

더 이상 우리는 풋풋한 20대가 아니다. 중년의 부부에게 커플 아이템이란 당사자도, 지켜보는 사람도 민망하다. 어쩌다가 같이 신어보겠다며 마련한 똑같은 디자인의 운동화는 차마 민망해서 몇 번 신어보지 못하고 신발장에 고이 모셔 두었다. 머지않아 각각 중고거래 앱에 매물로 내놓는 것으로 커플템은 종결되었다. 색깔을 비슷하게 맞춰 입는 등 시밀러룩(similar look)이 차리리 낫다는 결론.


2. 취미 공유

도서관에 가서 잔뜩 책을 빌려오는 날이면 냉장고에 쌀과 김치가 가득 찬 것 마냥 부자 된 기분인 나와는 달리 남편은 책과 거리가 멀다. 세상의 모든 지식의 집약본이라고 안 읽으면 손해라고 아무리 외쳐본 들, 남편은 유튜브에 찾아보면 다 있다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같이 우아하게 차 한잔 마시면서 독서하는 모습은 그냥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걸로 인정하고 빠른 포기를 했다. 최근에는 남편과 같이 러닝을 시도했다가 역시나 또 실패한 적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취미생활은 각자 즐기는 걸로 정했다.  


3. 같이 영화 보기

물론 이 또한 취미생활 중의 하나이지만, 따로 빼서 언급하는 이유는 여타의 취미랑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영화라는 것은 집에서 본다고 해도 보통 2시간은 걸린다. 영화관을 가려면 오고 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소요 시간은 더 늘어난다. 즉, 짬짬이 할 수 있는 게 아닌 시간이 꽤 오래 필요한 활동이라는 점이 여타의 취미와는 다르다. 아이들도 관건이다. 몇 시간 부모와 분리되려면 친정이든 시댁이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자녀들이 엄빠와 떨어져 있는 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나이라면 해당사항 없지만) 몇 번 되지 않지만, 애들을 친정에서 재워 놓고 맡겨 둔 후 심야영화를 보러 갔다가 애들이 깨서 울면서 나를 찾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다시 새벽에 간 적도 있다. 이렇게 소모적이고 마음이 불편했던 경험을 한 후 더 이상 같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 


또한 개봉하는 영화 날짜에 맞춰 연차를 내겠다는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망한 적도 있었다. 같이 영화를 본들 팝콘을 사니 마느니, 콜라를 마시니 마니로도 의견 충돌이 일어나서 피곤하다. 무엇보다 영화보다 맛집이 더 좋은 나로서는 극장 데이트에 매력을 못 느끼는 이유도 있다. 아무튼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상황에는 안 맞는다. 영화 대신 육퇴 후 여행이나 음악 프로그램을 보거나, 주말에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전체관람과 영화를 다 함께 보는 것으로 타결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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