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고 치사하지만, '사랑받는 아내'가 결국 위너라는 사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명장면이라 할 수 있는 태오(박해준)의 사고 신을 기억하는가? 외도하는 남편과 기껏 이혼하기로 합의해 놓고 돌아선 후 선우(김희애)는 남편이 대형 트럭에 치일 뻔한 장면을 목격한다. 다행히 태오는 무사했고, 서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본능적으로 부부가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이 나온다. 어쩜 이렇게도 애증의 감정을 소름 끼치게 잘 표현했을까? 비록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던 남편일지라도 순식간에 '제발 살아있기를'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바뀌는 게 바로 부부인가 보다. 사고 현장으로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러 황급히 달려가던 선우의 내레이션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 심장을 난도질했던 가해자
내가 죽여버린 나의 적
치열하게 증오했고
처절하게 사랑했던 당신
적이자 전우였고
동지이자 원수였던 내 남자, 남편
-<부부의 세계> 16회 중-
이게 바로 부부인가 보다. 가장 나를 열폭하게 만드는 사람도, 가장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도 남편이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 부부도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마다 의기투합을 하게 된 것 같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지인의 죽음을 통해 한없이 무기력했던 순간, 영끌해서 기적같이 겨우 집을 마련하게 된 기쁨의 순간, 가족들이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드나들며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던 위급했던 순간 등등.... 결국은 미우나 고우나 서로 가장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고, 저질 영어 실력을 선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여행 파트너이자, 쌩얼에 거지꼴로 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으며, 어디를 가나 인생 샷을 남겨주는 우리 가족 전용 포토그래퍼이자, 아이들에게 최고 놀이 상대인 다정한 아빠, 바로 내 남편.
16년의 결혼생활 경험과 주변에 수많은 부부들을 보면서 결국, "그래도 내 남편이 최고!"라는, 다소 김 빠진 소리 같은, 그리고 어이없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리고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사랑받는 아내'가 결국은 위너였다. 서로 미워해봤자 누워서 침 뱉는 꼴이고, 소모적이고 무가치한 일이니까. 각자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 보듬어주고, 아껴주며, 두 손을 잡고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파트너임을 잊지 말기로 했다. 평생 함께 할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기로 했다. 남편은 필요 없어도 애들 아빠로는 필요하기에, 앞으로 남은 인생 잘 지내보려 한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이고, 수많은 후보를 거쳐 만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남편과 맺은 부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수도 없이 싸웠다. 나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다 보니 남편의 모든 행동과 말이 미워도 그렇게도 미울 수가 없었다. 사사건건 부딪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오는가 보다. 예전보다 확실히 덜 싸우고, 서로 배려하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부끄럽게도 결혼이고 뭐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자식이고 뭐고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험한 세월을 버티길 잘했다 싶다.
물론 나의 의지적인 결단과 노력도 한 몫 한다. 미친척하고 "보고 싶어, 오빠"라고 다소 자극적이고 장난스러운 카톡 메시지를 보내봤다. 그랬더니 평소에는 몇 시간 후에나 겨우 메시지를 확인하는 사람이 이런 메시지는 즉각 수신 확인을 하고 심지어 답톡도 실시간으로 보내왔다. (아, 이러서 기자들이 뉴스 제목을 가능한 자극적이게 뽑아내는가 보다.) 때로는 걷다가 슬쩍 팔짱을 껴 보기도 하고, 운전중인 남편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아낌없이 해본다. 덕분인지 최근에 남편은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꽃을 안겨준 적도 있고(비록 한 두 번으로 끝났지만), 마카롱을 사 오기는 날도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이렇게 서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렇게 맨날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해도 내가 좋아?"
"응, 나는 오직 당신 밖에 없어." 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남편. 여전히 내 속을 갉아먹고 열불 나게 만드는 언행불일치는 어쩌라는 건지. 물론 이 대답도 거짓말인 거 알지만 일단 모른 척 눈감고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나도 덧붙였다. 약간의 사심을 담아서 말이다.
"여보, 근데 그거 알아? 당신은 집안일 도와줄 때가 제일 섹시해. 설거지하는 뒤태는 세상 무엇보다도 겁나 멋지고, 음쓰 버리러 나가는 그 모습은 마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예수님 같아. 말없이 빨래를 널어줄 때는 손흥민도 부럽지 않을 정도라니까."
여전히 결혼 후에도 밀당은 진행 중이고, 눈치 싸움도 여전히 끝나지 않지만 그래도 감사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심을, 매일 새 아침을 주심을, 적당한 망각의 은사를 주심을. 행동도, 성격도, 심지어 말투도 절묘하게 우리를 닮은 예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고 있고, 어디를 가나 에피소드가 넘쳐나서 절대 심심할 리가 없는 우리 소중한 네 식구가 있다는 건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싸우고도 돌아서면 왜 다퉜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지내는 걸 보면 우리도 참 못 말리는 부부다.
캠퍼스를 같이 거닐던, 그때 그 시절의 설렘과 추억을 되살려볼 겸 조만간 아이들과 함께 모교를 방문해 봐야겠다. (그 동네 간 김에 양꼬치도 먹고 와야지! 언제나 먹는 게 이끄는 삶) 아, 그리고 싸이월드 사진첩이라도 뒤져보며 추억을 소환시켜 봐야겠다. 비록 사랑에서 의리로 변한 지 한참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한 팀이니까.
모든 것이 허용되었을 때도,
모든 것이 거부당했을 때도,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괴테 -
썩 내키지는 않지만 평생 변하지 않는, 참다운 사랑을 다짐해 본다. 비록 결심하고 돌아서자마자 바로 또 무너지겠지만. 어쨌거나 지금까지 우리 가족 먹여 살리느라, 그리고 앙칼진 아내 눈치 보며 지내느라 고생한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는 남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의 1/10만큼만 나 한 테도 했으면 좋겠다. 부디 대외적인 스윗한 이미지 말고, 진짜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길. (알겠어, 나도 더 잘할테니.)